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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신학/기생충

"초대받지 않은 손님"과 "보이지 않는 사람들" / 박흥순

"초대받지 않은 손님"과 "보이지 않는 사람들"

- 박흥순(다문화평화교육연구소)

 

영화 <기생충>이 소환한 영화 <초대받지 않은 손님>

한국영화 100년을 기념하는 해에 봉준호 감독이 제작한 영화 <기생충(parasite)>이 칸 영화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한국사회에 평범한 일상이 영화를 통해서 전 지구적 관객과 소통할 뿐만 아니라 깊은 공명을 준다는 것이 놀랍다. 자본주의가 만들어 놓은 빈익빈 부익부, 계급 갈등 등 다양한 주제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영화 <기생충>은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다채로운 해석이 가능하다. 이 영화를 보면서 1967년에 상영한 영화 <초대받지 않은 손님(Guess who's coming to dinner)>이 떠올랐다. 시대를 뛰어넘어 지금까지 유효한 주제를 제시한 것이 놀랍다. 50년이 넘은 이 시대도 백인과 흑인이 혼인하는 것이 흔한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을 백인, 흑인, 황인처럼 피부색으로 분류하는 방식은 사람을 존재가 아닌 외모로 판단하고 평가하는 일이다. 인종중심주의(ethnicentrism)는 인종에 따른 편견과 차별이 폭력화될 가능성을 내포한다. 인종차별과 혐오가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한국사회는 인종 주제를 깊이 성찰할 때가 되었다. 인종 주제는 필수적으로 계급 주제와 겹쳐진다. 이와 같은 이유에서 영화 <기생충>을 보며 영화 <초대받지 않은 손님>을 떠올렸다.

영화 <기생충>은 가족 구성원이 4명으로 똑같은, 기택(송강호 분)네와 아이티(IT) 기업 씨이오(CEO) 박사장(이선균 분)네 가족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영화 전반부는 대체로 유머와 풍자와 해학이 장면 곳곳에 숨어 있다. 후반부로 갈수록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 불안하고 두려운 감정과 함께 극적 반전을 제시한다. 극적 반전이란 바로 ‘4년 6개월 17일’을 지하실에서 숨어 살고 있던 근세(박명훈 분)가 등장한 것이다. 전 가정부로 일했던 문광(이정은 분) 남편이 그토록 오랜 기간 지하실에서 숨어 살고 있는 모습에 모든 관객은 경악한다. 분명히 지하실에 ‘사람’이 살고 있었지만 박사장네 가족 중 아들 다솜(정현준 분)만이 유일하게 마주친다. ‘사람’을 사람으로 인식하지 않고, 귀신처럼 무서운 존재로 받아들인다. 근세는 사업 실패 후 세상과 단절하고 박사장네 지하실에서 평생을 지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기택네 가족 때문에 그 계획이 무산된다. 영화는 기택이 스스로 지하실에 찾아드는 것으로 결말을 맞는다. 지하실에서 이미 살아왔던 ‘사람’과 지하실로 다시 찾아든 ‘사람’이란 묘사는 한국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수많은 주제를 내포한다. 사회와 공동체 삶의 자리에서 점점 밀려나 주변부와 변두리로 내몰리는 사람들에 대한 절규와 외침이다.

영화 <기생충>이 계급 주제를 깊이 성찰하도록 한국사회와 한국교회를 초대한다. 영화 안에 내포되어 있는 수없이 많은 메타포(metaphor)를 여기에서 다 언급할 수도 없고 언급할 필요도 없다. 계급 주제와 관련해서 “보이지 않는 사람들(invisible people)”과 “숨겨진 사람들(the hidden people)”에 주목하게 되고 급기야 관심과 시야에서 완전히 벗어난 “배제되고 버려진 사람들(excluded people)”을 소환한다. 지역사회와 지역교회가 위치한 지역과 마을에 수없이 다양한 사람들이 살아왔고 또한 살아간다. 사람과 사람이 살아가는 공간과 시간은 자신이 서 있는 위치(position)와 바라보는 태도(stance)에 따라 전혀 다르게 보인다. 상류층에 있는 사람들을 중산층이나 하류층에 있는 사람들이 만날 수 없는 것과 같다. 자신이 처해 있는 위치와 태도는 계층이나 계급이라고 불리는 계단과 사다리가 존재한다. 버젓이 살아있지만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이 한국사회 도처에 있다. 지금 눈앞에서 볼 수 없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닌데 ‘없는 사람 취급을 당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성서 속으로 -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

