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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신학 1기/국가조찬기도회

'국가조찬기도회', 종교가 권력과 연애하다! / 성석환

'국가조찬기도회', 종교가 권력과 연애하다!

- 성석환(장로회신학대학교)

 

1968년 처음 시작된 '국가조찬기도회(이후 국조기)'는 지금도 우리나라의 최고 지도자나 중요 정치지도자들과 함께 조찬을 겸하여 나라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기도회를 갖고 있다. 2019년 6월 17일에 제 51회 '국조기'를 개최하는 주최측은 이 날을 '국가기도의 날'로 정한다고 밝혔다. 이들이 내세우는 명분은 국가를 위해 기도한다는 것이지만, 그 동안 과거의 행적을 돌이켜 볼 때 그 명분의 역사적 그리고 신학적 정당성이 의심스럽다.

최근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의 대표라는 인사가 반국가적 발언과 비신학적 언사를 일삼아 큰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상황에서, 유명한 목사들이 호텔에 모여 나라를 위해 기도회를 여는 행위가 시기적으로 과연 적절한지도 반문하게 된다. 권력을 가진 이들을 모시고 세를 과시하며 자신들을 무시하지 말아 달라는 메시지를 던지기 위한 것인지, 겸손한 마음으로 신께 기도를 드리려 모이는 것인지 분간이 가질 않는다.

 

그들의 종교적 명분

박정희 시절 ‘국조기’에 참여했던 기독교 지도자들은 그를 성군이며 위대한 지도자라 칭송했다. 개발독재에 편승해 대형화를 꾀했던 일부 한국교회는 막대한 부와 수를 축적할 수 있었다. 박정희 시대가 막을 내리고 또 다른 독재자가 등장하자 한국교회의 ‘국조기’는 또 그들을 지지하며 머리를 숙였다. 지금 한국교회를 향한 사회적 비난이 거셈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같은 행사를 벌일 수 있는 이 오만함의 원천은 당시 쌓은 부와 물적 토대 위에 놓여 있다.

그들이 들먹였던 성경의 가르침은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롬 13:1).”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정교분리’ 원칙을 주장하면서도 권력자 앞에서는 금방 머리를 조아리고 기도하자며 성경을 이중적으로 적용했다. 불의한 권력자를 비판하는 이들에게는 ‘정교분리’를 권고하면서 정작 권력자들과는 ‘정교유착’을 노골화했던 것이다.

이런 이중적 행태는 ‘국조기’에서만 시전된 것이 아니다. 수시로 청와대를 들락거리며 최고 권력자와 만나는 친분을 과시하는 것이 큰 자랑인 줄 아는 이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권력과 동일시(identification)한다. 대형화를 통해 물적, 인적 자원을 동원할 수 있는 있게 된 이들은, 자신들이 쌓은 종교적 성취를 권력과의 친밀성으로 공인받기 위해 자신들의 정경유착 행위를 애국심으로 포장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종교권력을 정치권력화하고 싶은 것이다.

‘국조기’가 시작된 박정희 시대에는 굵직한 기독교행사가 봇물처럼 터졌다. 특히 1974년 빌리 그래함 목사가 내한하여 가졌던 ‘엑스플로(EXPLO)’ 행사는 여의도 광장(당시는 516 혁명광장)에서 100만이 모였는데, 이는 박정희 정권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어 가능했다. 이후 CCC를 비롯한 학생선교단체들이 우후죽순 생겨나게 되었고, 정권과 우호적이었던 한국교회는 강남개발이라는 호재를 만나면서 중산층 기반의 대형교회 시스템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정교분리’ 원칙은 종교개혁의 결과물인 ‘종교의 관용(자유)’와는 다른 세속주의 논리이다. 정치적 영역을 포함하여 공적 영역 역시 신앙의 실천적 공간이며, 그것은 보편적인 하나님의 공의적 원리에 비추어 실행되어야 한다는 것이 종교개혁 신학자들의 주장이었다. 개인주의 영성과 성장주의에 매몰된 오늘의 개신교가 세속의 권력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행태는 ‘교판/교파주의’ 체제의 결과물이고, 리처드 니버의 말대로 교회의 타락 그 자체이다.

