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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과 신학

기본소득이 주는 고민 / 이승윤

기본소득이 주는 고민[각주:1]

 

이승윤(중앙대학교 사회복지학부)

 


1. 변화하는 노동과 상품화 된 불안정노동자

 


다중활동을 기반으로 하는 인간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삶을 영위하기 위한 중요한 전제 조건은 소득보장이다. 그런데 적정수준의 소득을 보장받는 것이, 반드시 시장에서의 ‘일’을 통한 소득보장이어야 할까? 자본주의체제에서 ‘일’에의 강요, ‘쓸모’에의 강요에 의해 우리는 이 물음에 반문하지 못하도록 길들여졌다. 하지만 이 질문은 우리에게 보다 본질적인 고민을 던진다.

 

모든 개인은 자신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어느 정도의 소득에 대한 욕구가 있을 것이다. 또한 한 개인은 자신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다양한 형태의 노력, 행동, 활동 그리고 노동을 한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은, 한 개인의 소득에 대한 욕구가, 그 개인이 자신의 삶을 유지하기 위하여 하는 모든 노력과 행동들이 반드시 타인 (또는 법, 노동시장, 제도 등)에 의해 인정을 받아야만, 그리고 그 인정에 따른 ‘가격매김’을 통해서만 충족되어야 하는가?-이다. 즉, 가격이 매겨질 수 있는 ‘노동’을 통해서만, 삶의 영위를 위한 ‘소득’에 대한 기본적 욕구가 충족되어야 하는 것일까? 보다 심각한 질문은, 인간이 소득에 대한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하는 노력들이, 반드시 타인의 ‘인정’과 ‘가격매김’에 의해 충족될 수 있는 즉자화(卽自)된 상태에서, ‘가격매김’이 되는 노동의 총량자체가 줄어들거나 가격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매겨지는지 계속 모호해질 때, 즉자적 인간의 소득에 대한 욕구는 어떻게, 그리고 누구에 의해 충족될 수 있을까?

 

상품화 된 인간이 노동을 통해서 소득을 얻고 삶을 영위하는 장(場)인 노동시장에서의 불안정성에 대한 기존의 연구들은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누가 불안정 노동자인가?’에 대한 답을 찾고자 하는 연구들이다. 이러한 접근은 불안정 노동에 속한 사회경제적 집단이 누구인지를 규명하는데 관심을 갖는다. 종사상 지위의 취약성(vulnerable work) 그리고 일용직(disposable work), 임시직(contingent work)이어서 고용안정성이 부재한 임금노동자를 불안정 노동자로 정의해왔다. Standing(2009)의 경우에는 프레카리아트(precariat)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불안정 노동을 사회경제적 집단의 관점에서 접근한다. 또한 비경제활동 인구에 속하지만 취업이 가능한 잠재실업자들도 노동시장에서의 불안정성에 지속적으로 노출되어 있는 계층이다. 둘째는 불안정성의 속성에 주목하는 연구들이다. 이들 연구들은 다양한 형태의 노동 안정성이 결핍된 상태(백승호, 2014, 백승호·이승윤, 2014; 서정희·박경하, 2015)에 집중한다. 이러한 연구들은, 임금적 측면의 불안정성, 고용관계의 불안정성, 사회적 임금으로부터의 배제에 의한 불안정성, 자원의 결핍에 대한 불안성정 등이 한 개인이 경험할 수 있는 불안정성을 다양한 측면에서 논하고 있다.

 

다양한 측면에서 노동시장의 불안정성 확대가 논의되고 있는 가운데, 그렇다면 노동시장에서 일자리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변하고 있는가? 이러한 변화는 상품화된 노동자의 불안정성에 어떤 함의를 가지고 있는가?

