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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신학 1기/국가조찬기도회

밥 한 끼 앞에 두고 기도하는 자들의 책임에 대하여 / 신익상

밥 한 끼 앞에 두고 기도하는 자들의 책임에 대하여

- 신익상(성공회대학교)

 

먹방의 시대, 그러나 나의 한 끼를 알리지 말라!

바야흐로 먹방의 시대다. 텔레비전 채널을 바꾸다 보면 거의 30% 정도는 먹는 것에 관한 프로그램들인 것 같다. 물론, 순전히 개인의 심리적인 체감에 따른 짐작이다. 어쨌든 20대에겐 요즘 유행하는 드라마를 묻는 것보다 핫한 짤방을 묻는 게 더 나은데, 십중팔구는 먹방 짤방이다. 어디에서 무슨 드라마를 하는지는 몰라도, 어떤 먹방이 재밌는지는 알고 있다. 왜 사람들은 갈수록 먹는 것에 열광할까? 이 땅의 근현대사를 되돌아보면, 지금 사람들이 그 어느 때보다도 양과 종류에 있어서 풍족한 먹거리 속에 파묻혀 지내고 있는 것 같은데 말이다.

그건 어쩌면 살아있음을 확인하고자 하는 몸부림일지도 모른다. 먹는 행위만큼 살아있음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도 드물다. 먹을 수 있는 것도 많지만, 먹을 수 있는 것들을 요리하는 방법은 더 많고, 만들어진 요리를 먹는 방법도 무궁무진하다. 사실, 극단적인 상황에서 생명을 유지하는 데 더 필수적인 것은 산소와 물일 테지만, 산소와 물은 여러모로 심심하다. “우리 함께 만나서 해발 150미터 높이의 남산 산소를 함께 들이마실까”라든지, “우리 오늘은 여의도 공원에 아리수나 마시러 갈까”라든지 하는 제안을 듣는다면, 이상하지 않은가? 이건 별 설렘 없이 심드렁하게 들린다. 투쟁하지 않고서도 쉽게 얻을 수 있으니까. 차라리, “오늘 점심은 짜장 어때?”가 더 흥미진진하지 않은가?

음식을 먹는 행위는 산소와 물에 비하면 훨씬 투쟁적이다. 그건 비교적 쉽게 얻어지지 않는다. 여러모로 수고가 필요하다. 그렇게 우리 앞에 차려지는 음식은, 사실 어떤 생명의 죽음을 담보로 하는 숭고한 희생 제의다. 음식은, 우리의 생명이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닌 측정 불가능한 은총이기에 소중하다는 상식적인 진리를 새삼 일깨운다. 그래서, 음식을 먹는 행위는 생명의 죽음과 소생이 교차하는 행위, 죽음과 부활이 공존하는 행위다. 그것은 죽음을 통해, 죽음에서 생명으로 넘어가는 행위다. 먹방을 통해 우리가 정말 보고 있는 것은, 음식을 통해 정말 대견하게 삶을 연장하는 맛이다. 맛있다는 그 한마디는 그렇게 살아있다는 항변이고, 그래서 오늘날 사람들은, 가장 세속적인 형태로 죽음과 부활이 교차하는 살아있음 자체를 확인하며 소비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하지만 먹방의 시대가 오기 훨씬 이전에 이미 한국의 개신교 교계 지도자들은 먹는 행위를 내세우는 기념식을 진행해 왔었다. 먹방의 선구자격인 이른바 “국가조찬기도회”가 그것이다. 이 기도회는 “국가+아침 식사+예배와 기도”라는 세 가지 조합으로 되어 있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와 그 국가에 속한 국민의 행복과 안녕을 기원하며 국가 지도자 그룹과 교계 지도자 그룹이 함께 만나 예배와 식사를 나누는 이 멋진 순간을 상상해 보라. 웅장한 홀에 원형 식탁이 무수히 놓이고, 거기에 둘러앉은 양복과 정장 차림의 사람들, 한쪽에는 거대한 규모의 성가대와 이름난 성악가의 특송, 내로라하는 이들의 기도와 설교! 하지만, 대통령과 대통령을 호위하는 사람들의 등장과 함께 시작되는 이 기도회가 대미를 향해 달려가는 동안 함께 고조되는 호기심이 하나 있다. 끝나고 나면 뭘 먹을까? 분명 국가조찬기도회인데, 국가도 보여주고 기도회도 보여주지만, 조찬은 뭔지 보여주지 않는다. 기도회가 끝나면 방송도 함께 끝난다. 아, 이 33.3% 부족한 먹방이라니!

 

끼니는 예배만 못하다?!

국가조찬기도회는 교회가 한 끼 식사와 예배를 분리해서 생각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교회는 예배와 식사를 명확하게 나눈다. 시간상으로 분리하든지, 공간상으로 분리하든지, 나눈다. 그렇게 나눔으로써 얻어지는 효과는 분명하다 ― 예배가 식사보다 낫다는 생각의 강화. 아무렴, 마르다보다야 마리아가 낫지. 부엌일보다야 예수의 말씀을 듣는 게 낫지. 당연한 거 아닌가?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그런데, 도대체 뭐가 예수의 말씀이란 건지? 교회 강단에서 어떤 식으로든 울려 퍼지기만 하면 그건 곧 예수의 말씀인 건가? 교회 강단에서 나오는 말들은 마치 수학 공식처럼 저절로 진리가 되는 건가? 세월도 많이 흘렀고, 팔레스타인 땅에서 한참 멀리 떨어진 한반도에서 예수를 직접 만나긴 힘든 사람들에게 주어진 실물이라곤 교회인데, 교회가 곧 예수인 건 아니니 답답할 노릇이다.

