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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신학 2기/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화해와 일치를..

낯선 평화들과의 만남 / 김진수

 

김진수 (장로회신학대학교 대학원)

 

평화를 위하여

 

카를스루에 궁전 앞 큰 길을 따라 걸어내려오다 보면 흰색 텐트들이 줄지어 늘어져있다. 9월의 따가운 햇살을 그대로 받아내는 40여개의 천막들. 세계 곳곳에서 모여든 그리스도인들이 여러 구호를 내걸고 부스를 운영한다. 다양한 언어로 만들어진 브로셔를 나눠주는 이들, 서명운동에 동참해주길 외치는 이들, 전통악기를 연주하며 공연하는 이들. 각양각색의 얼굴들이 바쁘게 오가는 곳. 제11차 세계교회협의회 총희 회의장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펼쳐진 브루넨(Brunnen)의 풍경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세상을 화해와 일치로 이끄신다Christ’s Love Moves the World to Reconciliationa and Unity” 2013년 부산에 ‘마당’이 있었다면, 2022년 카를스루에에는 브루넨이 있었다. 독일어로 ‘샘well’을 의미하는 브루넨은 화해와 일치를 염원하는 마음들이 만나는 광장이었다. 다양한 나라의 다양한 교회들이 다양한 의제를 풀어놓은 우물. 사람들은 그 물가에 모여 서로의 목을 축여주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화해통일위원회는 ‘한반도종전평화캠페인Korea Peace Appeal, KPA’을 위한 부스를 운영했다. 한국전쟁 이후 한반도는 70년째 정전상태임을 알리며, 정전협정을 넘어 종전협정으로 가기 위해 전 세계에서 1억명의 서명을 모으는 캠페인을 진행했다. 평화를 위하여. NCCK의 천막 옆에는 부자증세를 통해 조세정의를 구현하기 위한 Zacchaeus Project(ZacTAX)의 천막이 있었고, 저 너머에는 ‘신앙의 무지개 순례’가 각 나라의 언어로 번역된 ‘주변부로부터의 화해’를 나누고있었다. 평화를 위하여. 세계 각국 청년들이 모여 기후재앙의 현실에 맞서 즉각적인 행동을 촉구하는 행진을 했다. 평화를 위하여.

 

“조금 낯선 평화들”

 

총회기간 내내 KPA 부스에서 서명을 받으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세계 곳곳에서 모여든 사람들은 한반도의 평화를 염원하며 그들의 이름을 써내려갔다. 서명용지에 쓰여진 천 여 명의 이름들 모두가 평화를 바라고 있었다고 믿는다. “코리아 피쓰, 코리아 피쓰” 외치다보니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질문, 내가 말하는 평화와 저 사람이 원하는 평화가 같은 것일까?

우크라이나 교회가 갈구하는 평화, 남미의 교회가 염원하는 평화, 폴리네시아에서 온 교회가 부르짖는 평화. 총회의 순서마다 곳곳에서 평화를 외치는 목소리들을 들을 수 있었다. 스마트폰 화면 속에서만 보던 낯선 목소리들을 직접 듣는 경험은 강렬했다. 글에서는 다 읽어낼 수 없던 절박함을 들었고, 사진과 영상에서는 볼 수 없던 숨소리를 느꼈다. 아마 ‘한반도의 평화’ 또한 그들에게 조금 낯선 목소리였을 터이다. 이 낯선 평화들은 브루넨에서, 워크샵에서, 크고 작은 행사와 모임들 속에서 서로 공명했다. 이 울림 속에서 ‘나의 평화’와 ‘너의 평화’가 멀리 있지 않음을 느꼈다. 각자 언어는 다르지만 우리는 같은 땅 위에 발 딛고 서있고, 서로 처한 상황은 다르지만 한 하늘을 보며 노래했다. 내가 바라는 평화와 너가 바라는 평화가 엮이는 경험, 이 공동의 경험은 카를스루에에 모인 수 천 명이 같은 뿌리와 약속 위에 있다는 증거였다.