 

서비스 부문 일자리가 주로 저숙련, 비정규직 위주로 확장됨으로써 여성, 노인, 이주자, 청년 등 노동시장 취약계층이 서비스 부문의 노동 수요를 충당하고 있는 가운데, 전통적 산업사회와는 전혀 다른 고용 형태 및 일의 형태들이 등장하고 있다. 특히, 1970년대 이후 자본주의 경제체제는 지구화 정보기술의 발달과 함께 여러 혁명적 변화를 경험해왔는데(Vosko et. al., 2009) 이러한 변화는 작업장 환경의 변화를 수반하였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변화의 핵심에는 전통적 산업사회를 지탱해왔던 표준적 고용관계(Standard Employment Relationship, SER)의 해체가 위치해 있다(백승호, 2014;Kalleberg, 2000, 2009; Bosch, 2004). 특히, 청년의 경우 표준적 고용관계에서 벗어난 고용계약 형태들, 지식기반 서비스 경제사회에서 새롭게 등장하는 고용 및 일의 형태들을 집중적으로 경험되고 있다.

 

비정규직의 증가, 하청노동의 증가, 프리랜서와 가짜자영업자의 증가에 더하여 플랫폼 노동의 모습은 이전의 전통적 표준고용관계에서 보이는 것과는 매우 다른 모습으로 고용관계의 모호성, 평가자의 다수화, 쉼과 일의 경계, 비생산적인 시간과 생산적인 시간의 모호성, 작업장소와 사적공간 등의 경계가 무너지는 ‘액화노동(melting labour)‘(이승윤 2019)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은 노동의 액화(the melting of the labour)는 사회보장제도의 적응을 요구한다. 현대 복지국가의 근간을 이루는 사회보험 제도는 특정한 노동형태와 노동시장을 전제하여 발전해왔기 때문이다. 제조업의 안정적인 고용창출능력을 바탕으로 대부분의 노동시장 참여자가 표준적 고용관계 속에서 안정적으로 기여금을 납부하고, 질병, 노령, 장애, 사망, 산업재해, 실업과 같은 예외적 상황이 발생했을 때 급여를 수급하는 것이 사회보험의 원리다. 노동의 변화는 기존의 사회보장제도와 노동시장 간의 부정합을 초래했다. 예를 들어, 현 사회보장 시스템에서는 플랫폼 노동자의 고용주를 특정하지 못하고 있는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즉, 고용주가 사회보험료의 절반 이상을 부담하고 있는데 이를 납부할 주체를 찾는 것이 어렵다. 하지만, 플랫폼노동자는 일을 실제로 하고 있지 않아도, 대기시간 또는 다음 일감을 찾는 등의 비생산적인 시간 또한 상시적으로 생긴다. 이러한 생산적인 시간과 비생산적인 시간의 경제는 실업의 의미에 모호성을 더하게 된다. 실업보험은 실업으로 인한 소득단절에 대한 제도이므로, ‘실업’을 명확하게 정의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러나 플랫폼 노동자의 경우 이것이 쉽지 않은 문제가 있는 것이다.

 


2. 변화하는 일의 형태와 제도의 부정합

 

자본주의 체제에서 노동시장에서의 불평등을 20세기에 만들어진 복지국가가 조정해왔다면, 이제 20세기 복지국가는 더 이상 21세기의 새로운 정치, 경제, 사회적 환경변화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은 많은 연구자들에 의해 제기되어 왔다. 특히, 1990년대부터 비스마르크식(사회보험 중심 복지제도조합) 복지국가가 탈산업화시대에 정합성이 있는지 대한 논의가 있어왔다. 이러한 논의에는 노동시장의 변화가 주요하게 언급되는데, 지난 30여 년간 노동시장의 주요한 변화는 산업사회에서 서비스경제로의 전환에 의해서 추동되었다.


