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충>의 허무함 앞에서
- 이종건(옥바라지선교센터 사무국장)
얼마 전 70년대 서울 청계천에서 빈민사목을 하고 빈곤현장의 사진을 담아 '노무라 리포트'를 출판했던 노무라 모토유키 목사가 서울에 방문했다. 그가 빈민사목을 하던 시절, 서울의 빈곤은 집약적이고 노골적이었다. 청계천 일대는 판자촌이 즐비했고 그보다 못한 땅굴 수준의 거주공간인 개미집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2019년 현재 재개발이 진행되고 있는 청계천-을지로 일대를 방문한 노무라 목사는 서울의 발전된 모습에 짐짓 놀란 모습이었다. 과거 명백하게 드러났던 절대빈곤의 현장들에는 높은 빌딩과 세련된 건물이 들어서 예전의 흔적은 찾아볼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눈에 보이는 빈곤, 한 동네에 집약적으로 모여 있어 집단행동이 용이하고 가시화되기 쉬웠던 빈곤의 현장들은 결국 대규모 도시개발들의 거듭된 진행으로 대부분이 사라졌다. 철거민들은 지방으로 흩어지거나 현재의 쪽방, 반지하, 옥탑, 고시원 등 주거기준에 미달하는 보이지 않는 공간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최근 황금종려상 수상에 이어 누적 관객수 천만을 돌파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화제다. 빈곤을 다룬 영화로 이정도의 상업적 성공을 이루고, 평론가들로 하여금 갑론을박 뜨거운 논쟁거리를 낳는 경우는 처음이라 해도 좋을 것 같다. 봉준호는 기생충을 통해서 빈곤을 달래려 하지도 않고, 뚜렷한 희망을 남기지도 않았다. 여운이라고 해도 좋을 그 먹먹함이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가 끝나고 스크린 앞을 경쾌하게 떠나지 못하도록 만든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명확히 존재하는 빈곤은, 스크린을 빌려 대중 앞에 2시간 동안 잠시 모습을 드러냈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집으로 돌아가 텔레비전을 켜고, 핸드폰을 열어 SNS을 들여다보면 소득 3만불에 인구 5천만이 넘는 국가들만이 가입할 수 있다는 3050클럽에 한국이 세계에서 7번째로 가입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하지만 삼성은 세계에서 가장 잘나가는 기업 중 하나로 손에 꼽는다는데 그 잘나가는 기업이 오십일이 넘도록 단식하며 고공농성하고 있는 해고노동자 김용희씨의 절박한 사정 하나 해결하려 하지 않는다. 2015년 기준, 한국의 비어있는 집이 107만호라는데 누군가는 반지하에 살고 대체 누가 들어가 사는지 알 수 없는 몇 억에서 몇 십억 까지 나가는 고층 아파트와 고급상가들이 하루가 멀다 않고 비좁은 서울 시내에 들어서고 있다. 기생충에서 지하, 반지하, 저택의 계단을 대비해서 보여주는 것처럼 한국 사회의 보통의 삶과 그렇지 않은 삶의 괴리 또한 드라마틱하게 펼쳐지고 있다.
