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석헌 (한신대학교)
지구의 급격한 기후변화가 불러온 대형 산불, 대홍수, 이상 기온, 해수면 상승, 바이러스 감염병 등의 책임은 모든 자연 생명체의 최상위 존재로 생각하고 자원과 생명체를 무분별하게 착취해 온 인간에게 있다. ‘인류세(Anthropocene)’, ‘호모데우스(Homo deus)’와 같은 개념들은 인간이 지구 생태계 변화의 중심에 선 된 시대를 대표하는 표현들이다. 자연을 욕망의 충족 수단으로 삼아 온 인간 중심적 세계관을 바꾸지 않는다면 이 위기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기후 위기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제6차 IPCC(Intergovernmental Panel on Climate Change) 종합보고서」는 인간의 활동으로 인하여 초래한 기후 위기의 현황과 장기적 변화 추세, 위기에 대한 대응방법을 상세히 제시하고 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지속되는 온실가스 배출이 멈추지 않는다면 2040년에 지구지표온도가 평균 1.5도 상승할 것이며 인간과 자연 시스템은 적응 한계에 도달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IPCC 보고서는 전 지구적 차원에서 탄소배출을 감축하기 위한 신속한 체제 전환과 비상한 행동을 호소한다. 기후 위기에 대응하는 비상 행동은 회피(Avoidance), 완화(Mitigation), 적응(Adaptation)의 세 가지이다. 우리나라도 지구적 차원의 대응에 발맞추어 <탄소중립·녹색성장 기본법(24.1.1발효)>을 제정하였고, 2050년 탄소중립국가를 목표로 203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량은 35퍼센트 감축하기 위해 녹색 국가를 향한 “정의로운 전환(제1장, 2조 12)”의 방안을 분야별로 제시하고 있다. 1
그러나 IPCC가 제안한 회피, 완화, 적응의 대응법과 국가적 차원의 ‘정의로운 전환’이란 “녹색 기술과 녹색 산업의 육성, 촉진, 활성화를 통해” “지속가능발전에 이바지하는 것을 목적” 으로 하는 것으로서 그 자체로 위기 지연효과는 있을 수 있으나, 여전히 자연을 지속발전 가능한 소비재의 대상으로 여기는 인간 중심적 성장주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린뉴딜, 포용성장, 녹색성장 등 기후 위기에 대한 대안들은 수식어만 다를 뿐 하나같이 포기할 수 없는 지속적인 성장을 전제로 하고 있다. 나아가, 인간중심의 성장주의, 소비주의에 대한 반성과 전환적 태도 없는 기술 과학적 대응은 위장된 친환경주의를 앞세우는 기업들의 그린워싱(greenwashing)을 촉진할 뿐이다. 2
기후 위기의 근본적 해결은 과학기술의 활용과 법제도의 규제만으로 불가능하다. 인간중심의 문명을 중단시키기 위해 인간 의식과 삶의 방식이 전환되고 새로운 생태 문명 단계로의 비상한 도약이 함께 이뤄져야 한다. 이것은 기후 위기의 문제에 신학이 답해야 할 책임이 있음을 의미한다. 신학은 세계 안에서 타 존재와 관계하고 있는 인간 존재 물음이며, 또한 인간에 대한 물음은 곧 신에 대한 물음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 신학에서 창조론은 중요하다 할 수 있는데, 인간 중심주의를 탈피하여 모든 생명과 관계하고 공생하는 생태적 전환을 위한 기독교 신학의 근거를 창조론의 핵심인 ‘무로부터의 창조’ 신앙으로부터 찾아볼 수 있다.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사도신조의 첫 문장에 나오는 ‘전능하신 천지의 창조자 하나님’을 고백한다. 창조주 하나님은 무로부터 천지를 창조하셨다. 그러면 무로부터의 창조론은 교회 안에서 어떻게 등장하였으며 이것이 생태적 전환을 위한 신학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무로부터의 창조가 교회 안에서 제기된 배경을 보려면 기원전 1세기 후부터 3세기 플라톤 철학의 영향 아래에 있었던 교회 상황으로 돌아가야 한다. 플라톤은 우주에 대한 그의 이론을 말년이 되어서야 쓴 「티마이오스」에서 기술한다. 이 대화편에 따르면 데미우르고스라는 조물주로 등장하는 장인은 선재하는 질료를 사용하여 자신의 형상을 따라 만물을 창조한다. 데미우르고스는 최고의 선을 모방하여 선재하는 물질에 형태와 질서를 부여하였으나 그렇게 만들어진 세계는 완전한 선에 미치지 못하며 변화와 불완전으로 가득 차 있다. 악은 불완전과 변화의 산물이다. 플라톤이 우주를 중간 신인 데미우르고스의 창조로 설명하는 이유는 시공간의 제약을 받는 불완전한 물질과는 다르며 그것과 관계하지 않는, 완전하고 절대적이며 항상 동일한 참된 존재가 반드시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플라톤이 이데아에서 실재를 발견하려는 의도는 보편적인 진리의 기준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보편적 진리의 기준이 있을 때 보편적 도덕, 국가, 정치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데미우르고스의 창조는 이데아의 완전성을 보호하기 위한 일종의 장치이자 이데아에 대한 물질의 모사관계를 설명하는 방식이다. 이렇게 플라톤의 형이상학은 철저히 정신과 물질, 가지계와 가시계로 분리되는 이원론으로 구성된다.