노동시장에서의 변화들은, 전통적 산업사회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복지제도가 현실과 부합하지 못하여 발생되는 '복지정책의 제도적 지체', 그리고 이로 인한 ‘새로운 배제’를 유발시킬 수 있다. 역사적으로 복지국가는 임금노동자의 소득보장 목적 중심으로 발전해왔는데, 이러한 기본전제인 ‘임금노동자’의 성격이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변화하는 노동시장의 구조에 사회정책이 얼마나 정합성을 가지고 대응하느냐의 여부에 따라, 사회정책의 불평등과 빈곤완화 효과가 논의될 수 있는 것이다. 기존의 연구에 따르면(Emmenegger et al. 2012), 주로 저숙련 서비스 직종에서 외부자 지위가 고착화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서비스 경제로의 산업구조 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서비스 경제의 가장 전형적인 특징은 저임금, 저숙련, 사회적 보호의 배제를 특징으로 하는 직업 계층의 확대라 할 수 있다. 이는 서비스 부문의 낮은 생산성에 대응하여 노동비용을 줄이고자하는 기업의 고용전략과 관련되고, 이때 노동비용은 사회보험 비용까지 포함된다. 이러한 서비스 경제사회에서의 기업들은 구조조정, 아웃소싱, 비정규직의 채용 등 저임금 저숙련을 특징으로 하는 저숙련 서비스 부문을 지속적으로 양산시킬 수 있다(백승욱, 2008; Eichhorst and Marx, 2012).

 

다시 복지국가 논의와 노동시장의 변화에 대해 언급하자면, 기존의 사회보험 중심의 사회보장 제도는 전통적 표준고용관계를 전제로 설계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표준적 고용관계에서 이탈한 새로 생겨나는 많은 일자리들은 기존의 사회보장제도에 포괄되지 못하는 문제를 지적할 수 있다. 생산체제의 변화와 그에 조응하지 못하는 복지제도는 결국 노동시장의 불안정성 확대와 연결된다. 특히 노동시장에 새로 진입하는 청년층은 비전형적 고용관계에 노출된 전형적인 인구집단이다(김교성 외, 2010). 결국 완전고용을 전제로 하던 기존 사회정책들은 노동시장에 진입하는 것조차 힘든 청년들에게서 효과적으로 작동하기 힘들다. 예를 들어, 불안정한 직업경력은 사회보장제도에서의 배제와 악순환 관계를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서비스경제로의 진입에서 이어 이제 플랫폼 경제로의 진입의 논의되고 있다. 인공지능, 디지털 기술, 로봇, 빅데이터 등 최근의 기술발전은 4차 산업혁명이라는 담론을 이끌어냈다. 증기기관에 의한 1차 혁명, 전기를 기반으로 한 분업과 대량생산이 이루어진 2차 혁명, IT 기술의 발전과 함께 일어난 3차 혁명을 지나 인공지능으로 대표되는 4차 혁명기가 도래한 것이다(Haldane 2015). 우버와 에어비앤비는 4차 산업혁명으로 인해 변화된 자본주의 형태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러한 경제구조는 공유경제(sharing economy) 혹은 플랫폼 경제(platform economy)라고 일컬어지는데 기술의 변화가 새로운 비즈니스모델과 결합되면서 생겨난 새로운 경제구조를 의미한다. 디지털 플랫폼은 인공지능, 기계학습, 집약적 자동화 등을 통해 경제 전반의 생산성 향상을 일구어 낼 수 있지만 플랫폼 자본주의 하에서는 플랫폼 소유자가 독점적으로 지대를 포획하거나 초과지대를 수취할 수 있다. 또한 플랫폼 자본주의는 규제를 회피할 수 있고 계약 노동자를 활용하기 때문에 노동력의 불안정성을 증폭시키고 경제적 이득이 비대칭적으로 분배되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Scholz 2016).

