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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신학 3기/환경 주일에 생각하는 창조신앙

탈-인간중심주의의 불가능성 / 김정원

 

김정원 (성공회대 박사 수료, 여름교회)

“앞뒤 베란다 열어놓으면 생전 더운 거 모른다. 비싼 돈 주고 에어컨 살 필요 없다.” 하시던 엄마는 얼마 전 에어컨을 들였다. 5월부터 이어진 더위가 전기세 아끼겠다던 엄마의 고집을 꺾은 셈이다. 

그야말로 덥다. 서울도 덥고, 세계 곳곳이 덥다. 유럽과 아시아의 몇몇 지역이 역대 더위 기록을 갈아치우고 인도 델리에서는 폭염으로 인한 사망자가 100명을 넘어섰다. 투발루가 잠기고, 기후난민이 발생했다. 몽골의 수천 개의 강은 사막화로 바짝 말랐고, 인도의 고라마라섬은 해수면 상승으로 곧 사라질 위기이며 전 세계 온실가스의 0.4%만을 배출하는 방글라데시는 기후 재난을 매일같이 겪고 있다. 이러한 기후변화로 인한 피해 보고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내용을 얼마나 감각하고 있을까? 여기서 말하는 ‘우리’는 과연 누구일까? 누군가는 지구의 신음에 응답하고자 매일을 예민하게 생태적 실천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나와 같이 아는 만큼 실천하지 못하며 약간의 죄책감을 지니고 사는 사람들을 ‘우리’라고 해보자. 우리는 당장에 물에 잠길 일이 없고, 에어컨 아래 쉴 수 있으며, 즐겨 먹지는 않지만 고기를 소비하고, 유행을 따르지는 않지만 가끔은 필요 이상의 옷과 신발을 사는 사람들이다. 또 우리는 창조절을 지켜 설교를 준비하고, 속한 교회에서 환경을 위한 캠페인을 벌이기도 하며, 탄소배출을 줄이기 위한 일상의 실천을 곱씹기도 하고, 페트병에 붙은 비닐을 열심히 떼어 배출하는 것은 물론 샤워 시간을 줄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돌아보니 우리는 지구에게 생각보다 꽤 괜찮은 존재일지도 모른다. 또 이 글을 읽는 독자 중에는 요즘 유행하는 플로깅에 참여하거나 환경 단체에도 기부금을 보내며 친환경 농법의 과일을 사 먹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나는 그린워싱이라며 그러한 사람들을 섣불리 비판할 수 없다. 나 역시 그러한 ‘우리’에 속해 있으며 그렇게 사는 것에 우리들은 적잖은 에너지를 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우리의 마음의 자리를 묻고 싶어진다. 뜨거운 지구와 특히 남반구 사람들의 절박함 등을 우리가 감각하고 있는지, 그리고 정말로 비인간존재들과의 관계를 고민하고 있는지를 말이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에 잘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존재들의 소리를 담고 있을까? 

나의 마음을 아는 것도 어려워 MBTI에 매여 사는 세상인데, 저 닿지 않은 존재들을 어찌 마음에 다 담고 살겠냐만은 이 기후 위기 시대, 혹은 인류세(Anthropocene) 시대를 진실로 직시한다는 것은 비인간존재들까지의 타자를 감각하는 것 말고는 사실상 대안은 없다. 
 
나 역시 당위로 이 위기를 인식할 때가 많지만, 그리고 ‘어차피 망할 인류’라며 볼멘소리를 할 때는 더 많지만 몇몇 여성 학자들과 일상에서 마주하는 생명 살림에 마음을 쏟는 사람들로 인해 인간중심적 사유의 전환을 시도하곤 한다. 

먼저 인간중심적 삶, 인식 등을 극복한다는 말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인간인 이상 탈인간중심주의라는 말에 온전하게 닿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건 하나의 시대적 사조이며 책임윤리적인 언사다. 이는 지구 이웃들에게 이토록 해를 가한 인간들에게 묻는 책임이겠지만, 탈인간중심주의의 의미에 더 다가가기 위해서는 ‘인간’에 대한 재물음이 필요하다. 

인간은 계몽주의 이후 데카르트의 ‘코기토 주체’거나 칸트의 ‘이성적 존재’로 인식되었다. 인권, 시민권 등 인간에게는 권리가 허락되어 있고 그 권리를 가진 존재는 소유하고 소비한다. 그런데 정말 인간이 그러했을까? 저 인간 주체들은 모든 인간을 포함하고 있는 것일까?

