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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신학 3기/위기의 에큐메니칼 운동

위기의 에큐메니칼 운동 / 양권석

위기의 에큐메니칼 운동

 

양권석 (성공회대학교 명예교수)

 

위기의 실상

모두가 알고 있고, 또 느끼고 있는 것처럼 한국교회의 교회일치 운동은 지금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는 것 같다. 과거의 일치 운동이 한국 사회 안에서 가지고 있던 위상이나 평가가 약해졌다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쉽게 일치를 전망할 수 없을 정도로, 참여하는 교회들 사이에 차이나 다양성이 확대되면서 나타나는 어려움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내가 보기에 한국 교회 일치운동의 근본적인 위기는, 불일치와 차이를 대하는 교회들의 태도가 일치 운동 그 자체를 부정하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는 것으로부터 오는 위기다.

현재의 일치운동의 위기는 교회들 사이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개별 교단이나 교회들 내부에서 더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교회 일치 운동은 하느님 안에서 만물이 화해하여 하나가 될 것이라는 믿음에 근거한 운동이다. 하느님 안에서는, 서로 간의 불일치나 차이가 갈라서고 적대해야 할 이유가 되는 것이 아니라, 보다 깊은 화해와 일치를 향해 갈 수 있는 계기가 된다는 믿음으로 참여하는 운동이다. 하지만 최근 한국교회들이 보여주는 일치에 대한 입장은 매우 우려스럽다. 내부의 불일치와 차이와 다름을 무조건 배제해야 할 장애물이라고만 여기는 것 같다. 그래서 일치를 위해서 자신들의 구미에 맞지 않는 사람들을 정죄하고 배제하는 일이 교회들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교회들 안에서도 시대착오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수많은 신자들이 자신들의 양심과 교회의 강권적인 일치 요구 사이에서 심각한 갈등을 겪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일종의 전체주의적 통일 의지가 교회가 추구해야 할 일치운동의 참여적이고 대화적인 과정 그 자체를 압도해 버리고 있는 모습이다. 차이를 좁혀 나가고, 또 보다 깊은 화해의 길로 나아가기 위해서, 상대방만이 아니라 나 자신도 회개와 갱신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는 겸손함이 가장 중요한 일치의 덕목이다. 하지만 지금의 한국 교회의 강압적 일치 시도들 안에서는 그런 덕목을 확인하기 매우 어렵다.

서로 갈라 세우고, 혐오와 적대를 불러 일으키고, 그래서 한쪽을 배제함으로써 일치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생각은, 일치운동 존재 이유를 부정하는 것일 뿐 아니라, 교회로서의 존재 이유를 교회들이 스스로 부정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치에 관한 성서의 가르침

예수께서 잡혀 가시기 직전, 자신은 떠나고 세상에 남겨질 제자들을 위해서 마지막으로 했던 기도가 제자들 사이의 일치를 위한 기도였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한 17:21)라고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간절한 마음 속에, 우리가 일치를 향한 노력을 게을리할 수 없는 이유가 분명히 드러나 있다.