누가복음 저자는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눅 16:19-31)를 전해준다. 이 이야기는 놀랍게 영화 <기생충>과 겹쳐진다. 등장인물은 부자와 나사로 그리고 아브라함이 전부다. 이 이야기 주인공은 당연히 ‘부자’다. 그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던 사람’이다. 좋은 옷과 기름진 음식을 먹고 마시며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며 살았던 부자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음부(지옥)에서 고통’을 당해야 하냐며 항변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부자는 거지 나사로에서 잘못을 저지른 것이 없다. 부자가 나사로에게 ‘무엇을 한 잘못’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하지 않은 잘못’을 지적한 것이다. 거지 나사로는 부스럼이나 상처가 나서 살갗이 헐어 상처가 난 ‘헌데 투성이’로 부자 대문 앞에 버려져 있었고,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배를 채웠다. 기생충을 의미하는 영어 표현은 ‘파라사이트(parasite)’로 그리스어 어원은 ‘파라(para, 곁에서)’와 ‘시토스(sitos, 음식)’가 합쳐진 단어다. 문자적 의미는 ‘다른 사람 식탁 곁에서 먹는 사람’이다. 나사로는 부자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허기를 채우며 ‘기생’하며 살았던 사람이 분명하다. 부자가 나사로에서 무슨 잘못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것이 잘못이다. 부자는 나사로를 ‘존재하지만 없는 사람 취급’을 했다. 분명히 나사로는 부잣집 대문 앞에 버려진 존재이며 상처투성이와 배고픔에 시달리며 곁에서 살았던 ‘사람’이었다. 성서는 분명히 말한다. 누군가에서 악행을 저지른 것처럼, 누군가에게 반드시 ‘해야 할 일, 즉 환대’를 베풀지 않은 것이 동일한 죄악이라고 말이다.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나사로’가 아니라 ‘부자’가 주인공이란 사실을 떠올린다. 누가복음 저자는 왜 이 이야기를 누가공동체에게 전해 준 것인가? 누가복음 저자가 전해 준 이 이야기는 ‘지금 여기에서(here and now)’ 살고 있는 한국교회와 성도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싶은 것일까?

난민 신청을 위해서 인천국제공항 환승구역에서 7개월째 체류 중인 앙골라인 루렌도 응쿠카씨 가족이 우리 곁에 머물고 있다. 삼성 노조설립위원장 활동으로 1995년에 부당해고를 당했다고 주장하는 김용희 씨가 강남역 사거리 교통회로 고공 철탑에 오른 지 40일이 지났다. 스스로 자유롭게 밖을 나설 수 없는 독거노인과 장애인도 분명히 지역사회와 지역교회에 거주한다. 무더위와 열대야 속에서 숨을 헐떡이며 쪽방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 삶에 대한 의욕과 희망을 잃고 절망과 좌절이라는 주변부에서 머물고 노숙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람이지만 노동력이나 저출생을 해결할 존재로 취급받는 이주한 사람들도 함께 살고 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찾아 나서면 우리사회 곳곳에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살아왔고, 살고 있다. 더 충격적인 것은 주변에서 또 다른 주변으로, 변두리에서 또 다른 변두리로 계속해서 밀려난 사람들이 당연한 듯 자포자기하며 그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마치 박사장네 지하실에서 4년 6개월이 넘도록 사는 것을 감사하듯 살아내는 근세와 문광 부부처럼 말이다. 지역사회와 지역교회는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사람들’과 ‘숨겨져 배제된 사람들’을 의도적으로 혹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무시하거나 없는 사람 취급을 한다. 영화 <기생충>과 놀랍게 겹쳐져 읽는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를 통해서 한국교회와 성도들 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목하길 바란다.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사람들’, ‘없는 존재로 취급받는 사람들’, ‘배제되고 버려진 사람들’을 찾아 나서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