<포스트휴먼>의 저자 로지 브라이도티는 휴머니즘의 휴먼/인간은 유럽 중심적 패러다임 안에서 생성된 개념임을 비판한다. 그는 탈식민주의 이론가들이 일찍이 비판했던 부분을 수용하면서, human은 지금껏 Man/유럽의 백인 남성으로 제한되어 있었음을 지적한다. 그렇다면 남성이라는 동일성에서 밀려난 여성들은 인간의 범주 바깥에 놓여있다는 것인데, 비유럽 여성은 더 멀리 바깥에, 비유럽 유색인종이면서 인권과 시민권을 갖지 못한 여성은 그보다 더 먼 바깥에 머물게 된다. 즉, 우리가 지금껏 말했던 인간은 결코 모든 인간을 지시한 게 아니다. 그러므로 근대 ‘인간’의 개념을 반성적으로 살피기 위해서는 규범이 된 Man의 바깥을 조명해야 한다. 다시 말해, 타자로 전락한 여성들의 위치를 감응해야 한다는 것인데, 이는 ‘인간’에 대한 반성적 성찰이자 동시에 탈인간중심주의적 시도가 된다. 창조 질서의 회복을 위해 탈인간중심적 삶이 필시 요청되고 있다면, 타자화된 여성들을 감각하는 일은 그 처음 과제가 될 것이다. 

여성이론가들의 은택으로 여성들의 불평등한 지정학적 위치는 계속해서 말해져 왔다. 그런데 여성이론 역시 기후 위기를 겪으며 논의의 지평을 넓혀나가고 있다. 브라이도티는 물론 도나 해러웨이와 같은 학자들은 타자화된 여성들과 비인간존재들의 경계를 허물며 동일자 바깥의 존재들을 마음에 담는다. Man 혹은 He라는 동일성의 바깥에 놓인 것이 비단 여성만이었을까? nonhuman의 범주에 놓여있는, 즉 동물, 지구 등 인간중심주의가 만든 폭력의 피해자를 함께 기억하는 것은 이제 여성 이론의 주요 담론이 되어가고 있다. 
 
‘인류는 어차피 망할거야’라는 다소 냉소적인 마음을 품은 내가 비인간존재들에 대한 고통을 감각하기 시작한 건 ‘고기’였다. 소가 배출하는 엄청난 메탄가스의 양이나, 소고기 1킬로 생산을 위해 필요한 10킬로의 옥수수, 그 옥수수 농사가 땅과 바다를 오염시킨다는 내용은 안 그래도 비싸서 먹기 힘든 소고기를 먹을 기회가 생겨도 기피하게 만들었다. 장염을 달고 사는 사람으로서 기름진 삼겹살과 치킨은 말 그대로 땡기지 않았다. 여차저차 지구를 생각하는 식단으로 살아가게 되었지만, 소, 돼지, 닭은 나에게 식재료로서의 ‘고기’였고 그들이 비인간존재로 수용된 적은 없었다. 소가 소고기로, 돼지가 돼지고기로 이름이 붙여진 것에 대해 의문을 품은 적이 없었으며, 그들이 피를 철철 흘리며 죽어서 내 식탁에 오른다는 걸 굳이 상상하려 들지 않았다. 그러다 비건들에게는 고전이 된 책 <육식의 성정치>를 교인들과 함께 읽으며 처음으로 식재료가 아닌 비인간존재로 그들을 마음에 담았다. 
 
비록 반려동물을 키우지는 않지만 자주 친구의 강아지를 맡아주었고, 고양이를 흠모하기에 나는 내가 꽤 친-동물적 인간이라 믿었다. 그런데 내가 실로 자주 만나는 동물은 보쌈이나, 닭가슴살과 달걀이었고 나는 그렇게 매일 동물들을 식탁에서만 마주했다. 내가 동물들과 연결되는 방식은 도살이었다. 그들은 토막 난 채로 제 이름을 잃어버린 채 ‘부채살’, ‘토시살’, ‘제육’, ‘스팸’, ‘날개’, ‘봉’으로 마트에 전시된다. 여성의 가슴과 엉덩이가 온라인에 전시되듯, 그리고 불과 400년 전 흑인 노예들이 시장에서 팔려나갔듯 그들의 존재 자체는 해체돼 버린 채 나의 밥상에 그렇게 올라왔다. 도살당하는 모든 장면을 삭제하고, ‘고기’만 기억해야 그것들을 맛있게 먹어치울 수 있으니까. 아이러니하게도 한강의 <채식주의자>는 베스트셀러가 되었지만, 그 책을 통해 고기를 적게 먹기로 했다던가 비건이 되기로 했다던가 하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가부장제와 육식이 가진 각각의 폭력성의 연결을 밝히고 폭로하는 그의 책 역시 우리가 ‘고기’라고 부르는 그것이 결국은 누군가의 죽은 살점임을 감각하게 한다. 글을 쓰는 이 순간 비릿해지는 것을 보면 이제서야 아주 조금 비인간존재들과 나의 관계가 수평적이지 않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있는 모양이다.