참된 본질이 정신과 신의 영역에만 존재한다는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기독교 신앙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1세기 변증신학자들은 플라톤의 이원론 사상의 영향을 받은 영지주의자들의 신학과 논쟁해야 했다. 영지주의는 물질세계가 하나님의 창조가 아니라 저급한 존재가 실수를 범한 결과이며 악한 존재로 보았다. 이러한 영지주의적 창조관은 하나님의 선함에서 악한 세계가 나올 수 없다는 신정론의 문제와도 연관되어 있다. 세상의 악의 문제에 답하기 위한 영지주의자들의 선택은 철저한 이원론이다. 그러나 변증신학자들은 영지주의의 이원론을 기독교 신앙에 적용하면 끔찍한 결과가 나타난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특히 그들은 영지주의가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가현주의로 몰아가는 위험으로부터 경계하며 변증하는 일에 집중했다.
그러나 창조에 관한 문제에서만큼 그들 역시 플라톤의 영향력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영지주의 신학자들의 난제였던 신정론과 같은 문제였는데, 완전하신 하나님이 악이 존재하는 불완전한 세계를 직접 창조한다는 것은 모순이었기 때문이다. 이 모순을 해결하는 것은 창조자를 하나님이 아닌 신과 세계의 중간자로 상정하는 방법뿐이었다. 로마의 클레멘트는 하나님을 데미우르고스라고 지칭함으로써 하나님이 이 세상과 갖는 관계를 플라톤적인 개념으로 보았다. 즉 하나님은 위대한 예술가로서 선재적인 물질을 취해 자신보다 위에 있는 이데아를 모방하여 형체를 부여했다고 주장했다. 2세기 순교자 유스티누스는 플라톤과 같이 선재하는 무형의 질료로부터 창조가 이뤄졌다고 믿었다. 그에게 하나님은 세상에 직접 활동하지 않으며 세상 밖에서 머물러 계신 존재이다. 타티안은 신과 세계의 중간자인 로고스 창조를 주장하였는데, 세상은 어떤 선재적 물질로부터 만든 것이 아니라 로고스에 의해 세상이 나왔다는 것이다. 아테나고라스는 타티안이 말한 하나님과 로고스를 아버지와 아들의 유비 관계로 보았다. 3
변증가들은 영지주의와 논쟁했으나 플라톤주의는 여전히 기독교 신앙을 변증하는데 불가피한 사상이었다. 플라톤의 이데아 철학은 기독교의 유신론을 설명하는 데 유용한 틀을 제공했다. 플라톤이 세상의 창조를 이데아로부터 유출된 중간자 데미우르고스(정신/nous)를 통해 설명하듯, 변증신학자들은 하나님과 세상의 중간자인 로고스로 세상의 창조를 설명하는 편리한 방식을 멀리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과 피조 세계와의 직접적 관계는 부정되어야 하는 결정적인 문제는 해결하지 못한 채 안고 가야 했다.
플라톤의 형이상학적 이원론 사상에 근거한 영지주의적인 기독교 창조론으로부터 독립적인 입장을 처음 낸 신학자는 리옹의 이레니우스이다. 그는 하나님은 태초부터 계셨고 무에서 만물을 창조하셨다고 말한다. 하나님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 즉 하나님은 누구의 영향도 없이 자유의지로 무로부터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 창조하신 분도 하나님이시며 지금 여기에서 세상을 다스리는 분도 하나님이다. 그의 창조론은 삼위일체론적이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두 “손”, 즉 아들과 성령으로 창조하시고 다스리신다. 이레니우스는 저스틴처럼 아들을 세상과 하나님 사이의 중간자처럼 설명하지 않으며 하나님과 말씀 사이의 통일성을 강조한다. 같은 의미로서 하나님의 손들, 즉 아들과 성령도 하나님과 이 세상의 중간자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이 세상과 관계가 있을 때 나타내는 양식이라고 보았다.
