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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신학 3기/<사건과 신학> 시즌 3를 마치며

사회선언문을 준비하면서 - 앞으로 백 년, 한국 에큐메니칼이 있어야 할 자리- / 남기평

 

남기평 (NCCK 화해통일위원회 간사)

 


100년을 맞이한 에큐메니칼 운동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는 대한민국 역사의 물결 속에 교회를 향한 일치로, 사회를 향한 선교로, 지난 한 세기의 여정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이 여정은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를 바탕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증명해 온 한국교회의 귀한 여정이기도 했습니다. 그 동안 NCCK는 시대적 사명을 멀리하지 않고, 예언자적 소명을 품고 교회가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이 땅에 성취하기 위해 충실했음을 기억합니다. 

1932년 ‘사회신조’는 부(不)정의한 이 사회에, 교회의 역할이 무엇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이 무엇인지를 제시했습니다. 사회신조는 하나님과 사람을 위하여, 교회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와 평화가 사회의 기초적 이상”이라는 그 신앙의 가치를 여전히 계승함을 깨닫습니다. 이를 통해 사회를 향한 교회의 역할을 묻고, 역사 속 에큐메니칼 운동의 가치가 유효함을 다시금 발견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100년을 큰 행사와 기념으로만 허투루 넘어가지 말고, NCCK의 100년은 한국교회, 즉 우리 자신을 자성하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자기 ‘의(義)’에 빠져,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협소하게 만들고, 모든 이에게 활짝 열려있는 성령의 너른 품을 척박한 자갈밭으로 만들고 있지 않은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교를 자임하며, <정의, 평화, 창조보전>(JPIC)의 가치를 소명으로 여겼던 에큐메니칼 신앙운동은 2024년 한국교회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아니면 시대의 푯대로서, 이 사회의 가치를 선도할 역량이 있는지도 우리는 냉정하게 물어야 할 것입니다.

한국에큐메니칼운동은 민중신학운동이 그러하듯, 가장자리로부터 시작된 선교(mission from the margins)를 지향했고, 암하렛츠(땅의 사람들, 비천한 자들)들이 주인이 된 복음을 전했던 신앙 운동이었습니다. 이는 귀한 신앙의 유산이고, 계승해야 할 신앙적 가치입니다. 그런데 이 전통들이 보수화된 한국교회 내에서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100년이라는 시간을 지나면서, 왜 그토록 한국교회가 보수화를 넘어 극우화되었는지, 이 또한 물어야 하겠습니다. 이는 향후 한국 에큐메니칼운동의 자리가 어디일지, 혹은 극우화된 한국교회가 어떻게 적응하고 변모해야 할지 또한 선택해야 할 시기에 놓였습니다. 

2024년 한국 개신교의 자리

1987년 이후 민주화를 이뤄냈지만, 1997년 IM F외환위기, 2008년 세계 금융위기를 버텨내면서, 한국사회는 개인 이기주의와 함께 초(超)경쟁사회로 진입했습니다. 극심하고, 치열한 경쟁으로 인해 인간의 삶은 파괴되고, 하나님의 피조물의 신음소리는 더욱 깊어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삶의 방식은 ‘생명의 존엄성’을 말살시키고,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에게 준 ‘생명’을 담보로 유지되는 반(反)생명, 반(反)정의, 반(反)평화인 삶의 방식입니다. 이는 기후위기로, 소수자에 대한 혐오로, 약자에 대한 배척으로, 사회적 참사로, 노동착취로, 부의 불평등으로, 전쟁으로 재현되고 있습니다.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교회는 ‘잃은 양’ 한 마리를 위해 존재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천하보다 귀한 한 생명의 가치를 품고, 누구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품에 발 딛을 수 있도록 그 품을 내어주어야 합니다. 이 땅에 교회됨의 가치와 책무를 고민해야 합니다. 