첫째로 요한 복음 17장 전체를 살펴보면, 예수님이 바라는 제자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여기서 나타나는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기대와 희망은 곧 교회를 향한 것이기도 하다. 제자들과 교회들은 하느님으로부터 부름 받고 선택된 사람들이다. 자신들의 계획이나 욕심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선교를 위해서 부름 받은 사람들이고 공동체들이다.(요한 17장 6절) 그래서 제자들과 교회는 이 세상에 남아서 이 세상 "안에서"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그것을 통해서 창조주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하는 사람들이다.(요한 복음 17: 8, 10, 11) 제자들이 아직도 분열 가운데 있었던 것처럼 지금의 교회들도 분열 가운데 있다. 그리고 그 분열 가운데서 나의 승리나 나의 영광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일치로 부름 받은 사람들이 바로 제자요 교회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와 예수님의 교회는 그 어떤 이유로도 화해와 일치를 향한 부름을 포기할 수 없다. 그 부름을 포기하는 것은 제자됨과 교회됨의 포기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둘째로 요한복음 17장의 예수님의 기도 안에는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일치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나타나고 있다. 예수님은 이미 완성된 일치를 말하고 있지 않다. 일치의 원형이나 모델이 어떤 제자나 어떤 특별한 교회에 이미 완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제자들도 교회들도 분열 가운데 있고, 그 분열의 책임은 그들 모두에게 있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그 책임으로부터 벗어나 있지 않다. 그러니까 지금 이 분열된 세계 가운데서, 특정한 의견이나 입장을 받아들이는 것, 혹은 특정한 교회 안으로 모두가 귀속되는 것이 곧 일치를 위한 길이라고 결코 말할 수 없다. 모두가 분열의 책임을 가지고 있고, 모두가 분열의 상처를 안고 있고, 그래서 모두가 화해와 일치를 향해 함께 인내하며 걸어가야 한다. 예수님은 어느 날 하루 아침에 이루어질 수 있는 일치를 상상하고 있지 않다. 더 나아가 예수님의 일치는 전체주의적 획일성과는 정 반대편에 있다. 예수님의 일치 기도 안에 강제적인 방식으로라도 일치를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 같은 것은 전혀 없다.

셋째로 일치를 향한 이 끊임없는 운동을 이끌고 계시는 성령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반드시 필요하다. 예수님이 말하는 일치는 멈출 수 없는 운동이다. 하느님이 예수님 안에, 예수님이 하느님 안에 있는 것처럼 그렇게 될 때까지, 아니 그 이후로도 하느님과 예수님이 끊임없이 사랑의 교통과 운동가운데 있는 것처럼 그렇게 끊임없이 지속되어야 하는 운동이다. 이렇게 끊임없는 일치의 운동을 이끌고 가는 것은 결국 우리를 변화시키는 성령의 운동이다. 성령은 우리들의 자기 중심적이고 배타적인 울타리와 장벽에 틈을 낸다. 그래서 우리들 각자를 그 교만한 자리에서 내려와 다른 사람들은 물론이요 다른 모든 창조물들과 만날 수 있도록 허락한다. 그래서 우리의 교통(상통)의 폭과 깊이를 더욱 넓고 깊은 곳으로 안내한다. 성령은 보다 깊은 화해와 일치를 향한 끊임없는 운동속으로 우리를 부르고 있는 분이다. 일치 운동은 내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철옹성으로 만들어 다른 사람들이나 다른 창조물들을 받아들이겠다는 태도나 생각과는 정반대의 것이다. 일치 운동은 내가 다른 교회들을 변화시키기 위한 일방적 운동이 결코 아니다. 갈라져 있는 우리 모두가 성령의 변화시키는 운동을 따라서, 끊임없는 자기 갱신과 회심을 향해 가는 운동이다.

넷째로, 제자들의 일치를 위한 예수님의 기도 안에서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일치 운동은 제자들만의 운동도 아니고 교회들 만의 운동도 아니고, 하느님의 창조계획과 선교 계획 안에 있는 운동이라는 사실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였다. 예수님의 일치를 위한 이 기도는 세상으로 하여금 하느님의 의지를 믿게 하기 위한 선교적 의지를 가득 담은 기도였다. 하느님은 모든 피조물들 사이의 화해를 위해 일하시는 분이다. 그래서 제자들과 교회들의 일치를 향한 노력과 운동을 바라보면서, 세계가 그러한 자신의 의지와 뜻을 받아들이기를 하느님은 원하신다. 한 마디로 모든 인간들 사이의 화해와 평화, 인간과 다른 피조물들 사이의 화해와 평화에 대한 하느님의 의지와 제자들과 교회들의 일치를 향한 예수님의 기도는 둘이 아니라 하나다. 그래서 교회일치를 향한 관심은 당연히 세계의 화해와 평화를 향한 참여와 함께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일치 운동은 교회들 만을 위한 운동이 결코 아니다.

