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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신학 2기/코로나 시대, 외면당하는 낮은 목소리들

코로나 시대에 외국인으로 산다는 것 / 이혜영

 

이혜영 (미국장로교(PCUSA) 파송 선교동역자)

 

이 글은 1월 18일 화요일 저녁, 6명의 선교동역자들이 온라인 화상회의를 통해서 진행된 간담회를 토대로 재구성한 글이다. 6명의 참석자들은 미국에서 온 4명, 캐나다에서 온 1명, 그리고 일본에서 온 1명으로 구성되어 있고, 한국에서 산 기간은 적게는 5개월에서 8년을 산 사람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에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D-6 비자라는 종교 비자를 가지고 선교 및 자원봉사라는 목적으로 한국에 들어온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매달 한번씩 모여서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나누는데 이번 달에는 코로나 시대에 외국인[i]으로 산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식당을 들어가기 전 사람들은 휴대폰을 흔들어댄다. 코로나 시대에 식당이나 카페에 들어가기 전에 필수적으로 찍어야 하는 QR코드 생성을 위해서 하는 행동이다. K는 가방에서 종이 한 장을 주섬 주섬 꺼낸다. 해외에서 예방 접종을 받았다는 증명서인데 휴대폰이 QR코드와 연동이 되지 않아서 종이로 된 증명서를 들고 다녀야 한다. ‘이게 뭐냐’며 되묻는 식당 주인들이 있어서 식당에 갈 때마다 무척 긴장이 된다. 한국말이 서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Y는 공부를 하기 위해서 한국에 왔다가 일자리를 얻어서 일을 하고 있다. 한국에서 주민세 및 소득세도 내고 있고, 건강 보험료도 꼬박꼬박 낸다. 그런데 재난 지원금은 소득 기준에 들어감에도 불구하고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받지 못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나서서 진정서를 내고 이주민 단체들이 성명서를 내고 나서야 1차 지원금을 받기는 했지만 이후 지급된 2차 지원금은 결국 또 받지 못했다. 지원금을 받지 못해서 아쉬움이 있다기 보다는 차별 받는 느낌이 들어서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한국인들과 이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는데 공감을 해 주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당연히 한국인이 먼저 아니냐는 반응을 보인 사람들이 있어서 무척 씁쓸했다. 대한민국 “국민”은 아니지만 이 사회에 같이 살고 있는 “시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거부 당한 느낌이었다.

G는 지난 8월 한국에 오기 바로 전에 미국에서 백신을 2차 접종까지 맞고 왔다. 그런데 해외에서 받은 백신은 한국에서 인정해 주지 않아서 한동안 고생을 했다. 백신 패스가 적용되면서 해외에서 백신을 받는 사람들도 보건소에 등록을 하면 인정을 해 준다고 하는데 보건소는 어디인지, 어떤 서류를 들고 가야 하는지 정보가 부족해서 고생을 했다. 우여곡절 끝에 백신 증명서를 등록했지만 어려움은 끝나지 않았다. 백신 등록하면서 3차 접종이 가능하게 되었는데 질병관리청 웹사이트에 접속해서 예약을 하려고 하니 정보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메세지만 계속 뜬다. 결국 한국 친구의 도움을 받아서 전화로 예약을 할 수 있었다. 언어적인 장벽과 정보의 부족으로 많은 부분에서 늘 한 발 뒤쳐지는 기분이 든다.

 

'이주'라는 경험만으로 열악한 사회적 위치에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주민을 한 그룹으로 묶어서 생각하기에는 소득도 생활 수준도 천차만별이고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선진국에서 온 피부색이 하얀 사람들은 한국에서도 여전히 특권을 누리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들이 가진 한 가지 공통점은 본인의 나라를 떠나서 한국이라는 나라로 '이주'했다는 경험이고 그렇기 때문에 문화적, 사회적으로 소외될 수 있다는 것이다. 더욱 세심한 관심과 제도적인 지원이 필요할 텐데, 재난과 위기 시대를 맞이하면서 가장 먼저 소외되고 고립되기 쉬운 집단이 외국인 또는 이주민이기도 하다. 필자도 10년간 외국에서 이방인으로 살았던 경험이 있기 때문에 외국인으로서 타국에서 살면서 느껴지는 외로움과 고립감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사상 초유의 펜데믹인 코로나19를 겪으면서 이러한 현상은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한국 사회가 모두의 안전을 위해서 발표하는 코로나 거리 두기 방역 지침은 결국 외국인과 한국인 사이의 거리를 한층 더 멀게 하는 원인이 된다.