전대미문의 팬데믹을 지나고, 지구 공멸을 예견한 기후위기 속 뉴노멀(the New Normal) 시대인 2024년, 여전히 종교의 역할이 중요하고, 교회의 심적, 물적 공간이 누군가에게는 필요합니다. 이것은 교회가 사회를 향한 주어진 당연한 책무이기도 합니다. 한국교회는 오늘날 그렇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논리와 이익을 위해서 아무렇지 않게 공적공간을 점유합니다. 공적공간에 점유는 민주시민의 권리가 발동하지만, 민주시민으로서의 도덕과 책임 의식은 없습니다. 도덕은 타인을 배려하고 인정하고, 다양성을 받아드리는 것이고, 책임 의식은 광장에서 어느 누구라도 ‘안전’을 도모하는 것입니다. 특정 극우 개신교 집단은 시민들에게 광장을 빼앗아갔습니다. 광장은 그들이 속한 민주주의의 수준을 가늠하는 척도입니다. 개신교 집단이 점유한 광장은 민주주의가 아닌 열렬한 광신적 선동구호만 넘쳐난 전체주의 모습을 띠고 있습니다. 이는 바로 ‘비호감’과 연결됩니다. 비호감은 매력이 없습니다. 설득력도 갖지 못합니다. 한국 에큐메니칼운동은 이들과 구분되길 원하지만, 우리의 자리는 비호감 한국 개신교라는 자리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다르다’라는 방식의 자의식 정도로만, 나 홀로 고고하게 에큐메니칼 정체성을 지키는 것으로만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이, 점유 광장에 넘쳐나고 있습니다. 심지어 에큐메니칼의 공간까지 전방위(심적, 공적)로 점유해 들어오고 있습니다. 그러니 한국 에큐메니칼운동도 혼종으로 변모해 갑니다. 혼종은 모두 겪지 못하는 징후들과 증상들을 선보입니다. 대명천지에 비상식을 넘어서는 처음 보는 것들이기에, 당혹스럽습니다. 생각 회로의 오류가 발생합니다.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릅니다. 한국 에큐메니칼운동은 안밖으로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한국에큐메니칼 운동을 해야 할 일 – 사회선언문

대한민국의 사회 이슈와 문제들은 복잡해지는 것을 넘어서 얽히고설켜 꼬이고 엉켜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시작은 신자유주의체제로 파생되는 경제 부정의문제입니다. 끝도 모르는 자본의 잠식과 잡식성 때문에, 모든 분야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 ‘탐욕’의 문제에서 우리는 자유롭지 못합니다. 결국 인류의 멸절을 부르는 기후위기 문제로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앞서서도 언급했지만, 신자유주의체제는 초경쟁사회와 무한경쟁으로 한 사람을 극한까지 몰아세웁니다. 극한에 몰렸을 때에는 선택하게 됩니다. 그 선택은 대개 포기하거나, 극복하거나, 입니다. 포기는 경쟁에 밀려나는 것이고, 주변부로 쫓겨나게 됩니다. 포기는 체제의 순응하지 못한 사람으로, ‘루저’(Looser)로 낙인찍힙니다. 

