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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신학 2기/송도 아파트 단지 어린이 놀이터 사건

나와 그들 사이의 보이지 않는 경계선 / 이혜영

 

이혜영 (미국장로교(PCUSA) 파송 선교동역자, 여신학자협의회)

 

나는 아파트에 살고 있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는 건축된 지 4년정도 되는 신축 아파트인데 앞에 공원이 있다는 이유로 4년 전에 이 아파트로 이사를 왔다. 처음 이 아파트에 입주했을 때는 주위가 개발이 되지 않은 황량한 곳이었지만, 4년이 지난 지금은 주변에 높은 아파트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다. 불과 4년만의 일이다. 최근 우리 아파트 바로 옆에 이름난 대단지 아파트가 들어섰다. 그 아파트 입주를 앞두고 입주민들 사이에서 일어난 황당한 논쟁에 대해서 듣게 되었는데 그 내막은 이러하다. 그 아파트의 초등학생들이 들어갈 학교를 배정하는데 길을 건너면 바로 있는 초등학교에 배정하지 말고 조금 떨어진 곳이지만 아파트 촌에 사이에 있는 초등학교에 배정해 달라는 입주민들의 민원이 있었다는 것이다. 길 건너에 있는 초등학교는 재개발이 되지 않은 구역에 있어서 주로 빌라 촌에 살고 있는 학생들이 대부분 다니기 때문에 싫다는 이유였다. 그 이야기를 듣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도대체 ‘아파트’에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길래 학교 배정을 하는 것에서부터 그러한 차별적인 발언들을 서슴지 않는 것일까?

 

최근 인천 영종도 한 아파트에서 그 아파트에 살고 있지 않은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놀고 있다는 이유로 도둑 취급을 당하고 경비실에 30분이나 붙잡혀 있었다는 기사를 접했다. (https://news.v.daum.net/v/kom2xF8swz) 아파트에 사는 ‘나’와 아파트가 아닌 곳에 사는 ‘그들’을 구분 짓고 경계를 하는 이런 현상은 비단 우리 동네의 일만은 아닌 것이다. 사회 내에 꼭 필요한 시설들 중 특정 시설 혹은 땅값을 떨어뜨릴 만한 시설이 자신이 거주하는 지역에 들어서는 것을 반대하는 님비 현상(NIMBY- Not In My Back Yard)과도 맞물려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아파트에 펜스가 쳐지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고, 특수 학교가 우리 동네에 오는 것을 반대하고,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 수 없는 이러한 현상이 과연 정상적인 것일까?

 

어디서부터 잘못 된 걸까? 우리는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각종 갑질과 차별에 분노하지만 ‘나와 그들’로 경계와 구분을 짓는 것 역시 그와 같은 갑질과 차별의 일종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걸까? 더 걱정되는 문제는 이러한 어른들의 삐뚤어진 관점과 편견을 아이들이 그대로 답습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결과 중심의 성적표의 숫자가 중요하고, 타인보다 더 높은 연봉을 받는 것이 중요하고, 더 좋은 아파트에 사는 것이 성공의 척도가 되어 버린 세상에서 아이들은 과연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어 가고 경험할 수 있을까?

 

서두에서 이야기했던 아파트의 학군 문제는 오랜 논쟁 끝에 길 건너 학교에 배정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그러한 결정이 딱히 기쁘지만 않은 것은 부모들로부터 답습된 관점을 가진 학생들이 학교 내에서 또 다른 갈등을 조장하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 때문이다. “너 어디 사니?”라는 일상적인 질문이 같은 반 친구에 대한 ‘관심’과 ‘환대’에서 비롯한 질문이 아닌 ‘배제’와 ‘경계’를 전제로 ‘나와 그들’이라는 보이지 않는 선을 긋기 위한 질문이 된다는 것은 무척 슬픈 일이다.

