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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신학 1기/기생충

영화 <기생충>: 냄새의 아비투스와 감각적인 것의 나눔 / 최병학

영화 <기생충>: 냄새의 아비투스와 감각적인 것의 나눔

- 최병학(부산 NCC)

 

* 아비투스(Habitus)는 프랑스의 사회학자 부르디외(Pierre Bourdieu)가 만든 개념이다. '일정하게 구조화된 개인의 성향체계'를 뜻한다. 곧, 개인 안에 내면화된 사회구조라고 할 수 있다.

<하녀>와 <천국과 지옥>의 오마주

세상의 모든 차별을 영상 이미지로 창조하는 사회학과 출신 봉준호 감독의 영화 <살인의 추억>(2003)이 국가의 차별이라면, <괴물>(2006)은 미국의 차별이고, <마더>(2009)가 모성의 차별이라면, <옥자>(2017)는 동물에 대한 차별이다. 그리고 <설국열차>(2013)가 수평적인 차별이라면, <기생충>(2019)은 수직적인 차별에 관한 영화이다. 거기에 ‘냄새라는 아비투스’를 사용하여, 전작들보다 좀 더 상징이 풍성해졌음을 볼 수 있다. 다만, 전작들에 나타나는 휴머니즘을 기반으로 한 따스함 대신, 차가운 현실주의자의 냉소적인 시선으로 영화를 이끌어 가나(물론, 코믹적 요소를 빠뜨리지 않는다), 갈수록 양극화 되는 우리 사회에 대한 분노로 읽게 되면, 이해가 가능할 것이다.

영화는 시퀀스(sequence)가 변할 때 마다 ‘시의적절한’ 상징을 넣어주고, 공간의 변화(반지하와 높은 곳 박사장 댁, 1층, 2층, 지하, 거실, 산, 다시 반지하)를 통해 친절하게 희화화된 대한민국의 현실을 꼬집는데, 각 씬(scene)마다 봉준호의 디테일은 기막히게 살아 있다. 악마가 아니라, 의미가 디테일에 숨어 있는 것이다. 결국 영화는 4년 3개월간 ‘박’사장이 지배했던 우울한 한국 사회를 축약해서 보여준 것이다.

 

냄새의 아비투스

봉준호 감독의 로즈버드(rosebud, 영화의 핵심 사물)는 단순하다. ‘비’와 ‘(동)굴’이 꼭 나온다. <살인의 추억>에서 <괴물>, <마더>에 이르기까지! 비와 굴, 곧 ‘비굴한 한국인의 초상’을 봉준호 감독만큼 잘 드러내는 감독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후 <설국열차>와 <옥자>를 통해서는 한국인의 비굴함이 ‘세계인의 비굴함’으로 확장되었고, 이제 ‘보편적 비굴함’의 한계에서, 다시 <기생충>(2019)으로 새로운 로즈버드를 추가한다. 그것은 곧, ‘냄새의 아비투스’이다.

박 사장(이선균 분)과 그의 부인 연교(조여정 분)는 기사인 기택(송강호 분)과 기택의 가족에게서 나는 냄새를 맡는다. 박 사장의 말대로, “노인 냄새도 아니고, 오래된 무말랭이? 행주 삶을 때 나는 냄새, 지하철 타면 나는 냄새 말이야.” 그런데 이 냄새가 선을 넘는다. “김 기사가 선을 넘을 듯 말듯하며 선을 안 넘어. 그런데 냄새가 선을 넘어!”

퇴근길 만원 버스 안이나, 심야의 지하철 안에서는 온갖 냄새가 다 난다. 견디기 힘든 우리네 아버지들의 노동에 찌든 땀 냄새와 하루하루 버텨나가는 사람들의 술 취한 입 냄새, 경쟁에 짓눌린 학생들의 욕구불만의 냄새 등. 봉준호 감독은 영화 간담회에서 이런 말을 했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은 서로 냄새를 맡을 기회가 없다. 동선이 다르기 때문이다. 비행기만 해도 퍼스트와 이코노미로 나뉜다. 가정교사(운전기사, 가사도우미-필자 첨가) 등 이 영화에 나오는 상황이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이 서로 냄새를 맡을 수 있는 유일한 상황이다.”