인간과 동물의 관계는 이처럼 친밀하면서도 모순적이다. 우리가 입는 옷, 신발, 약, 화장품, 생명공학기술까지 많은 부분이 동물의 희생에서 오며 우리의 일상과 친밀하게 닿아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탈인간중심주의적 실천은 먼저는 이들의 희생을 있는 그대로 마음에 담는 연습이 필요할 것이다. 나에게 ‘고기’가 그들을 감각하게 했듯, 각자의 일상에서 도살당하거나 실험당한 그들을 날 것으로 마주하며 감각하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그들의 고통을 감각하는 연습은 그들과 ‘우리’ 사이에 흐르고 있는 희생 그에 따른 우리의 죄성, 나아가 깊은 유대감 등을 인정하게 될 것이라 본다.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인간이라는 종과 동물이라는 종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상상을 더 자주 해보는 것이다. 탈-인간중심주의는 우리가 이토록 ‘인간’인 이상 불가능하지만, 탈인간중심적 접근은 바로 이러한 상상을 바탕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이는 종 평등주의와는 다르다. 동물을 의인화하여 그들이 가진 마땅한 권리에 대해 말하는 것은 도로 인간중심주의에 갇히게 되고 만다. 종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상상은 동물들의 특수성을 견지하면서, 인간과 동물이 결국 상호관계적으로 얽혀가며 공생한다는 것을 인식하는 일을 말한다. 인간과 비인간존재는 분리될 수 없으며, 다시 말해 인간과 비인간존재 모두가 서로를 통해 구성되어지며 그 관계의 수많은 매개변수를 열린 상태로 유지하려는 노력을 수반하는 일인 것이다. 브루로 라투르의 주장처럼, 인간은 인간과 비인간이 얽히며 구성된 혼종적(hybrids) 집합체이며 비인간존재들과 분리된 순수한 ‘나 자신’, 혹은 독립된 개체란 환상에 불과한 것이다. 경계가 있다고 믿는 개체주의에서 벗어나는 일, 그것을 위해 종의 경계 허물기 나아가 종의 횡단을 상상하는 일은 탈인감중심주의의 수단이 된다. 

결국 탈인간주의적 접근은 나와 먼 타자들과의 연결을 그리고 고통을 감응하는 일이다. 계속해서 타자화된 존재들이 우리 삶에서 누구, 혹은 무엇인지를 살피는 일인 것이다. 아래는 <포스트휴먼> 내용의 일부인데, 브라이도티가 낯선 이들을 위해 내용을 풀어 전달해 본다. 
 

“나는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며 타자화된 존재들과 편안해하는 탈-인간중심적 주체다. 이러한 반항적 요소들은 몸으로 차별과 불평등을 겪어낸 여성들의 몸을 의식하는 것과 관련된 것이다. 나는 모든 방향으로 비인간존재들, 예를 들어 세포들, 바이러스들을 증식시키는 번식자이자 보유자이다. 동일성의 우월성을 거짓으로 속여 보편이라 단정하는 남근중심주의와 인간중심적 휴머니즘의 정치경제 안에서, 나의 성(sex)은 ‘타자성’ 쪽으로 떨어지며, 경멸적인 차이로 혹은 보다 가치가 적은 존재로 이해된다. 나의 성이 역사적으로 한 번도 완전한 인간이 되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각주:1]


그의 이러한 사유는 여성으로서 내가 갖는 타자성이 또 다른 타자들과 연결될 가능성임을 알게 한다. 역사적으로 한 번도 완전한 인간인 적이 없었던 여성으로서의 나는 나와 먼 곳에 있는 방글라데시의 여성들을 감각할 가능성을 지녔다. 내가 사는 땅이 물에 잠겨 오는 공포, 불안. 이슬람 국가에서 태어났기에 수영조차 못하는 그 여성들의 절박함과 오늘 나의 자리가 연결된다. 성차화, 인종화, 자연화를 통해 구축되고 있는 ‘인류’ 속에서, 자본과 권력의 그늘아래에 놓인 존재들을 마음에 담아본다. 인종, 국가, 계급, 젠더, 성, 영토, 종을 횡단할 때, 그간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고통의 존재들을 더 자주 마음에 들여놓으며 인간중심적 사유와 멀어져 본다. 다행히도 나는 타자이기에 그대로 가능성인 것이다. 

새 에덴은 없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던 그 세상도 없다. 본적도 경험한 적도 없는 그 에덴의 복원은 불가능하며 그런 것은 본디 없었다. 다만 우리는 ‘우리’가 지금껏 해왔던 ‘올바른’ 일들을 계속하되, 탈인감중심적 삶의 불가능성을 끊임없이 마주하며 반성하는 일까지 해나가야 한다. ‘함께 잘 살기’는 인류가 시작한 이래 단 한 번도 없었고, 그런 이유로 탈인간중심주의는 불가능하겠지만, 절망의 시대에 희망을 보는 것이 그리스도의 소명 아니겠는가. 

지금까지 인간이 되지 못했던 존재들을 살피고, 그들이 지닌 고통을 감각하는 일, 나는 그것을 ‘마음에 들인다’라는 표현하였다. 함께 잘 살기는 거대담론으로는 이뤄지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관계의 산물인 우리는 서로를 책임감 있게 대하고 덜 폭력적인 방식으로 살아가는 일에 조금 더 앞장서야 한다. 차별과 혐오, 능력주의가 팽배한 이 땅에서는 더더욱. 

나와 먼 곳에 있는 저 존재와 저 종들이 우리와 얽혀 있음을 계속해서 인식하는 훈련과, 너와 내가 구분될 수 없는 상호의존적 존재임을 믿는 일은 꽤 신앙적이다. 


 

  1. 로지 브라이도티, <포스트휴먼>, 이경란 역, 아카넷, 107쪽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