문제는 빈곤이 가리어져 있다는 사실에서부터 출발한다. 반지하 기택네 삶은 양복하나 걸쳐 입고 말투 하나 바꿔 남궁현자가 디자인한 대형 저택에 살고 있는 부유한 박사장의 집으로 편입된다. 4수생 큰아들은 연세대학교에 다니고 있는 능숙한 과외강사가 되고 미대입시 준비하는 딸은 미술심리치료를 공부하는 미국 유학생 역할을 훌륭하게 소화한다. 백수였던 아빠 기택은 사장의 전속기사가 되어 그 가족을 가까이서 모시고 상스런 욕을 거침없이 구사하던 엄마 충숙은 세련된 가정부로 한우 채끝살이 들어간 짜파구리를 끓여 낸다. 왕년에 한창 붐을 타고 대왕카스테라 가게를 운영했던 이들이 지하로 내몰릴 수밖에 없었던 하층민의 경제적 상황과 부유한 계층의 안정적, 이상적 삶에 기생하는 ‘기생충’ 가족의 불안한 외줄타기의 삶은 도시에서 빈곤이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는지를 냉소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기택 가족의 불안한 기생의 삶은 위기가 점점 고조되며 파국으로 끝난다. 그 파국의 주요 원인, 감출래야 감출 수 없는 계급의 표징은 냄새로 그려진다. 영화 전반을 흐르는 키워드인 냄새는 처음에 ‘반지하 냄새’로 명명된다. 기택 가족의 냄새다. 세제를 들이 부어도 뺄 수 없는 냄새로 결코 넘을 수 없는 계급의 아득한 거리를 상징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부유한 집에 기생하기 위해 어떤 역할들을 흉내 내고 있는 똑똑한 네 명이 어리숙하게 그려지고 있는 부유한 박사장 가족의 눈과 머리를 속이더라도 도무지 속일 수 없는 후각으로 계급의 영역이 드러난 것이다. 냄새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두 가지 갈래로 확장된다. ‘지하 사람의 냄새’와 ‘지하철 타는 사람 특유의 냄새’다. 대왕카스테라 집이 망해 빚더미에 올라 빚쟁이들에게 쫓겨 저택 지하에 숨어 몇 년간 연명하고 있는 ‘근세’의 냄새, 박사장이 도무지 알 수 없는 냄새라며 ‘지하철 타는 사람들에게서 나는 특유의 냄새’라 명명한 것은 지하의 삶과 반지하의 삶, 지하철을 타야 하는 모든 보통의 삶을 하나로 묶어 낸다.
결국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기택은 피가 난무하는 파티장에서 칼을 들어 박사장의 심장을 찌르고 지하로 숨는다. 아버지가 지하에 숨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아들은 돈을 벌어 저택을 통째로 사들여 아버지와 재회하는 꿈을 꾼다. 개인적 복수를 행하고 개인적 구제를 꿈꾸는 두 ‘개인’의 모습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개인 신화를 내재화하는 주인공들의 결말이 결국 비극으로 끝날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신화가 박살나버린 사회에서 건물주를 꿈꾸는 우리 각 개인들의 서사가 기택의 살인과 아들 기우의 허황된 꿈과 만나더니 허무함을 낳았다. 스크린의 끝에서 우리는 감히 기생충을 두고 마음 편히 ‘좋은 영화’라고 말할 수 없었다.
누군가는 촌스럽다고 말하는 ‘빈곤해방’의 구호는 우리 모두가 기생충 앞에서 경험한 ‘허무함’의 한 가운데서 다시금 생동해야 한다. 부유와 빈곤을 개인 서사의 몫으로 남기려하는 신자유주의의 집요한 공격에 반격할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은 빈곤한 사회, 보통의 삶들이 공동으로 경험한 허무에 있다. 우리는 기생충을 보고 각자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나는 도무지 맡을 수 없는 ‘지하철 타는 사람 특유의 냄새’가 가득했을지 모르겠다. 그 냄새를 맡지 못하는 우리는 더 가까이에 붙어 가난에 대한 공동의 이야기를 시작해야 한다.
작년 5월, 레일라니 파르하 유엔 주거권 특별보고관이 한국에 공식방문했다. 그는 쪽방, 고시원, 철거지역 등 취약계층 거주지역을 돌아보고 이렇게 말하며 정부에 대한 최종권고안을 발표한다.
“한국 시민들은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주거권을 주장할 수 있다는 인식조차 없다는 것을 느꼈다”
신자유주의가 파편화 시킨 개인의 자리에서 각자의 빈곤을 공동의 의제로 풀어내는 것은 쉬운 과제라 할 수 없다. 그렇게 단순하지도 않다. 엄연히 존재하는 쪽방과 홈리스, 철거민 앞에 기생충을 통해 봉준호가 빈곤을 다루는 방식은 무례하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보통의 삶이 위기에 직면하고 모두가 상대적 빈곤이라는 박탈감에 허덕이는 지금, 가난을 다루는 한 편의 영화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의의로 쉴 새 없이 돌아가는 거대한 도시 속, 지워지거나 애써 감추었던 이야기의 시작 정도는 던져졌다고 생각한다. 기생충의 허무함 앞에서, 보통의 삶과 지워져 보이지 않았던 지하의 삶, 그 모든 절박함과 불안함을 이야기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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