방역 지침으로 인해 사적 모임의 인원수를 제한한다는 것은 모임에서 누군가는 포함이 되고 누군가는 소외가 된다는 말인데 이로 인해서 한국 생활이 낯선 외국인이 한국인과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는 일은 훨씬 더 어려워졌다. 실제로 지난 간담회에서 참석한 대부분의 선교동역자들이 이 부분에 대해서 언급하였다. 한국인들과 교류하면서 봉사하고 선교를 하기 위해서 한국에 왔지만 한국인들과의 관계 형성에 무척 어려움을 겪고 있고 많은 교회들이 봉쇄가 되어 있어서 교회에 접근하기 어려운 점도 호소하였다. 또한 빠르게 바뀌는 코로나 정책과 방역지침들은 외국인들을 무척 혼란스럽게 한다. 제대로 된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주로 한국인 지인들에게 의존하거나 소셜 미디어를 통해서 알게 되는데 그렇기 때문에 늘 뒤쳐지는 기분이 들고 새로운 정보가 생길 때마다 불안하고 걱정이 되기도 한다. 간담회 참석자들은 대부분 영어 사용이 가능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비교적 접할 수 있는 정보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 불편함은 여전하다. 한 참석자는 영어로 된 정보들 중에 오역된 것이 많아서 영어로 된 정보 조차도 의심하게 된다고 했다. 우리가 쉽게 접하는 정보와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일상적인 일들이 외국인들에게는 장벽으로 느껴질 때가 많은데 코로나 상황은 그것을 더욱 가중시켰다. 그렇기 때문에 도움의 손길을 내밀고 친구가 되어주는 한국인들이 무척 고맙다고 한다. 정보를 전달하려는 작은 노력, 밥 한끼 함께 먹어주는 작은 행동, 고립되고 외로운 심정을 알아주는 작은 공감이 이들에게는 큰 힘과 위로가 된다. 지금은 모두가 힘들고 어려울 때이다. 그렇기 때문에 소외 당하고 고립된 이들을 한번 더 돌아 보는 것이 더욱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개인적인 의무로 떠 넘길 것이 아니라 제도적으로 적용되도록 목소리를 내는 것도 중요하다.

코로나 시국을 겪으면서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더욱 실감하게 된다. 누구의 안전이 더 중요한가를 따져서 그 특정 그룹 만을 보호하려는 노력은 코로나 시대에 결국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특정 그룹만을 보호할 것이 아니라 소외와 배제없이 누구나 보호되는 안전망을 구축하는 것 만이 우리 모두가 살 길이다. 간담회 참석자들은 외국인으로서 한국에서 겪은 불편한 경험으로 인해 한편으로는 사회에서 소외되고 고립된 이들을 바라볼 수 있는 새로운 눈이 생겼다고 고백했다. 내가 경험한 불편함을 누군가도 경험할 수 있다는 생각과 시선을 갖는 것은 중요하다. 이주의 경험은 누구에게도 있을 수 있고 새로운 문화와 사회에 적응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서 속의 여러 인물들도 이주를 경험했다. 구약에서는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는 아브라함을 비롯해 룻, 하갈, 그리고 출애굽을 경험한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 신약에서는 예수님을 비롯하여 그의 부모 마리아와 요셉, 바울 및 그와 함께 한 많은 동역자들이 이주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 고대 이스라엘사회는 배타적인 민족 중심주의 사회였음에도 이들을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 다루었다. 구약의 출애굽기 22장과 23장을 통해서도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고 학대하지 말라는 구절과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고 이방인이었던 자신들의 모습을 기억하라는 당부의 말씀도 있다. 간담회의 참석자들이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의 모습을 새롭게 보게 되었다는 것은 경험의 중요성을 시사한다. 그러나 꼭 비슷한 경험이 없다 하더라도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경험한 다양한 어려움의 경험들을 토대로 다른 사람의 아픔과 불편함을 공감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마태복음 2장은 예수의 가족이 타의에 의해서 태어나자 마자 이집트로 이주하게 되는 이야기를 다룬다. 언어도 다르고, 민족도 다른 이집트에서 요셉과 마리아는 어떻게 살았을까? 낯선 사회에서 예수는 어떻게 성장했을까? 우리가 안전하고 편안함을 느끼고 있을 때, 혹은 펜데믹이라는 초유의 상황으로 불안하고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우리 사회에서 누군가는 우리보다 더 불안하고 어려움을 겪고 있을 수도 있음을 기억하는 것 그리고 기억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러한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고 환대와 친절 베푸는 일이 모두가 연결되어 있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꼭 필요한 자세이라 믿는다. 예수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말이다.

 


[i] 이주민 대신 외국인으로 표현한 이유는 참여자 대부분들이 한국에 장기적으로 살기 위해 이주한 것이 아니라 단기간 머물다가 돌아갈 예정인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주민과 외국인으로 구분 짓는 것이 인종적인 구분으로 귀결되었을 때 그것이 또 다른 편견을 낳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차후에 더 깊게 논의되어야 할 중요한 문제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