 

울타리를 낮추는 힘

 

화해와 일치에 대한 유대교적 관점을 다룬 워크샵에 참여했다. ‘한국에 살면서 유대인 랍비의 강연을 들을 기회가 얼마나 되겠는가’라는 호기심에 고민 없이 선택했다. 워크샵이 진행되는 동안 마음이 무거워졌다. 유대교의 역사는 박해의 역사, 특히 기독교로부터의 박해와 생존의 역사였음을 새삼 깨달았기 때문이다. ‘화해와 일치라는 말이 이토록 어울리지 않는 관계가 있을까.’ 강연을 마치며, 랍비는 지난한 증오의 역사를 끝내기 위해서는 새로운 무엇이 필요한 것이 아님을 말했다. 갈등의 벽과 울타리를 쌓아온 것도 종교의 언어였지만, 그 벽을 뛰어넘고 울타리를 허무는 시도 또한 종교의 역할이라는 것을 말이다.

종교. 한 노랫말을 빌려 말해보자면, 어느새부터 종교는 안멋져졌다. 신학을 전공하고 목사가 되어 기독운동을 하고 싶지만 동시에 종교적인 언어와 모양새에 거리를 두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종교적 언어들을 선점한 세력들의 발화와 기행과는 거리를 두며 ‘나는 다르다’라고 생각해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제는 알고 있다. 폭력과 증오의 고리를 끊어낼 힘이 종교에 있다. 화해와 일치를 말하며 평화를 일구어갈 수 있는 힘이 성서 안에 있다. 울타리를 낮추고 뛰어넘게 만드는 새로운 상상력이 우리의 언어 속에 있다. 그리고 나의 평화와 너의 평화가 만나 얽혀 풍성해지는 기적이 에큐메니칼 전통 속에 있다. 활동가로서의 역할은 차별과 혐오의 근거로 전락한 성서를 구원해 생명의 뿌리로 되살리는 것, 그리고 이러한 언어를 각자의 현장에서 구체화하는 것, 그리고 여러 현장들을 잇대어 보다 넓은 평화를 구축하는 것이 아닐까.

 

만남의 경험을 쌓아가자

 

평화를 위한 목소리들을 어떻게 엮어낼까? 세계교회협의회 총회는 이 수천개의 목소리들을 모두어 앞으로의 8년을 그려보는 자리였다. 제도와 기구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내고, 세계 곳곳에서 이미 터져나오는 목소리들을 확성시켜 퍼뜨리고, 흩어져있는 재원과 인력을 모아 집중시키고, 이곳과 저곳을 연결지어 더욱 튼튼하게 만들어가기 위한 국제 에큐메니칼 회의였다고 믿는다.

카를스루에로의 여정은 많은 고민을 남겨놓은 채 마무리되었다. 이 거대한 네트워크 속에 나의 자리와 역할을 되짚어 볼 수 있었다. ‘기독’, ‘청년’으로서의 자리는 어디이며, 활동가와 신학생으로서의 역할은 무엇인지. 내가 길러야 할 역량은 무엇이며 발굴해야 할 언어는 무엇인지. 나의 주변엔 어떤 운동이 펼쳐지고 있으며, 어떤 동지들이 있는지. 그리고 어떤 평화들이 필요하며, 그 평화들을 어떻게 엮어내야 할지.

총회에 모였던 수 십 명의 한국 기독 청년들도 비슷한 고민을 가지고 돌아왔을 것이다. 학교와 교회와 현장을 오가며 치열하게 고민하고 끈질기게 살아내던 사람들이다. 익숙한 얼굴들을 낯선 곳에서 마주했던 순간은 감격스러웠다. 우리 멈추지 말자. 서로 더 연결되자. 서로 더 연결되어 두터워지자. 만남의 경험을 쌓아가자. 서로의 마음을 잇고, 현장을 연결하고, 각자의 평화를 엮어 무지갯빛 다채로운 스펙트럼의 평화를 만들자. 이미 펼쳐진 제도와 기구를 우리 것으로 끌어오자. 대화의 장을 만들고 목소리를 모아보자. 새로운 상상력으로 우리들의 에큐메니칼 운동을 만들어보자. 느슨하지만 끊어지지 않을 연대를 이어가자. 평화를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