 

이처럼 기술 발전과 경제구조의 변화는 노동시장의 불안정성과 분배구조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기술발전으로 인해 대규모의 고용상실이 일어나는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지만 로봇 사용으로 인해 숙련 일자리가 감소하고 온라인 플랫폼의 사용이 전통적 고용관계와는 다른 고용형태를 양산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디지털 기반의 기그경제에서는 노동이 주문형 노동력(workforce on demand), 액체 노동(liquid labour), 크라우드소싱(crowdsourcing) 등으로 활용된다. 크라우드소싱은 기존에 노동시장 참여가 어려웠던 장애인이나 청년 등이 노동시장에 참여할 기회를 가질 수 있고 노동시간의 유연한 활용이 가능하며 부가소득을 얻을 수 있다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지만 저임금 노동, 불안정한 단기 노동계약을 반복적으로 활용한다는 점에서는 기존의 아웃소싱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여유진 외 2017). 특히 크라우드소싱은 기업에게는 노동비용을 줄이고 규제를 회피하는 등의 이점을 가져다주지만 현행 사회계약에서는 크라우드소싱에 의한 노동자에 대한 사회적 보호가 이루어지지 않아 불안정 노동자를 양산하는 계기가 된다(여유진 외 2017). 또한 플랫폼을 통해서 노동 및 서비스의 수요와 공급이 연결되는 기그경제에서는 고용주와 피고용인의 관계가 명확하지 않은 고용형태가 증가하기 때문에 전통적인 고용계약 관계에 입각한 기존의 사회적 보호는 제대로 기능할 수 없고 불안정 노동자들이 증가하게 된다. 이러한 불안정 노동의 일상화는 불평등의 확산과 구조화로 이어져 그 문제가 더 심각하다(신광영, 2013). (최)상류층이 전체 소득에 상당부분을 독식하며 자체 추진력에 의해 불평등 수준은 계속 심화되고 있다. 또한, 의료와 건강의 양극화, 교육의 양극화로 연결되어 부와 빈곤의 세대 간 이전과 불평등 구조의 영속화 혹은 고착화에 기여하고 있다. 특히 플랫폼을 매개로 하는 디지털 경제에서는, 누구나 네트워크와 플랫폼에 접근할 수 있지만 소유자는 집중되기 때문에 부의 분배 문제가 심화될 수 있다(여유진 외 2017: 131). 이렇게 기술변화에 따라 노동시장 상황이 재편되면서 복지국가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요구되고 있는 가운데 전통적 복지국가의 대안으로서 기본소득 논의가 증가하고 있다.

 

3. 기본소득이 인간해방에 기여할 수 있을까

 

지식생산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해방을 목표로 해야 한다(Wright, 2012). ‘해방적(emancipatory)’이란 ‘인간에 대한 억압과 사회적 불평등을 제거하고,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다(Wright, 2012:41). 여기서 풍요란 물질적 박탈로 인한 욕구가 충족된 상태뿐 아니라,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재능과 능력을 개발하고 발휘할 수 있는 조건이 보장된 상태를 의미한다. 인간해방을 위한 복지국가란 모든 사람들이 풍요롭게 사는데 필요한 물질적, 사회적 수단에 대해 평등한 접근권을 보장하는 국가를 의미한다.

 

이러한 해방적 복지국가 전략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앞서 기술한 것과 같이 기존의 복지국가가 인간이 풍요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조건을 보장하는데 있어 심각한 한계가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특히 기술혁명과 함께 자본주의의 작동방식이 근본적으로 변화되고 있고, 그로 인해 전통적 복지국가가 포괄했던 사회적 위험구조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사회적 위험의 확산이 진행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적 복지국가는 이를 충분히 포괄하지 못해왔고, 변화된 자본주의와 기존 복지국가 제도들 사이의 부정합으로 인해 불평등과 양극화가 심화되어왔다(김교성·백승호·서정희·이승윤, 2018)

 

이러한 제도적 부정합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도에 대한 미시적 개혁이 아닌, 패러다임 수준의 개혁이 요구되고 있다. 기본소득 기반의 해방적 복지국가 전략은 단순하게 드러난 문제의 해결이라는 기능적 측면에서의 제도 개혁을 넘어설 것을 주문받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불평등과 양극화가 지속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존 복지국가의 제도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자본주의의 질적 변화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 필요하고, 그 진단에 기초한 근본적이고 새로운 패러다임의 제시가 필요하다.

