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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신학 1기/조국사태;가짜뉴스VS진짜뉴스? "의도없는 사실은 없다"

[취지문] <조국대전> : 의도 없는 사실은 없다.

 

양권석(성공회대학교)

 

식민주의와 정복은 성서적인가? 그렇다. 콜롬버스를 포함한 수많은 정복자와 식민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성서적 명령을 따라서 그렇게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전쟁을 일으키며 정복을 탐하는 자들 곁에는 항상 성서가 있었다. 식민주의와 억압에 대한 저항은 성서적인가? 그렇다. 참혹한 억압과 고통 속에서, 구원과 해방의 희망을 잃지 않고, 견디고 싸우며 새날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민중에게 힘을 불어넣었던 것이 성서였으니까.

 

정복도 성서적이고 해방도 성서적이다. 불편하지만 진실이다. 이것이 불편하다면, 사실과 텍스트의 속성을 잘 모르는 탓일 것이다. 사실을 날 것 그대로 보고 전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사실을 날 것 그대로 전할 가능성은 없다. 나무 한 그루에 대한 사실을 생각해보자. 그 나무를 있던 자리에서 뽑아서, 실험실로 옮겨 놓고, 온갖 과학적 장치로 측정하여, 나무에 관한 사실은 이것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이 날 것의 사실인가? 그것은 죽은 나무에 관한 사실은 될 수 있어도, 살아 있는 나무에 관한 사실은 아니다. 그렇게 ‘사실’은 누구도 다 안다고 쉽게 말할 수 없는 그 무엇이다.

 

 

조금 더 유식하게 말하면, 사실은 언어적으로 맥락화된 관계 속에서만 파악된다. 쉽게 말하면, 말하는 자의 언어와 삶과 해석을 통해서 우리에게 오는 것이지, 날 것 그대로 오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가 맨눈으로 사건을 보고 증언할 때도 다르지 않다.

 

사실이란 것이 누군가의 입술을 통해서 전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그 전하는 자의 입장(서 있는 자리)과 의도를 배제하고 사실을 말하는 것은 사실에 대한 왜곡이거나 사실 만들기다. 사실을 제대로 말하려면, 내가 이 나무를 가지고 책상을 몇 개나 만들 수 있을지 알아보려고 실험실로 나무를 죽여서 옮겨 놓고 보니, 나무에 관한 사실은 이러이러했다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 또는 내가 올 가을에도 그 나무에서 수확하게 될 많은 열매를 생각하니, 나무에 관한 사실은 이러이러하다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

 

말하는 자의 입장과 의도가 사라진 사실은 그 자체가 이미 진실을 가리는 우상이고 거짓이다. 그래서 불의한 권력은 언제나 전하는 자의 의도와 관계없는 사실을 만들고 싶어 한다. ‘사실’과 ‘사실을 전하는 자의 입장과 의도’를 분리함으로써, 조작된 사실을 통해 헤게모니를 쥐고 지배하고 싶은 것이다.



지난 몇 개월 동안 우리가 보았던 것이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국민 알기를 얼마든지 조작가능한 감각적 대중으로 보고, 국민이 뽑은 대표권마저도 언제든지 무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 사회의 흔들리지 않는 기득권. 그들이 보여준 가장 비열한 사기행각은 검찰개혁과 조국에 관한 사실을 분리하려는 태도였다. 내가 참고 듣기 제일 힘들었던 말은 “검찰 개혁을 원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나, 하지만 조국은 나쁜 놈이 명백하다”는 빈정거림이었다. 조국이 좋은 놈이었는데 당신들이 오해했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검찰개혁에 관한 당신들의 입장을 ‘조국에 관한 사실 만들기’로 풀어내고 있는 그 행태가 싫다는 것이다.

 

언론과 검찰이 개혁을 요청하는 목소리에 귀를 열고 자신을 낮추어 외부로부터의 도전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태도를 보이지 않는 한, 그들이 말하는 사실은 최소한의 진실성도 담기 어려울 것이다. 텍스트의 양면성과 사실의 불가능성에 대해서 이야기했다고 해서, 어차피 진실은 없다고 외치면서 진실을 향한 집념을 포기해 버린 탈근대적 광기에 휩쓸린 자라고 보지 않기를 바란다. 신학적으로 말하면 진실의 추구는 자신이 알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다른 목소리들을 향한 개방성이 없으면 불가능한 것이고, 그 개방성은 새롭게 들리는 목소리를 향해 스스로를 낮출 줄 아는 겸손함을 포함하는 것이다. ‘메타노이아’와 ‘케노시스’라고 할 것이다.

 

진실은 내가 끝내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자신의 울타리를 무너뜨리고, 지금까지 듣지 못하던 목소리를 향해서 귀를 열고,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가면서, 진실의 깊이와 넓이를 더해가는 과정이다. 그래서 진실을 향한 길은 아픈 고행의 과정이고, 우리가 아는 진실은 그 고행의 총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진실을 향한 집념이 사라진 시대에, 사실 만들기는 유행한다.

“진실이 어디 있나... 내가 너희들이 원하는 것을 만들어 줄 수 있어...”

이것이 이 시대의 언론과 검찰의 태도라면 그들은 거짓 예언자와 판관이기를 넘어서, 신자들에게는 구도의 길을, 보통의 사람들에게는 최소한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인간됨의 길을 가로막고 서는 마구니의 현신이다.

 

이 아름다운 계절, 10월의 사건과 신학은 계절의 화려한 색깔과는 달리 다소 무거운 주제라고 할 수 있는 언론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다. 두 분의 전현직 언론인, 한 분의 언론학자, 그리고 두 분의 신학자가 필자로 참여하였다. 지난 몇 개월 간의 정국과 언론의 보도 행태를 보면서 가졌던 생각들을 전하고 있다. 독자들도 각기 다른 의견들을 가지고 있을 터이지만, 필자들이 전하는 새로운 목소리와 시각을 통해서 생각을 다시 한 번 가다듬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