어쨌든, 예배가 식사보다 낫다면, 예배와 식사는 분리되는 것이 마땅하다. 언감생심 식사가 예배에 슬쩍 껴들려고 생각조차 하면 안 된다. 식사와 분리된 예배의 위용은 대단한데, 예배는 식사를 축복하고 풍성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예배에는 식사에는 없는 생명의 힘이 있다. 이제부터 모든 식사는 예배 앞에서 잠잠할지어다. 예배가 허락하기 전에 식사는 생명을 줄 수 없다. 예배가 성공하기 전까지 식사는 제어할 수 없는 탐욕에 물들기 쉽다. 먹방은, 그래서 탐욕만을 소비하는 부질없는 일이다. 그러니, 국가조찬기도회에서 조찬은 기도회 뒤로 물러나 있는 것이 당연할 뿐만 아니라, 사실 중요하지 않다.

국가조찬기도회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기도는 서민과 국민이 경제적인 어려움에서 벗어나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국가적인 도움을 줄 것을 비는 내용이다. 교계 지도자들과 국가 지도자들은 모두 서민과 국민을 위해 기도한다. 그들의 먹거리를 걱정하고, 그들의 삶의 질을 걱정한다. 그 걱정을 기도와 설교에 담아내고, 그렇게 예배는 국가적 희생 제의의 정점을 향해 치닫는다. 하지만 그렇게 예배가 끝나고 나면, 그 이후부터는 상상을 감행해야 한다. 상상을 위해 하나 묻자. 그들의 식사는 서민의 식사일까? 그들이 그토록 염려하는 서민들의 면모를 거기에서 찾을 수 있을까? 만일 없다면, 그들이 알리기를 꺼리는(!) 한 끼 식사와 이 한 끼 식사에 앞서 정성스럽게 드려지는 예배 사이의 간격만큼이나, 그들의 식사와 서민들의 식사 사이의 간격 또한 벌어져 있는 것은 아닐까? 사실, 그들이 보여주지 않는 것은 예배와 식사 사이의 거리가 아니라, 그들의 식사와 서민들의 식사 사이의 거리가 아닐까? 끼니는 예배만 못하다는 말은, 사실 ‘나’의 끼니가 아닌 ‘너’의 끼니를 두고 하려는 말 아닐까?

 

예배가 끼니가 아니라, 끼니가 예배다

식사는 숨기고 화려한 예배는 공개하는 오늘날 대한민국의 국가조찬기도회가 쏙 빼닮은 성서 내용이 있다. 바리새인의 화려한 기도 장면! (눅18:9~14) 그들은 조찬기도회라 쓰고 기도회라 읽음으로써 자신들의 조찬을 기도회와 동급에 등극시킨다. 마치 그들이 모여서 먹는 이유는 전적으로 기도회를 위한 것이라는 듯. 조찬을 함께 하지만, 사실 그 조찬에는 관심이 하나도 없다는 듯. 그래서 그 조찬은 기도회의 신성함을 잇고 있다는 듯. 그렇더라도, 그들이 인간인 이상 그들은 분명 조찬을 함께 나눌 터이다. 하지만, 조찬은 기도회 앞에 걸려 있는 하나의 핑계 역할을 할 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기도회는 끼니를 때우는 행위 없인 불가능함에도, 그 행위는 그저 핑계가 된다. 생명에 필수적인 것의 핑계화.

또한, 그들은 ‘너희’의 끼니를 걱정함으로써 자신들의 끼니를 정당화한다. ‘너희’의 끼니가 걱정스러운 만큼, 그래서 ‘너희’를 위해 기도하는 만큼, 그들의 끼니는 신성해진다. ‘우리’의 끼니는 마치 ‘너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는 듯, 그들은 자신들의 끼니를 무시한다. 그렇게 무시함으로써 더욱 신성시하게 하는 고도의 정치적 전략 ― ‘우리’의 끼니는 ‘너희’를 위해 있다. 그 끼니는 너희들을 위한 기도에 쓰이니까!

그런데, 예배와 끼니를 분리함으로써 예배가 진정한 끼니라고 강변하는 국가조찬기도회는 그 예배가 매달리고 있는 예수의 말씀과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예수는 공개적으로 끼니를 때웠고, 은밀하게 기도했다. 예수야말로 먹방의 원조였다. 예수의 거리낄 것 없는 자유로운 끼니는, 죄인이나 세리와 함께 하는 식사였다. 예수는, 죄인이나 세리를 위해 기도하기에 앞서, 그들과 함께 끼니를 때우며 잔치를 벌였다. 예수에게 끼니는 예배와 분리된 적이 없었고, 국가적인 제도로 정착하기 전의 교회 또한 끼니와 예배를 분리하지 않았다 ― 입안에 넣는 한 숟가락 음식마다, 그들과 끼니를 함께 했던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기념되고 높여지는 기도였다.

그러니 하나만 제안하자. ‘국가조찬기도회’라는 이름에서 ‘조찬’을 뺐으면 한다. 그냥 ‘국가기도회’라고 하라. 기왕에 ‘조찬’을 뺀 김에, 남의 끼니 걱정하는 기도도 함께 빼주기 바란다. 아니면, 국가기도회를 관두고 예수처럼 함께 끼니를 때워야 할 누군가를 찾아서 함께 조찬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이것이 밥 한 끼 앞에 두고 기도하려는 자들의 최소한의 책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