 

종교적 가족주의의 정점

그들은 권력자들과 함께 어울리며 무엇을 얻으려 하나? 그들은 자신들을 그들과 같은 공간과 시간 안에 위치시키며 그들과 정치적 유대를 맺기 원한다.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에게는 가혹한 비난과 조롱을 가차 없이 쏟아내는 그들이 권력자들에게는 상냥히 웃으며 그 힘에 편승하고 자신들 편으로 포섭하려 하는 것이다. 힘 있는 이들은 조건 없이 ‘가족’으로 포섭하고, 힘없는 이들은 과감히 타자화하는 것이 이 타락한 유대의 속성이다.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권력을 향한 가족주의적 자기동일시는, 중세 암흑기의 타락한 교회에서, 또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나치 정권을 지지한 독일교회에서, 그리고 같은 주님을 고백하는 유색인종들을 피부색이 다르다 하여 차별한 서구 교회에서도 동일하게 발견되는 DNA이다. 타락한 종교는 언제나 권력과 자기동일시를 시도했었고, 그 권력의 힘에 의존해서 타자에 대한 폭력을 신앙으로 미화해왔다.

‘우리끼리’, ‘우리만의’라는 가족주의적 종교가 한국사회에서 가장 극우적 파행을 드러내는 지점이 바로 ‘애국(반공)주의’ 이데올로기와의 결탁이다. 각 개인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전체주의 권력은 국가에 대한 복종만을 강요한다. 이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기 위해 권력자가 가장 효과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도구가 바로 종교이다. 권력은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종교로 미장하고, 종교는 자신들의 권력 욕망을 ‘나라사랑’이라는 ‘애국(반공)주의’로 치장한다.

성경은 권력을 대하는 신앙적 태도에 대해 크게 두 가지 모형을 제시한다. 구약의 예언자가 보여준 비판적 모형이 있고, 신약의 사도들이 권면하는 협력적 모형이 있다. 그러나 협력적이라 할지라도 불의한 권력에 아부하거나 복종하라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오해나 갈등을 발생시키지 말라는 취지로 봐야 한다. 공의로운 권력에는 협력하고, 불의한 권력에는 맞서야 한다는 것이 복잡하게 말할 것도 없는 명확한 성경의 가르침이다.

1987년 이후 제도적 민주주의가 자리를 잡아가고 더디기는 하지만 민주주의를 향한 사회적 상상력이 확장되고 있지만, 교회의 신학적 상상력은 빈곤하고 왜소하여 시민사회로부터 조롱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유명 목사들끼리 모여 자신들만의 ‘가족주의’를 확인하며 권력과의 동일시를 욕망하는 ‘국조기’와 같은 구태는 이미 그 역사적 유효기간이 끝난 지 오래이다.

우리사회의 민주적 발전과 시민사회의 성숙을 위한 토론의 공론장에 참여하여 한 차원 높은 신학적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새로운 연대가 절실하다. 극우, 극좌 양 극단의 구태를 제외시킨다 해도, 여전히 작동되는 기독교의 가족주의적 세력과시 욕망은 진보진영이나 보수진영에 공히 뿌리깊이 스며있다. ‘국조기’를 비판하면서 배우는 한국교회의 가족주의적 행태는 그 세력을 과시함으로써 존재감을 확인하려는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울 때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한기총’ 대표라는 인사가 그 부끄러운 입으로 ‘본회퍼’와 자신을 동일시했다고 한다. 이 또한 자신을 유명한 이와 동일시하려는 ‘아무말 대잔치’의 소아적 발상이다. ‘한 자리’를 은근히 바라는 천박한 권력욕을 종교적 신념으로 포장한들, 설교요 기도로 한껏 치장한들 그 부패한 냄새를 제거할 수 있으랴! 사실 개인적으로는 별로 관심도 없고 그다지 중요해 보이지도 않은 ‘국조기’에 불편한 마음 드러내봐야 시간낭비다.

 

다만, 굳이 하려거든 정말 창피하니까 남들 다 보는 호텔에서 하지 말고 차라리 그 자랑스러운 어느 대형교회에서 하라고, 혹여 조찬이 문제가 된다면, 그냥 샌드위치 드시고들 얼른 목회현장으로 흩어지시라 말해주고 싶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