무로부터 창조의 생태적 재해석
무로부터의 창조 신학은 이레니우스 이후로 뚜렷한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기독교 신학의 역사 안에서 무로부터 창조론이 교의로 정립된 것은 13세기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1215)」이다. 무로부터의 창조가 중세에 들어와서야 교회 신조로 공식화되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무로부터 창조는 오늘날 현대 진화론에 영향을 받은 진화론적 창조론과의 논의 속에서 논쟁이 될 뿐 기독교 역사에서 큰 주목을 받지 못해 왔다. 전능하고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존재를 강조하는 차원에서 무로부터 창조가 다뤄질 뿐이다.
그러나 무로부터의 창조는 인간중심의 문명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제공해 줄 중요한 신앙 고백 전통으로 재해석될 필요가 있다. 생태계를 탐욕적으로 남용하는 데에는 인간이 자연에 대해 우월성을 지닌 존재라는 세계관이 자리 잡고 있다. 신이 맺는 자연과의 관계방식이 인간의 행동 양식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신-자연 관계를 어떻게 이해할지는 생태 위기의 문제 해결에 매우 근본적인 요인이다. 성서는 하나님과 자연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도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만유의 아버지이시며, 만유 위(over all)에 계시고, 만유를 통하여(through all) 일하시고, 만유 안(in all)에 계십니다.” (에베소서 4:6) 하나님은 초월적(over all)이지만, 내재적(in all)이시며, 하나님의 초월과 내재가 분리되거나 혼합되지 않는 관계적(through all)인 면모를 동시에 가지신다.
하지만 신의 절대적 초월과 자연과의 질적 차이를 강조하는 초자연적인 이원론적 유신론은 플라톤과 영지주의와의 논쟁 이후에도 변모를 거듭하며 주류 신관으로 이어져 왔다. 중세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부터 종교개혁시대 루터와 칼빈 그리고 17세기 개신교 스콜라주의, 그리고 근대에 이르러서는 기독교 신학에서 주류적 신관으로 작용하였다. 특히 모더니즘의 시대를 연 데카르트(René Descartes)는 영혼과 육체를 근본적으로 구분하는 플라톤의 이원론을 따랐다. 데카르트의 세계관에서 초월적 신은 자연 세계 속에 기계장치의 수학적 법칙만을 심어놓고 더 이상 개입 관계하지 않는다. 이 같은 기계론적 세계관에서 이성을 가진 인간은 신을 대신하여 주체로 등극하며 자연은 인간이 통제 지배할 수 있는 대상으로 간주되었다.
무로부터의 창조 신앙은 이원론적인 초월적 신관에 대응하기 위한 교부들의 신앙고백이었다. 이것은 세상의 악과 하나님의 완전함의 신정론적 모순을 세상과 하나님의 완전한 분리로 해결하고자 했던 영지주의 신학을 거부하고, 무로부터 창조를 통해 하나님의 초월성은 세상으로부터의 분리가 아니라 세상 한가운데로 들어가 관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임을 주장한 것이다. 따라서 무로부터 창조는 피조 세계와 무관한 하나님의 초자연적이고 전능한 속성을 입증해 주는 교의가 아니라, 오히려 세계 안에 직접 개입하시는 하나님을 설명하는 근거가 된다. 무로부터 창조는 세상을 악한 것으로 치부하고 인간의 책임과 돌봄의 영역에서 배제시키거나 함부로 통치하는 대상으로 전락시켜 온 이원론적 세계관을 비판하고 피조 세계를 구원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영역으로 삼는 신학적 토대이다.
무로부터 창조 신앙은 창조의 기원과 방법에 관한 논쟁이 아니라, 신의 초월성의 성격, 신과 자연의 관계, 인간의 자연에 대한 책임을 설명해 주는 함축적 설명 방식이다. 이 신앙고백 안에는 이원론적 세계관과 맞서 세상을 긍정하고 적극적으로 관계하시며 구원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담겨 있으며, 신음하는 피조 세계에 대한 인간의 책임과 소명에 대한 교부들의 신앙이 담겨 있다.
성경과 신학 전통 안에 인간 중심주의적 관점과 세계관이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신학 전통을 부정하거나 무작정 전통을 옹호하려는 태도는 오늘의 기후 위기에 관한 신학적 대답이 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전통을 오늘의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 제시할 수 있는 신학적 해석과 가치의 발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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