우리는 니케아 신경을 통해서, 하나된 교회에 대한 믿음을 고백한다. 최종적으로 하느님을 통해서 이루어질 일치를 향한 믿음이다. 그래서 신앙적 교리적 차이는 물론이요, 구조와 질서의 차이마저 완전히 해소될 것이라는 믿음이다. 하지만 이 믿음은 각각의 교회들이 자신들의 현재의 상태가 불완전하고도 잠정적인 상태라는 것을 인식할 때만 진실한 고백이 된다. 성령의 안내를 따라 그 믿음의 교회를 향해 자신을 변화시켜 나갈 수 있는 진정한 회개와 갱신에 대한 믿음을 가진 교회만이 하나인 교회를 소망할 수 있고 하나인 교회에 대한 믿음을 고백할 수 있다. 심각한 불일치와 위기 상황에서 자신을 방어하기에만 급급한 교회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헌신하여 일치를 향한 소망을 불러 일으킬 수 있는 교회가 진정으로 믿음을 간직한 교회다.

 

진정한 화해와 일치를 향하여

참으로 비관적이고 냉소적인 이야기지만, 지역 에큐메니칼 운동과 관련된 토론에서 한 목회자가 툭 던진 한 마디가 아직도 가슴에 남아있다. "한국교회에 필요한 것은 일치운동이 아니라 불일치운동입니다."라고 단정하면서, 그가 했던 말은 지금의 한국교회는 교파와도 상관없고 큰 교회 작은 교회 구별과도 상관없이 모두가 하나의 목표만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교회의 존재 이유와 상관없이, 교회를 지키고 성장시키는 일에 한 마음 한 믿음으로 일치되어 있다는 냉소였을 것이고, 진정한 제자가 되고 진정한 교회가 되기 위한 노력은 부차적인 것이 되고 있다는 안타까움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 목회자의 이야기가 일치운동을 향한 매우 중요한 도전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말하는 일치가 어떤 일치 인가를 해명해야 한다는 요청이다. 모든 사랑, 모든 연대, 모든 화해, 또 모든 일치가 다 하느님이 원하시는 일치는 아니라는 말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하느님에게 대적하는 자들이 훨씬 더 쉽게 연대하고 동맹한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이익의 공유라는 것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일치 운동의 위기를 말하고 있지만, 어쩌면 지금은 일치의 필요성이 그 어느 때 보다도 절박한 때일지도 모른다. 코비드19로 인한 팬데믹을 경험하면서, 또 기후 생태 위기가 가속적으로 현실이 되고 있는 상황을 경험하면서,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그 어느 때 보다도 팽배한 상황이다. 과거의 삶이 끝나가고 있음은 분명해 보이는데, 새로운 삶의 전망은 아직도 불투명해 보이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이 되면 선한 목적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나쁜 욕심을 위해서도 모두가 일치를 요청하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강제로라도 일치시켜서 불안을 없애 버리고 싶어 할 것이고, 또 어떤 사람들은 자기들의 기득권과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 강압적 힘에 의지해서 일치를 추구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세계의 많은 지성이 걱정하듯이, 지금은 편협한 집단주의나 민족주의가 득세하는 때이고, 독재와 파시즘의 위협이 현실화되는 위험한 때이다. 한쪽에는 좌절과 절망이 그리고 다른 한쪽에는 집단적 이기주의가 사람들을 유혹하는 때이다. 하느님을 향한 일치나 화해가 아니라, 두려움 속에서 각각 제 자신을 지키기 위한 가장 이기적이고 패권적인 일치가 힘을 얻는 때라는 말이다. 지금의 정치가 말하는 일치가 그렇고, 지금의 종교들이 보여주는 행태가 그와 별로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또한 하게 된다.

사도 바울이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고 말하는 그 때가 바로 지금인지도 모른다.(고린도 전서 7:29) 하지만 바울이 말하는 이 얼마 남지 않은 때는 모든 것이 끝나는 때가 결코 아니다. 가장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새로운 희망이 잉태되는 때이고, 새로운 삶의 길이 열리는 때이다. 그리고 그 어두운 불확실성과 불일치 한 가운데서도 절망적 일치가 아니라 진정한 화해와 일치를 향한 새로운 희망을 엮어내도록,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교회들을 부르고 있는 때다. 지금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는 온갖 일치의 주장이 횡행하는 때에, 하느님을 향한 일치의 길을 열어 나가도록 부름 받고 있는 것이다.