 

신자유주의 시대가 종용하는 결과 중심의 물질만능주의시대에서 ‘아파트’라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결과물로써 ‘나’와 ‘그들’을 구분하는 척도가 되어 버린 것 같다. 경쟁을 통해 성취한 아파트라는 결과물이 어떤 이들에게는 성공의 척도로 작용하게 되면서 ‘배제’와 ‘경계’가 마치 자연스러운 양 자리 잡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이러한 ‘배제’와 ‘경계’를 통해서 안정감과 소속감을 느끼게 되니, 타인에 대한 ‘관심’과 ‘환대’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가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런 타인을 배제하는 삶은 단지 아파트에 사는 사람과 그렇지 않는 사람의 구분에서 그치지 않는다. 여성, 외국인 노동자, 이주 여성, 성소수자 등 사회적으로 소외 당하고 있는 집단들과 그렇지 않는 집단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선을 그어 두고, 그 선 안에 있음으로써 안정감과 소속감을 느끼곤 한다.

 

차별과 배제가 일상이 되어가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어떠한 가치를 따라가고 무엇을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하는지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도인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받아주시고 환대하셨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종교개혁에서 주장되었던 칭의론도 아무 공로 없는 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하나님의 자녀가 됐다는 것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베풀어 주시고 거저 주신 환대의 마음을 다시 한번 떠올려본다. 러셀의 말을 빌리자면, 기독교 신학의 전통으로서 선택의 개념에 관련하여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nobody)’ 존재로 여겨졌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의 선물로써 인간의 완전한 가치와 존엄성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로 포함되었다 (레티 러셀, 공정한 환대, 여금현 옮김, 한국, 서울:대한기독교서회, 2012, p. 81).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께로부터 거저 받은 환대를 베풀면서 사는 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교회로서,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

 

신약 성서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헐벗고 굶주리고 병든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오신다고 말씀하셨다 (마 25:31-46). 마태복음 25:40에 따르면 “너희가 여기 내 형재 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구원과 멸망은 낯선 이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심판 때에 구원 받는 사람들은 헐벗은 낯선 이를 무조건 환대한 사람들이다. 예수님은 사회에서 경계 밖에 있는 이들과 함께 하기를 마다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즐거워하셨다. 심지어 그것이 사회문화적으로 또 종교적으로 금기시되는 일이었음에도 그 어떠한 비난도 예수님의 환대를 막지 못했다.

 

하나님이 인간을 향해 거저 주시는 환대를 우리는 우리의 삶에 어떻게 적용하고 살아가 할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환대를 실천하는 건강한 선교형 교회를 주장하는 마크 데이마즈(Mark DeYmaz)는 그의 책에서 다양한 낯선 이들이 모인 교회에서 진정한 환대는 소수자와 여성들의 목소리를 듣고, 이들을 정책결정에 주요한 결정자로 초대, 주체가 되도록 하여야 함을 강조한다 (Mark DeYmaz, Leading a Healthy Multi-Ethnic Church: Seven Common Challenges and How to Overcome them, Grand Rapids: Zondervan, 2010, pp. 40-44). 낯선 이를 경계하지 않고 온전하게 환대를 베푼 아브라함(창 18:1-8)과 같이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비유로 말씀하신 가장 작은 이에게 베푸는 환대(마 25:40)가 그리스도인이 삶을 통해 실천해야 할 영역이다. 또한 환대의 진정한 의미는 지금 우리 사회에서 가장 가난하고 소외되는 이들에게 보여지는 환대이어야 하며 그것은 마태복음 25장에 나타난 것처럼 밀려난 주변인 타자들을 중심에 함께 세워나가는 것이다.

 

차별과 배제가 일상이 되어버린 오늘날의 우리는 ‘배제’와 ‘경계’를 조장하는 프레임에 적극적으로 대항하고, 끊임없이 성찰하고 주위를 살피며, ‘관심’과 ‘환대’를 실천하며 살아가도록 노력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직면한 사회에서 그렇게 살아가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쉽지 않은 일이기에 함께 고민하고 바꾸어 가야 할 것이다. ‘나’와 ‘그들’의 행복한 공존을 위해서, 그리고 나 또한 어딘가에선 그들이 될 수 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