특목고를 통해 아이들도 자본의 힘으로 서로의 냄새를 맡을 수 없도록 만든 우리 사는 세상에 냄새의 아비투스는 더욱 강화되어진다(물론, 지금 특목고 폐지로 가는 것은 올바른 정책이다). 아무튼 지하철을 타면 나는 냄새, 곧 대다수 한국인들의 냄새인 그 냄새에 박 사장 부부는 불쾌감을 느끼고, 멸시한다. 왜냐하면 성향체계, 곧 아비투스가 다르기 때문이다.

 

감각적인 것의 나눔

영화는 아들 기우(최우식 분)로부터 딸 기정(박소담 분), 아버지 기택과 어머니 충숙(장혜진 분)까지 갑인 박 사장 댁에 계획적으로 기생하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거기에는 이미 기생하고 있는 가정부(이정은 분) 부부가 있다. 이들의 싸움(을들의 싸움)이 갑을 향하며 영화가 끝나는 듯하다, 그저 판타지로 소멸된다. 따라서 영화에 나타나는 기택네와 가정부 부부의 싸움은 수직 폭력과 달리 수평적 폭력을 고민하게 한다. 왜 을들은 서로 싸울까? 탈식민지 이론가인 의사 파농은 수평적 폭력의 원인을 프랑스인들이 알제리인들에게 가하는 수직폭력 때문인 것으로 파악한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파농은 유럽의 백인들을 향해 ‘폭력 항쟁’의 기치를 드높인다. 수평폭력의 원인인 제국주의의 수직폭력을 제거해야 수평폭력이 해결되기 때문이다. 기택이, 냄새 때문에 가정부의 남편 시신에서 고개를 돌린 박 사장을 칼로 찔러 죽였듯이, 이제 을들은 을들끼리 싸우는 것이 아니라, 수직폭력을 제거해야 한다는 말인가? 갑을 향하여 일어나야한다는 것일까?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J. Ranciere)는 『감성의 분할: 미학과 정치』(도서출판비(B), 2008)에서 민주주의와 평등 개념을 둘러싼 ‘정치’의 개념을 재해석하고 있다. 가령 ‘치안’(la police)과 ‘정치’(la politique)를 구분하며 치안은 기존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것에 목표를 두고, 이해가 상충하는 개인, 집단 사이의 조정을 통해 합의를 끌어내는 것으로 이는 진정한 의미에서 정치는 아니다. 반면, 랑시에르가 말하는 정치는 배제된 자들의 ‘주체화’ 즉 지배질서 안에서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았던 배제된 자신들의 목소리와 존재를 보이게 하고 들리게 하는 것이다. 곧 정치적 대화와 권력의 행사에서 정당한 상대자(파트너)로 세우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감성의 분할’(‘감성/le sensible’보다는 ‘감각적인 것’으로, ‘분할/le partage’보다는 ‘나눔/share’의 의미로 받아들여야 불어의 원 뜻에 더 가깝다)이란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것’이 분할되어 배제되는 것을 말한다. 수도 서울의 재개발로 인한 뉴타운(및 타워 팰리스) 문제는 바로 이러한 측면이다. 그것은 뉴타운(및 타워 팰리스)에 입주하지 못한 이들을 비존재로 전락시키는 것이며 대형들이 누리는 정치권력, 시장의 자유, 종교 권력에 ‘분할’, 곧 양질의 삶을 나눠 갖지 못하는, 말 그대로 감성의 분할이 제대로 되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랑시에르에 의하면 미학과 정치는 이러한 비존재로의 배제를 뚫고 일어서서 자신의 언어를 되찾고 보이는 자리에 서는 것이다. 자기 몫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각자의 몫을 주장할 때, 즉 기존의 감각적인 것의 나눔을 뒤흔들어 배제된 자들이 더 많은 몫을, 더 많이 공유하려고 할 때 비로소 정치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예수는 감각적인 것인 보고, 듣고, 맛보고, 느끼는 것을 배제당한 이들에게 다가가 새 세상을 ‘보여주고’, 하나님의 복음을 ‘들려주고’, 생명의 떡을 ‘맛보게 하며’ 사랑의 연대를 ‘느끼게’ 해주었다. 예수의 정치, 곧 하나님 나라의 진정한 정치가 자본주의의 치안을 넘어 제국의 평화를 넘어 시작된 것이다. 영화 <기생충>은 안타깝게도 하나님 나라를 판타지로 보여주며, 다음을 약속한다. 봉준호 감독의 차기작이 기대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