 

일치를 향한 새로운 길이 열리기를 바라며 

이와 같은 마음으로 나는 다시 일치운동이 시작되기를 바란다. 아니 신실한 신자들의 삶 속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가장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넘어지지 않는 믿음으로 새롭게 화해와 일치를 향한 운동이 이미 시작되고 있다고 믿는다. 이렇게 아직은 분명하지 않지만 분명히 새롭게 시작되고 있는 새 일치 운동을 향해 몇 가지 신학적 유산과 통찰들을 함께 나누고 싶다.  

교회 일치운동의 미래에 대한 염려는 이미 오래전부터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 교회 일치 운동이 출발하던 초기에는 교리적 불일치가 교회들의 분열과 갈등의 중요한 이유였었다. 하지만 지금은 많은 교회들이 교리적 불일치가 근본적으로 일치를 가로막는 요인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할 정도로 낙관적이 되었다. 그런데 지난 세기말부터 사회적 문제들에 관한 교회들 간의 혹은 교회내의 구성원들 사이의 입장 차이가 일치운동의 결정적인 도전과 장애물이 되고 있다. 그래서 한 신학자는 "윤리적/도덕적 문제의 전체 영역이 에큐메니칼 운동의 아킬레스건이 되고 있다"[각주:1]라고 진단하고 있다. 루터교 신학자 로버트 젠슨도 윤리적 불일치가 이후 에큐메니칼 운동의 가장 큰 장애물이 될 것이라고 전망하였고,[각주:2] 천주교의 발터 카스퍼 주교 역시, 16세기에는 칭의론에 관해서는 불일치하고 윤리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일치하고 있었다면, 지금은 칭의론에 대해서는 일치가 깊어지고 윤리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분열이 깊어지고 있다고 보았다. [각주:3] 이처럼 윤리적인 입장 차이가 대화를 매우 어렵게 하는 이 상황에서, 윤리적 불일치를 대화의 장으로 끌어 들이고, 그 불일치를 보다 깊은 화해의 가능성으로 만드는 길에 대해서 우리가 아직 잘 모르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솔직할 것이다. 그래서 세계 도처에서, 교회 내부의 윤리적 차이들이 지금은 훨씬 더 원심력적인 분열 작용을 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한국 교회의 에큐메니칼 운동도 많이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교리적 불일치나 사회봉사의 불일치 보다는 윤리적 입장차가 더욱 중요한 분열의 요인이 되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그러므로 세계 교회는 물론이요 한국교회에게도 윤리적인 입장차가 일치운동 그 자체를 부인하는 방향으로 흐르지 않을 수 있는 새로운 일치 운동 방식과 표현 방식을 찾는 일은 시급한 과제다. 이 시급한 과제를 위해서 나는 몇 가지 일치운동의 유산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로 일치운동의 선각들은 일치운동이 갱신운동이요 회개운동이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라인홀드 니버는 "일치의 길은 회개의 길"[각주:4]이라 하였고, 그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일치가 지속적인 회심과 회개와 관련된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미 답을 가지고 있다는 자만심을 버리지 못한다면, 우리 자신의 변화와 회심을 향해 우리 스스로를 열지 못한다면, 그래서 하느님 앞에서 가져야 할 진정한 겸손을 지니지 못한다면, 윤리적 불일치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대화는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둘째로 최근의 "수용적 에큐메니즘"[각주:5]이라는 말로 정리된 일치운동의 정신을 다시 한번 깊이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이다. 일치운동은 내가 상대방을 변화시키기 위한 운동이 아니다. 교회일치 대화는 "자신의 전통 안으로 가능한한 많이 받아들이기 위해서 다른 사람으로부터 배우는" 대화다. 대화의 파트너들로부터 내가 미처 보지 못하거나 갖지 못한 것을 배우는 과정이며, 그렇게 배운 것을 각기 자신들의 전통 안으로 수용하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로부터 배우라는 말은 자신들이 이미 가지고 있는 귀한 유산과 전통을 포기하라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유산과 전통이 가지고 있는 새로운 의미들을 발견하여 변화하고 갱신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셋째로, 일치운동은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속하고 있다는 것이 우리들의 교리적, 선교적, 윤리적 불일치 보다 더욱 근본적이라는 신앙 위에 서 있는 운동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각주:6] 다시 말해 차이가 끝내 이루어질 일치와 화해를 가로 막을 수 없다는 믿음이다. 서로 간의 차이가 서로를 배제하거나 억압할 수 있는 이유가 결코 될 수 없다는 신념이다. 뿐만 아니라, 특정한 권위에 의존하거나 인간이 만든 규칙에 의존해서 불일치를 없는 것처럼 만들어 버리려는 모든 잘못된 일치의 시도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신앙이다. 그러한 일치는 분명히 복음에 반하는 증언이며, 그래서 하느님의 뜻을 가리는 증언이 될 것이다.

