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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신학 1기/국가조찬기도회

어떤 국가를 위한 기도 / 강석훈

어떤 국가를 위한 기도

- 강석훈(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한 목사의 막말이 한동안 많은 언론의 관심을 끌었다. 극단적으로 이데올로기 편향적이며 혐오에 가득 찬 시대를 거스르는 발언들이 어떻게, 왜 이리도 세상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일까? 개가 사람을 무는 것은 뉴스가 될 수 없고, 적어도 사람이 개를 무는 비상식적인 사건 정도는 되어야 뉴스가 된다는 언론의 속설처럼 단순히 한 목사의 비상식적인 막말이 이들의 관심을 끌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는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꽤 오랫동안 누적돼왔던 개신교에 대한 냉소와 비판에서 야기된 것이다.

 

목사의 막말, 그리고 수많은 시선들

이러한 관심에서 우리는 언론이 한국 개신교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나아가서 한국 개신교를 향한 이 사회의 시선을 읽을 수 있다. 조금 심하게 이야기 하자면 이 사회가, 이 사회의 언론이 바라보는 한국 개신교는 극단적으로 이데올로기 편향적이며, 혐오에 가득 차 있고, 비민주적, 비합리적, 비이성적인 기제가 작동하는 용도 폐기된 집단일 것이다. 아니면 그마저도 아무 관심이 없다. 성경은 일찍이 이러한 상태를 맛을 잃어버린 소금이라고 따끔하게 지적했다.

교회는 세상의 이러한 평가에 저항했다. 전광훈 목사는 결코 한국 개신교를 대표하지 않으며, 그가 속한 단체 한기총은 한국 교회를 대표하는 기관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가 전광훈 및 한기총과 선 긋기를 한다고 한들 개신교에 대한 세간의 시선이 바뀌게 될까? 설사 극단적 시선을 거둬들인다 해도 한국 교회가 뿌리부터 달라질 수 있는 것인가?

이번 사태는 일찍이 제국주의가 휘몰아치던 시대부터 민족이 겪었던 아픔을 줄곧 외면하며 이데올로기의 대립 속에 숨어 권력에 ‘기생’하는 것으로 조직을 유지하는 것에 힘을 쏟아온 한국 교회가 만들어낸 필연적인 사건일 수 있다. 그는, 그의 단체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우리가 만들었다. 한국교회가 만들었다. 그가 없어도 여전히 한국교회는 혐오에 가득 찬 비합리적인 조직이며, 그의 단체가 없어도 여전히 한국교회는 친 권력적인 집단이라는 세상의 평가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국가조찬기도회, 어떤 국가를 위해 기도했는가?

올해도 국가조찬기도회가 개최되었다. 권력의 현장, 그리고 그 권력이 교체되는 현장에 어김없이 함께했던 국가조찬기도회는 여러 비판들, 심지어 그것을 폐지해 달라는 청와대 청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휘황찬란하게 권력과 함께 하는 개신교의 건재함을 과시했다. 그리고 그들은 국가를 위해 기도했다. 그렇게 국가를 위해 기도함으로 그들은 대답해야 할 의무를 가지게 되었다. 어떤 국가를 위해 기도했는가? 그들이 기도한 국가는 과연 어떤 국가인가?

“국가란 무엇입니까?”
“변호사라는 사람이 국가가 뭔지도 몰라?”
“알지요. 잘 압니다. 헌법 제1조 2항. 대한민국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국가란 국민입니다.” (영화 ‘변호인’ 중에서)

잘 알고 있듯이 국가는 국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국가가 존재할 수 있는 근거는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한 명 한 명의 국민, 그리고 그 한 명, 한 명의 행복한 삶이다. 그 자유롭고 행복한 삶이라는 국가의 존재 명분에서 제외될 수 있는 국민은 단 한 명도 없다. 그 어떠한 정권도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력을 국민을 억압하는 데 사용할 수 없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국가를 위해 기도한다는 말은 국민을 위해 기도한다는 말이다. 굳이 대통령, 정부 요직, 국회의원들과 한자리에 모여 그것도 대다수의 국민들은 경험해보지도 못했을만한 곳에서 기도해야할 필요가 없다.

 

애신아씨의 나라에서는 누가 살게 되었을까?

한걸음 더 들어가 보자. 과연 그들이 기도하는 나라에는 어떤 이들이 살고 있을까? 피부색이 다른 이들은 살고 있을까? 종교가 다른 이들은 살고 있을까? 생각이 다른 이들, 이념이 다른 이들, 지향이 다른 이들은 살고 있을까? 가난한 자들, 소외된 자들, 이런 이유 저런 이유로 소수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들은 그 나라에서 살 수 있을까?

“그건 왜 하는 거요? 조선을 구하는 거.”
“꼴은 이래도 500년을 이어져 온 나라요. 그 500년 동안 호란·왜란 많이도 겪었소. 그럴 때마다 누군가는 목숨을 걸고 지켜내지 않았겠소. 그런 조선이 평화롭게 찢어발겨지고 있소. 처음엔 청이, 다음엔 아라사가, 지금은 일본이, 이제 미국 군대까지 들어왔소. 나라꼴이 이런데 누군가는 싸워야 되지 않겠소?”
“그게 왜 당신인지 묻는 거요.”
“왜 나면 안 되는 거요.”
.....
“귀하가 구하려는 조선에는 누가 사는 거요? 백정은 살 수 있소? 노비는 살 수 있소?”
“.........”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중에서)

그들이 기도하는 이 나라는 모두의 힘으로 지켜온 나라이다. 국가를 위하여 기도하려고 모인 이들은 대답해야 한다. 그 나라에는 누가 살 수 있는지. 과연 그들은 누구를 위해 기도하고 있는지.

 

약자와 함께, 약자로서 존재하는 교회

교회는 약자를 ‘위하여’ 존재하지 않는다. 교회는 약자를 위하여 기도하는 존재가 아니다. 교회는 힘과 권력을 소유하고 그것을 사용하여 약자들을 돕는 존재가 아니다. 교회는 약자와 ‘함께’, 약자와 ‘더불어’ 이 생을 살아가는 존재이다. 교회는 약자 그자체로서 세상을 살아가는 존재이다. 그 속에서 하늘은 하늘의 힘을 사용한다.

예수께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메이저리그에 들어갈 수 없는 이들에게 열심히 노력하고 경쟁에서 승리하여 메이저리거가 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저 그들에게 너의 존재 자체가 메이저리거이니 행복하게 자유롭게 하나님과 함께 이웃과 더불어 너희의 삶을 살아가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 어떤 힘도 너희의 삶을 해치지 못하게 하라고 하셨다. 모두가 그렇게 귀한 사람으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라고 말씀하셨다.

만일 교회가 짠맛을 되찾고, 국가 존립의 근거를 회복하기 원하며, 예수의 말씀을 따르고자 한다면 기꺼이 약자 편에서 약자와 함께 서는 것이 우선일 것이다. 진정한 교회는 생김새, 성별, 장애 유무, 생각, 지향성, 이념, 피부색, 종교, 교육 정도, 부의 소유 정도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이도 빠짐없이 자신의 삶을 행복하게, 자유롭게, 오롯이, 자신의 삶을 모두,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국가, 모두가 살고 있고 모두를 살리는 정의로운 국가를 위해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