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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신학 3기/서이초 교사 사망 사건과 교권 붕괴

‘나’부터 존엄의 세계로 나아가야만 비로소 살림의 교육이 가능하다 / 하태욱



하태욱 (신나는학교 교장, 건신대 겸임교수)


연이어 침통한 소식이 들리고 있다. 서울의 한 초등학교에서 2년차 새내기 교사가 학부모 민원에 시달리다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하였다는 뉴스가 시작이었다. 연이어 장애가 있는 자녀를 키우는 한 유명인이 특수교사를 고소하였다는 소식도 듣게 되었다. 또한 학교에 옛 스승을 찾아가 흉기를 휘두른 사건으로 해당 교사가 중태에 빠져들었다고도 한다. 처음엔 우연에 우연이 겹쳤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요즘 세태를 탓하며 쯧쯧 하는 목소리들도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첫 시작점이었던 교사의 49재를 훌쩍 지난 오늘까지도 계속해서 교사들의 안타까운 소식이 연이어 들려온다. 

이 소식을 듣는 교사들의 마음은 참담하기 이를 데 없다. 페이스북에 울분을 토하는 메시지가 올라오고 카톡 프로필 사진이 하나둘씩 검은 리본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교육현장을 지키던 교사들이 비통하고 처절한 마음으로 매 주말 거리에서 교권을 회복시켜달라는 호소를 목이 쉬게 외쳤다.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은 아니다. 교편의 편(鞭)자가 채찍을 뜻한다며 교실의 황제로 군림했던 향수에 젖어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교사가 갑을관계의 ‘을’로 위치 지워질 때, 층층 피라미드 구조의 맨 아래서 보호받지 못한 채 맨몸으로 그 무게를 감당해야 할 때, 교육적 행위나 언어는 허망한 것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가르치고 기른다는 ‘교육(敎育)’이라는 말은 실존적 의미를 담지 못하는 빈껍질에 불과해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 경험은 개인적인 것을 넘어 사회적인, 구조적인 것이 된다. 비슷한 경험을 나누었던 교사들은 이 일이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라 바로 나의 일이며, 우리의 일이라는 집단적 분노를 참기 어렵다. 그러나 공감의 심장과 언어를 갖추지 못한 사회는 또다시 손쉬운 희생양 –비난을 한 몸에 받아 우리의 부담을 쉽게 덜어 줄 개인-을 찾아 나선다. 소위 ‘연필 사건’의 부모나 특정 유명인, 묻지마 폭행범, 혹은 책임을 떠넘긴 자의 개인적 일탈을 만악의 근원으로 지목하며 영원한 사회적 격리를 요구한다. 엄벌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언론을 타고 세상에 울리고, 신상이 털린 가해자의 집이나 밥벌이 공간으로 몰려가 사적 징벌을 가하고 있다. 정치권도 화답하여 뭔가 법적 조치를 만들 모양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될 일인가? 어쩌다 학부모는, 교장·교감은 괴물이 되었는가? 왜 가르치고 기르는 일을 담당하는 교사는 맨몸으로 ‘민원’을 감당하게 되었는가? 더 놀라운 사실은 이 일련의 사건을 대하는 대중들의 태도가 별로 놀라워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이 사태에 대해 함께 분노할지언정 늘 그래왔다는 듯 이 사태를 그다지 생경하게 느끼고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 결국 우리의 질문에 첫머리는 ‘왜 학교는 가르치고 기르는 공간이 되지 못하고 있으며 우리는 왜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가’에서부터 시작해야만 할 것이다. 