 

구 사회주의가 몰락한 이후 30년이 흐르는 사이 자본주의는 산업자본주의에서 신자유주의의 광풍을 주도했던 금융자본주의를 거쳐 플랫폼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형태의 자본주의로 진화해가고 있다. 대기업 중심의 표준적 고용관계를 특징으로 했던 산업자본주의는 핵심역량을 중심으로 기업을 재편하는 전략을 통해 표준적 고용관계를 해체하고 일터의 균열을 가속화시켰다(Weil, 2015). 그 결과 불안정 노동은 노동시장의 일상적 풍경으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노동시장에서 일터의 균열과 불안정 노동의 일상화는 전통적 사회보장제도의 부정합과 결합되면서 노동의 불안정성을 더욱 강화시켜왔다. 또한 중장년 정규직의 안정성조차도 일자리의 불안정성 심화라는 의미에서 ‘허구적’이며, 이는 세대를 넘어 청년들의 불안정으로 이어지고 있다. 또한 소위 ‘내부자’로 분류되었던 대기업의 제조업 정규직 노동자들이 미끄럼틀식 사회경제적 지위 추락을 경험하는 것은 더 이상 예외적인 현상이 아니다(이승윤, 김승섭, 2015). 이러한 현상은 디지털 혁명이라는 과학기술의 발달이 촉발시킨 플랫폼 자본주의로의 전환과 함께 더욱 공고해지고 있다. 기술의 발달은 생산, 유통, 물류, 판매, 광고 등에서 기업의 노동에 대한 관리와 통제와 기업의 합법적인 사회적 보호 의무 회피를 더욱 용이하게 하고 있다. 하지만 기존의 연구들은 기술혁명을 주로 ‘혁신’, ‘경쟁력 강화’, ‘생산성 향상’의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다. 혁신의 대가를 누가 치루고 있는지, 혁신의 결실을 우리는 공정하게 나누고 있는지 물을 필요가 있다.

 

기본소득제가 도입된 해방적 복지국가의 원칙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기본소득 중심 해방적 복지국가는 사회정의를 실현할 수 있어야한다. 사회정의 실현을 위해서는 모든 사람들이 풍요로운 삶을 누리는데 필요한 물질적, 사회적 수단에 평등하게 접근할 권리를 가져야 한다. 기본소득 중심 해방적 복지국가에서 평등한 접근권은 원래 모두의 몫이었던 공유부에 대해 모든 사람에게 공유지분 배당권을 보장하는 것이다.

 

둘째, 해방적 복지국가 대안은 정치정의를 실현할 수 있어야한다. 정치정의 실현을 위해서는 실질적 자유와 민주주의적 의사결정에 대한 실질적 참여를 보장해야한다. 실질적 자유의 실현은 사회정의 원칙과도 연관되어 있으며, 실질적 정치참여는 민주주의 배당권의 보장을 통해 실현한다.

 

이상의 두 가지 원칙에 더하여 필자는 환경정의 원칙을 해방적 복지국가의 세 번째 원칙으로 제안하고자 한다. 이 원칙은 대안의 사회적 지속가능성과 관련되며, 사회적 지속가능성에서 중요한 것은 인류 자체의 존속을 위협하는 환경의 지속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어야한다. 환경정의 원칙은 환경보호조치를 촉진하거나 그로 인해 부정적인 영향을 받는 사람들에 대한 보상을 실현하는 생태배당을 보장함으로써 실행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

 

따라서 해방적 복지국가를 위한 대안은 사회정의, 정치정의, 환경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구체적인 로드맵을 제시함과 동시에, 재정적 실현가능성에 대한 정교한 구상이 결합된 대안이어야 한다.