‘돈-액수’로 등급이 나눠지고, 사람의 쓸모를 평가합니다. 결국 극심한 양극화로 분열되고, 분절화됩니다. 그러니 누구의 탓으로 돌리기 어렵게 되고, 나의 문제를 받아드리게 됩니다. 체제는 사라지고 ‘개인’만 남게 됩니다. ‘홀로’되는 사회는 그 원인을 체제에 돌리기보다, 또 다른 ‘홀로’에게 그 책임을 전가합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책임의 ‘폭탄’을 돌리고 있습니다. 폭탄이 터지면, ‘개인 홀로’에게만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이를 막아주는 중립지대, 완화하는 완충제, 파편의 방탄의 역할을 누구도 하지 않습니다. 이 역할은 결국 한국교회, 한국 에큐메니칼 운동이 해야 할 일입니다. 이것은 ‘경청’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창세기는 그 시작을 천지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의 형상을 쏙 빼닮은 인간을 창조하시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안식하시지요. 현재 인간들은 창세기에서 창조한 것 무엇 하나 제대로 지켜낸 것이 없습니다. 청지기 역할을 망각한 셈입니다. 생태계 파괴는 물론이고, 우리들의 세계를 뒤틀려 놓고, 마른 수건 짜듯이 모든 생명의 마지막 힘까지 끌어 쓰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형상을 망치고 있습니다. 이를 인간의 ‘존엄’으로 말할 수 있는데, 그 존엄이 바스러지고 있습니다. 존엄은 생명과 연결됩니다. 타인의 생명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노동자를, 노인을, 소수자를, 여성을, 북한을, 이주민을, 이웃 종교를 너무도 쉽게, 혐오하고 차별하고, 배제하고 배타하고, 반목하고 있습니다. 이 선두 집단이 바로 특정 개신교 집단입니다. 사회는 교회에게 여러 의제에 대한 ‘경청과 응답’을 요구합니다. 그 시작은 경청입니다. 그리고 이에 적절한 하나님의 뜻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빗대어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입니다. ‘경청’ 후, 우리는 복음을 전해야 하는데, 과연 주변부나 문제의 당사자들에게 ‘복음’은 무엇일까요? 혐오, 정죄, 판단, 정해진 답, 중언부언일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찾아봐도, 위와 같은 복음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사자들의 사정을 이해하고, 인정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들에게 ‘자유’와 ‘구원’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당당히 그 사회의 일원으로 속하게 하였습니다. 누구도 배제되지 않고, 배타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한국 에큐메니칼운동은 예수님이 전했던 복음을 사회를 향해 선포해야 합니다. 근현대사를 관통하며, 지내왔던 한국 에큐메니칼운동의 역할이었습니다. 그들과 함께 지내고, 머물고, 그들을 지지했습니다. 이들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복음으로 응답’할 의무가 있습니다. 향후 한국 에큐메니칼운동은 다음과 같이 경청하고 복음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자본이 인간의 생명과 존엄보다 우위가 되는 사회에 응답한다. 
(경제 부정의) 일한 만큼의 몫을 가져가고 인간다운 삶이 가능한 정의로운 사회를 요청한다. 
(정치 양극화) 다양한 이념과 가치가 경쟁하며 소통하는 정치 민주화가 절실하다.  
(디지털 문명) 인간 존엄을 보장하고 공존하는 디지털 문명을 생각한다. 
(노동 현실) 노동자의 안전과 권리를 보장하고 노동시장의 안정화가 시급하다. 
(사회적 재난) 국민의 생명과 안전에 대한 체계가 사회적 신뢰를 회복한다.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 혐오) 차별과 혐오가 아닌 공존과 연대의 사회를 지향한다. 
(폭력의 일상화) 생명을 존중하고 더불어 사는 삶의 경험이 성숙한 사회를 만든다.  
(이주민) 이주민과 함께 미래를 그려갈 수 있는 동행의 자세가 필요하다. 
(인구절벽) 인구절벽은 불평등하고 성차별적 사회구조에서 출발한다. 
(성차별) 모두를 해방하는 정의롭고 평등한 인식과 제도가 요청된다. 
(청년세대) 다양한 청년정책과 불평등을 완화하는 구조적 개혁이 필요하다.   
(한반도 평화) 한국 사회는 비핵화와 평화담론을 위한 주체로 공론의 장을 마련해야 한다. 
(식민지 역사 청산) 과거사 청산은 이 땅에 정의와 평화 생명의 가치를 실현하는 일이다. 
(기후위기) 인간중심적 세계관과 자본주의 문명을 반성하고 생명 중심의 지속가능한 사회를 희망한다.  


앞으로 10년을 위해, 사회선언문에 무엇을 담을 것인가?

이제 100년을 시작합니다. ‘100(백)’이라는 숫자는 100주년을 맞이하는 오늘 자부심으로 다가옵니다. 100년을 이어왔다는 것, 버텨왔다는 것, 단순히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닌, 끊임없이 활동하고, 존재감을 피력했다는 것이 지금 한국 에큐메니칼운동을 버티게 하는 동기임을 세삼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지난 100년을 뒤로하고, 앞으로의 100년에 대한 걱정이 앞서는 것이 현실입니다. 앞으로 100년보다 바로 10년, 아니 5년, 3년을 우려해야 하는 때가 도래했습니다. 앞으로의 100년은 변화해야 한다고들 합니다. 그 변화에 대한 우려와 걱정이 앞섭니다.

100년을 맞이합니다. 교회는 이 땅에 속해 있습니다. 하나님의 피조물들과 주변 모든 이웃과 연결되어 있어, 서로 영향을 주고받습니다. 그래서 교회와 사회는 서로를 분리할 수 없고, 서로를 수단으로, 쓸모로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짝’이 되어 함께 살아가고, 서로 짝이 되어 함께, 우리에게 주어진 다양한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합니다. 앞으로의 100년을 위해 도전하고, 서로를 향해 말을 걸며, 창조적이며, 생산적인 방식을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식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소명은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발견해야 합니다. 이번 NCCK 100주년 사회선언(가제)이 세대를 넘어 에큐메니칼 운동의 가치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하나님의 선교가 무엇인지를 재차 알리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