우리 사회가 왜 학교라는 교육적 공간에 대해 이토록 냉소적 시선을 가지게 되었는지 차분히 생각해보다 보면 일련의 사건들이 모두 다른 듯 서로 닮아있다는 것을 쉽게 깨달을 수 있다. 사실 우리가 학교를 마주하기 고통스러운 공간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지는 꽤 오래되었다. 지금은 교사들의 극단적인 선택이 도드라지지만 실상 학교 다니기를 고통스러워하다가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이야기의 주인공은 원래 청소년이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는 원래 1986년 2월 친구를 경쟁상대로, 적으로 돌려야만 하는 현실을 견디기 어려워했던 한 감수성 깊은 여학생의 실화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이 여학생이 썼던 유서의 한 구절과 사연이 언론을 통해 소개되면서 우리 사회의 교육에 심각한 문제의식이 생겨났고, 이 사건이 소설로, 연극으로 그리고 1989년에는 영화로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로부터 10여년 뒤에는 ‘여고괴담’ 시리즈가 시작되었다. 공포의 감정을 가지게 되는 공간으로서 학교를 설정한 이 시리즈는 단순히 장르적인 흥미로서만 공포인 것은 아니었다. 학교가 안고있는 문제들을 다양하게 다룸으로써, 우리 사회에서 학교란 실질적 공포의 공간임을 강변하면서 1998년부터 21년까지 23년 동안 6편까지 만들어졌다. 이 기간은 우리 사회가 ‘학교붕괴’ 담론을 다루기 시작하는 시기와 정확하게 겹친다. 학교붕괴는 일본의 ‘교실붕괴’ 담론을 빌어와서 우리의 학교 문제를 설명해보려는 시도였다. 교실붕괴 담론이 일본의 부등교 현상이나 교실의 행동코드를 의도적/무의식적으로 깨려는 어린 학생들, 주로 초등생들의 개인적인 문제로 다뤘다고 한다면, 한국의 학교붕괴는 보다 사회적인 현상이자 구조적인 문제였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가 입시위주의 경쟁구조를 변화시키려고 하지 않는 사회에 대한 학생 개인의 저항이었다고 한다면, 학교붕괴는 보다 집단적인 학교보이콧에 가까웠다. 이를 통해 우리 교육에는 ‘대안’이 필요하다는 논의가 강하게 일었고, 풀뿌리 교육운동인 대안교육과 공교육 내 대안교육운동인 혁신학교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하지만 이 운동들은 그 흐름에 함께한 많은 사람의 헌신을 통해 우리 교육의 상당히 많은 부분을 변화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출세지향 입신부귀 교육풍토를 전면적으로 변화시키는 데는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었다. 대안교육이나 혁신학교가 중고등학교로 올라갈수록 ‘무늬만’이라 비판받게 되는 것은 결국 대입이라는 블랙홀로 모든 교육적 가치와 의미들이 빨려 들어가기 때문이다. 결과중심의 성과주의 경쟁체제라는 흐름 속에서 배움과 성장을 이야기하는 것은 철모르는 이상주의자로 취급받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따라서 이번 사태는 교사를 스승으로 바라보기보다는 단순히 고용된 기능인으로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 아이의 고통에 공감하지 않는 학교, 그리고 이를 바로잡을 의지조차 없는 관리자, 그리고 관리자에게만 책임을 지우는 제도가 뒤섞인 현실이다. 그 속에서 더 많은 교사들이, 학생들이, 학부모들이 외로움 속에서 고통받고 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가해자가 되고, 서로가 서로로부터 피해자가 되는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지 않으면 우리는 새로운 미래를 기대하기 어렵다. 교육을 가르치고 기르는 일, 배움의 기쁨을 통해 성장하는 일로 되돌리지 않고서 변화는 없다. 그러나 그 변화는 교육의 영역에서만 시도된다고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권력이 있다는 이유로 갑이 을에게 함부로 하는 세상에서 을에게 공감하기보다는 갑 되기를 지향해 온 우리의 태도에서부터 시작되었음을 통렬하게 반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단순히 교권회복이 중요하다고 외치거나, 요즘 것들이라며 세태를 꾸짖거나, 개인의 인성 문제로 돌려서도 안 된다. 우리 가정에서, 학교에서, 사회에서 이런 승자독식 강자지향의 이데올로기를 은혜로움으로 미화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고통에 눈감아온 것에 대해 먼저 통렬하게 자성해야 한다. 그리하여 반성을 기반으로 나부터 바뀌지 않으면 그 어떤 ‘절차’와 ‘처분’을 도입한다 하더라도 변화는 만들어지기 어렵다. 

교육을 담당하는 교사에게 충분한 권한을 주고 그들의 교육행위에 대한 보호장치를 법적·제도적으로 갖추는 것은 물론 중요하고 당연히 필요하다. 그러나 엄한 아버지 모델로 현재의 문제가 해결되고 교권이 회복될 것이라 기대하는 것은 환상에 가깝다. 교사들은 오히려 교권과 관련된 상황 악화의 시발점을 학폭 관련 제도들을 도입했던 시절로 기억한다. 학교 안에서 일어나는 갈등상황들은 이로서 교육적으로 다뤄지기보다 사법적 절차에 기대게 되었다. 징벌적 처분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흐름은 심해졌고, 서로 책임을 회피하려는 경향이 짙어졌다. 결국 현재 문제의 대책으로 논의되고 있는 사법적 절차들도 학교를 오히려 더 누가 더 힘이 센지, 누가 더 극악스러운지 경쟁하는 현장으로 몰아갈 위험성이 크다. 

따라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학교를 관계 중심의 공간으로 회복하는 것이다. 경쟁을 기반으로 높은 점수를 받고 좋은 대학에 가서 많은 연봉을 받으면 된다는 각자도생 출세지향의 정글을 변화시키지 않는다면, 학교는 나만 살아남으면 된다든지 혹은 나라도 살아야겠다는 이전투구의 장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그 속에서 성공의 신화 속으로 걸어들어간 극소수들과 스스로 도태되었다고 생각하는 대다수 사이에 동경과 경멸이란 양가적 감정 찌꺼기들만이 사회적 폭발력을 갖춘 시한폭탄으로 남겨지는 형편에 머물고 말 것이다. 교권과 직접적으로 관련 없어 보이지만 최근 일어나고 있는 소위 ‘묻지마 살인’들 역시 사회심리학적으로는 고독 살인이자 관계 단절 살인이라 보아야 한다는 분석들이 나와 있다. 갑질하는 학부모 역시 내가 극악하게 굴지 않으면 우리 아이가 불이익을 당하고 도태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다 나는 우월하고 내 새끼는 소중하다는 천민자본주의를 결합시킨 결과일 것이다.

결국 학교를 시작으로 우리 사회가 각자의 존엄성을 존중하고 다양성을 인정하며, 이를 기반으로 서로 관계맺는 것으로 나아갈 수 있어야만 비로소 서로를 살려낼 수 있다. 우리 사회를 통찰하며 새로운 교육의 필요성을 주장했던 문화인류학자 조한혜정은 우리가 ‘스스로 돕고(自助), 함께 도움으로써(共助) 서로를 살리는 공공성 실현의 사회(公助)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주주의를 키워드로 교육과 사회에 대한 강력한 주장을 이어가고 있는 김누리 교수가 우리가 신분제(Aristocracy)와 능력제(Meritocracy)를 넘어 소위 존엄제(Dignocracy)로 나아가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 역시 같은 맥락 속에 있다. 능력이라는 허울로 부모의 신분이나 부가 세습될 수 있도록 각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관계맺음을 통해 서로를 살리는 사회를 만들어야만 더 이상 누군가가 고통받거나, 희생당하거나, 죽지 않아도 되는 살림의 교육 체제를 만들 수 있다. 존엄의 세계로 나아가야지만 비로소 살림의 교육이 가능하다. 그리고 그 변화는 바로 ‘나’로부터 시작되어야만 가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