 

4. 소결: 다중활동을 하는 인간의 본연의 모습 찾기

 

무조건적인 사회적 임금의 제공에 대한 논의에서 자주 제기되는 비판으로는 노동 유인이 감소하여 개인들의 일에 대한 의욕 자체가 감소한다는 것이다. 이에 우리는 실제로 인간이 ‘다중활동’을 하는데 있어 과연 외부적 유인이라는 것이 필요한가에 대해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삶의 영위를 위한 다양한 인간의 활동들이 그 자체로 평가될 때는 ‘노동, 일, 또는 활동’은 근본적 인간의 욕구이자, 필수적인 사회 유대, 미덕 및 타인에 대한 존중감의 근원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모든 시민에게 조건 없이 기본적 소득을 제공하는 것은 개인이 노동시장에서 경험할 수 있는 다양한 제약으로부터 자유해질 수 있도록 기여한다. 시장소득이 아닌 이러한 기본적 수준의 ‘사회적 소득’은 개인으로 하여금 비인간적인 노동조건을 거부할 수 있도록 하는데, 이는 개인이 단위당 시간의 ‘이용가치’와 시장에서의 ‘교환가치’를 선택하고 판단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는 것이다. 조건 없이 지급되는 이러한 보편적인 급여는 복지국가에 개인이 의존하게 되는 공공부조나 기타 사회보호와는 다르며, Anthony Giddens(1994)의 'generative policy'의 예로 개인/집단에게 자원을 부여함으로써 그들이 스스로의 삶을 계획하고 책임질 수 있도록 하는 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형태의 급여는 ‘자기스스로 결정하는 활동’(self-activity)을 장려하고 자유롭게 개인의 필요와 욕구를 채울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이러한 기본소득의 개념은, 임금노동의 정의가 모호해지고 ‘가격매김 (또는 높은 가격매김)’이 될 수 있는 노동의 필요가 총량적 측면에서 점차 줄어드는 지금의 시점 [각주:2]에서 또한 중요한 ‘현실적인’ 논점을 제시한다. 특히, 변화하는 노동시장과 복지국가의 정합성 논의에 있어 기본소득제는 현실적인 대안으로 검토될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줄이며, 노동의 의미에 대해 다시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기본소득제로 상품화된 노동과 다른 노동의 의미를 상상해본다.

 

노동의 의미가 변화하면 개인들 삶의 방식이 변화하고 사회의 모습도 달라질 것이다. 그런데 노동의 의미가 바뀌기 위해서는 또한 사회가 바뀌어야 한다. 지금의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기존의 ‘타인에 의해 인정’되어야만 하는 일과 관련된 제약들을 없애고, 아동기부터 모든 개인들에게 타인의 인정과 무관하게 자연스럽게 다양한 활동들을 접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져야 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일과 노동이 공부, 실험, 탐험 활동, 자원봉사, 교류, 다양한 문화적 예술적 활동들과 조화를 이룰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성장한 한 사회의 아동들은 청소년기를 마칠 즈음에는 자연스럽게 시장에서의 생산활동 영역으로도 진입하게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장에서의 노동은 일생의 다양한 차원 활동 중 하나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것이며, 궁극적으로 이들의 활동은 생산성에 기여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생산성에 대한 강조는 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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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il, D. N. (2015). "Capital and wealth in the twenty-first century". American Economic Review, 105(5), 34-37.

 

 

 

  1. 본 원고는 그동안의 필자의 논문과 발표문들의 일부를 다시 재작성하여 구성하였다는 것을 밝힙니다. (leesophiasy@gmail.com) [본문으로]
  2. 여기서 노동의 총량이 줄어든다는 것은 자본주의 체제의 노동시장에서 ‘임금’이 지급될 수 있는 일(paid work)로 노동을 정의했을 때의 주장이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