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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신학 1기/국가조찬기도회

황사영과 국가조찬기도회 / 한수현

황사영과 국가조찬기도회

- 한수현(감리교신학대학교)

 

왕의 왕인 예수

황사영이란 사람이 있었다. 1790년 16세의 나이에 진사시험에 합격하여 20세가 되면 출세길을 오르게 되어있었던 청년 황사영은 정약용의 조카사위가 되었을 때 그에게 천주교의 교리를 배우게 된다. 그리고 알렉시오(Alexio)란 세례명으로 천주교인이 되었다. 이후 1801년 신유박해 때 충북 제천의 토굴로 피신하던 중 당시 중국의 주교 구베아에게 편지를 보내려다 잡혀 처형당했다. 그 편지의 내용을 읽어본 당시 관리들은 아연실색하였는데, 조선정부가 천주교인들을 박해하여 순교가 곳곳에 일어나니 청나라 황제에게 말하여 조선을 중국으로 편입시키거나 서양의 군대를 보내어 침략해 줄 것을 부탁하는 내용이었다. 5~6만의 군사면 충분하다고 썼다고 하니 나름 주도면밀하게 고민한 흔적까지 보인다.

보통 황사영의 이런 생각을 울트라몬타니즘(Ultramontanism:교황제일주의)라고 부른다. 교황을 그 어떤 권위보다 높다고 생각하여 저지른 일이란 말이다. 그러나 달리 보면 교황이 당시 자신이 섬기던 왕보다 더 높은 왕이라고 생각했단 것 또한 다분히 왕권중심주의적 발상이라 볼 수 있다. 성서를 펼쳐보면, 예수를 ‘만왕의 왕, 만주의 주’(계 19:16; 17:14; 딤전 6:15)로 고백한다. 성서가 쓰여지던 당시 ‘주’라는 의미의 ‘큐리오스’는 일반적으로 상대를 높여 부르는 말이기도 했지만 당시의 로마의 황제를 부르던 말이었다. 모든 왕중의 왕이란 표현은 왕들이 다스리던 시대에는 예수가 모든 왕의 왕이라는 정치 사회적 표현으로 쉽게 이해될 수 있었을 것이다. 결국 기독교 신앙을 가지게 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섬긴다는 뜻이다. 조선의 왕이라 해도 예수의 뜻을 거스른다면 황사영은 그를 왕으로 섬기지 못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바로 왕의 왕인 예수를 진정한 왕으로 생각하고 편지를 썼을 것이다. 물론 어떤 이는 황사영의 선택을 개인의 종교적 자유를 국가 보다 우선시하는 근대적 사고로 평가하기도 한다. 더 나아가 개인의 자유가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한다는 근대적 인권이해의 좋은 예로 삼기도 한다.

여러 다양한 시각에서 황사영의 백서를 이해할 수 있겠지만, 필자가 관심있게 보는 것은 황사영이 자신과 다른 신도들에게 온 박해를 풀어내기 위해 찾아간 대상이 예수가 아니라 교황(또는 교종)이었다는 것이다. 아마도 어느 정도는 교황이 현실정치 안에서 예수의 결정을 대신한다는 신학적 이해와 교황의 권력에 대한 현실적 판단이 혼합된 선택이었을 것이다. 왕권 중심적 세계관 속에서 결국 예수는 멀고 교황과 가톨릭의 권력은 가깝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래서 황사영은 예수가 아니라 교황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 도움은 더욱 현실적이게도 자신이 속한 나라의 권력을 더 큰 권력으로 눌러 달라는 요구였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예수는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요 18:36)고 말했다. 중세적 세계관이 아니라 예수의 세계관으로 이해해 보면 예수가 다스리는 나라는 권력과 힘으로 지배하는 나라가 아니란 말일 것이다. 예수의 나라는 자비와 사랑, 그리고 깨달음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는 나라를 뜻한다. 그 나라의 왕이 예수 자신이란 뜻이다. 황사영은 아마 이 구절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예수의 나라를 찾지 않고 또 다른 권력에 기대려 했으니 말이다.

기도는 헬라어로 두 단어로 기록되었다. 데에시스(δέησις)와 프로슈케(προσευχή)이다(딤전 2:1). 프로슈케는 대표적으로 기도로 번역되는 헬라어 단어이고 데에시스는 때로는 ‘간구’ 또는 ‘기도’를 뜻하는 단어이다. 비슷한 의미이지만 굳이 차이를 논한다면 프로슈케는 언제나 하나님을 부르는 행위와 연관되지만, 데에시스는 간구, 즉 자신의 필요를 채우고자 하는 행위가 조금 더 강조된다. 그러므로 기도는 그 대상과 내용이란 두 요소가 존재한다 말할 수 있는데, 프로슈케는 그 대상, 데에시스는 그 내용에 중점을 둔다.

의미를 넓혀본다면 기독교의 신앙생활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간구, 또는 바라는 것의 핵심은 그 내용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황사영의 편지는 기도이며 그 대상은 황사영 자신을 지배하고 있는 현실 정치보다 더 큰 힘을 가지고 있는 교황이나 카톨릭의 교권이었다.

황사영은 박해를 통해 죽어가던 가족들과 친구들의 죽음에 분노해서 편지를 썼다. 그러나 지금 여기에는 신앙의 자유가 아니라 자신의 이익과 기득권을 위해 비슷한 행태를 저지르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조찬기도회이다. 조찬기도회가 과연 무엇을 하는 곳일까?

 

국가조찬기도회

지난 17일 국가조찬기도회가 열렸다. 국가조찬기도회의 내용은 다분히 대한민국이란 국가를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그 실질적인 내용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 뜻이 아니다. 해방이후 정치의 기득권을 누려 온 한국의 보수 기독교의 생명연장이다. 박정희 정권이 그 독재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했던 당시 한국 기독교의 지지는 당시 불길같이 일어나던 민주화 운동에 찬물을 끼얹었다. 기독교 교계의 유명 지도자들이 앞다투어 조찬기도회장에 달려가 박정희를 축복했다. 1966년 박정희의 참여로 시작된 조찬기도회의 역사는 우리에게 그 기도의 대상이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 박정희였음을 증언한다. 수많은 목회자들이 참석하여 기도한 대상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들에게 안전과 기득권을 줄 수 있는 권력자였던 것이다. 기도는 그 내용도 중요하지만 그 대상도 중요하다. 하나님에게 기도한다고 하지만 결국 바라는 것이 자신의 안위와 기득권이라면 입술로는 하나님을 떠들어도 그 마음은 권력자의 귀를 즐겁게 하는 일에 매달려 있는 것이다.

기도는 권력과 기득권을 탐하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깨닫고 세우는 일이다. 바로 스스로를 세우는 일이다. 내가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는 말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든 지혜로운 자들이 말한 진리이다. 나를 세우는 길이 신을 내 안에 들이는 길이다. 그것이 기도임을 예수는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함의 중요성을 통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