끝으로 이 모든 것을 종합하면, 결국은 결과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과정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당장에 어떤 일치된 결과를 내 놓아야 한다는 강박 관념 보다는, 불일치와 차이 가운데서도 대화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불일치와 차이를 단순히 장애로 여기기 보다는 오히려 보다 깊은 회심과 일치를 향한 계기로 바라보는 믿음이 중요하다. 그리고 정말로 결과 보다는 과정이 중요한 것이라면, 일치운동에 대한 이해도, 일치운동을 표현하는 방식도, 그리고 일치운동에 대한 평가도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치운동으로부터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은 어떤 통일된 입장 같은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오히려 불일치와 차이를 인정하면서, 가장 겸손하고도 가장 진지하게 그 불일치와 차이를 다루는 모습을 보여주기를 기대할 것이다. 그래서 일치 대화의 결과물도 분명히 존재하는 불일치나 차이를 적당한 방법으로 가려서 성급하게 통일된 입장을 만들려고 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 불일치와 차이를 가장 솔직하고도 진지하게 드러내는 것이 더욱 중요할 것이다. 그렇게 불일치와 차이의 깊이를 인정해야만, 화해와 일치를 향한 겸손한 대화가 시작될 수 있고 또 이어질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물론 경우와 상황에 따라서 매우 다른 요청이 있을 수 있지만, 성급한 일치된 입장의 요구는 일치운동의 활력을 살려내기 보다는 오히려 고립시키는 것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분리하고 배제해서 불일치와 차이를 정리하겠다는 생각과 태도는 일치운동의 가장 큰 장애물일 뿐만 아니라, 일치운동 그 자체와 교회의 존재 이유를 부인하는 일이 될 것이다.


  1. Thomas P. Rausch, "Ethical Issues and Ecumenism," America(January 21, 1986): 31. [본문으로]
  2. Robert W. Jenson, "Can Ethical Disagreement Divide the Church?," in The Morally Divided Body: Ethical Disagreement and the Disunity of the Church, ed. Michael Root and James J. Buckley (Eugene, OR: Cascade, 2012), [본문으로]
  3. Cardinal Walter Kasper, Closing Speech for the Tenth Anniversary of the Joint Declaration on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The Holy See (October 31, 2009), http://www.vatican.va/roman_curia/pontifical_councils/chrstuni/lutheran-fed-docs/rc_pc_chrstuni_doc_20091031_greeting-kasper_en.html. [본문으로]
  4. Reinhold Niebuhr, Social Sources of Denominationalism, 284. [본문으로]
  5. Paul D. Murray, "Receptive Ecumenism and Catholic Learning-Establishing the Agenda," in Receptive Ecumenism and the Call to Catholic Learning: Exploring a Way for Contemporary Ecumenism, ed. Paul D. Murray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08), 12, 17. [본문으로]
  6. Joint Working Group between the Roman Catholic Church and the World Council of Churches, "The Ecumenical Dialogue on Moral Issues: Potential Sources of Common Witness or of Divisions," Ecumenical Review 48, no. 2 (1996): 154.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