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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신학 1기/청년(靑年), 그들의 세상을 말하다 - 2019년

페미니즘이라는 이름으로 / 도라희년

 

도라희년(믿는페미)

 

<페미니즘의 쓸모 여부는 누가 결정하는가>

 

11월의 마지막 주일, 어느 때보다 은혜와 기쁨이 충만한 예배를 드렸다. 집에 가는 발걸음이 감사로 넘쳐나는 그 때, 동료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불법촬영유포 피해 협박을 받던 한 여자 연예인이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이었다. 한참을 멍하게 있었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고, 우울함과 무기력함이 동시에 찾아왔다. 숨을 고른 후, 인터넷 기사를 찾아봤다. 그를 애도하는 글만큼 많이 보인 댓글은 불법촬영피해영상을 ‘유작’이라고 소비하며 죽음을 조롱하는 글, 윤리적인 잣대로 자살의 타당성을 논하는 글, 그의 죽음에 대한 개인적/사회적인 원인을 분석하는 글이었다. 젠더폭력의 최전방에 노출돼 있는 연예인들의 생명과 죽음은 언제나 사람들의 ‘논쟁거리’로 쉽게 타자화 된다. 여자가 죽어가는데도, 그래서 죽이지 말라는 페미니즘의 외침은 언제나 공허하게 흩어졌다. 역설적이게도 피해여성이 죽은 다음 날은 “여성폭력추방주간”의 시작이었다.



페미니즘은 언제나 쓸모를 요구받는다. 쓸모를 증명받지 못하면 페미니즘의 목소리는 짓밟힌다. 왜 하필 페미니즘이어야 하는지 본인들을 이해시키라는 사람치곤 정작 페미니즘을 잘 이해하려고 하는 이들은 거의 없다. 그들의 목적은 페미니즘에 대한 진솔한 앎이 아니라 페미니즘이란 이름을 그들의 언어로 바꾸는데 있다. “페미니즘이 아니라 ‘휴머니즘’으로 해야지.” “과격한 페미니즘 말고, ‘건강한’ 페미니즘 해야지.” “성평등이 아니라 ‘양성평등’이라고 해야지.” “성평등 말고 성평화 어때?” “젠더는 동성애 옹호하는 단어니까 쓰지 말자” “성폭력 말고 괴롭힘, 몹쓸 짓 정도로 에둘러 표현하는 것이 덜 자극적이야.”

 

언어는 결코 가치중립적이지 않다. 그렇기에 어떤 사건과 존재를 명명할 수 있는 힘은 불평등하게 분배돼 있다. 페미니즘도 인권의 문제이기에 휴머니즘이라고 부르자는 논리는 허술하기 그지없다. 인권 측면에서 본다면 세상에 하나뿐인 목소리로 다양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아낼 수 없다. 그렇기에 다채롭고 복잡한 존재의 목소리들을 생략하거나, 가진 자의 언어로 범주화하여 납작하게 만드는 것은 폭력이다. 그런 의미에서 페미니즘을 휴머니즘으로 바꾼다는 것은 ‘인권’ 이라는 허울 좋은 명목 하에 여성(화 된 존재)의 다양한 삶의 맥락과 목소리를 지우고 ‘남성’들의 언어로 그 의미를 바꾸겠다는 의지를 보여줄 뿐이다. 페미니즘의 쓸모 여부는 ‘남성’들이 정하는 것이 아니다. ‘묻지마 살인’이 아니라 ‘여성혐오에 기반한 범죄’라는, ‘야동’이 아니라 ‘불법촬영물’이라는, 성폭력범죄자가 초범이고 깊이 반성하는 점을 참작하여 ‘집행유예’를 선고하면 안 된다는 인식이 당연해질 때까지 페미니즘은 ‘페미니즘’ 이란 이름으로 남아야한다. 여전히 우리에겐 페미니즘이 필요하다.

 

<‘모두’를 위한 것은 ‘누구를’ 위한 것이 될 수 없다>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평화교회 교육교재 만들기를 위한 워크샵에 참여하고 있다. 가족이데올로기, 전쟁, 성폭력, 노동, 존중, 경계, 동의, 차별 등의 주제 중 구성원들이 각자 하나의 주제를 맡아 교재 초안을 만드는 작업 중에 있다. 나는 ‘성폭력’ 주제를 맡았는데, 이 주제로 청소년들에게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할지 고민이 많았다. ‘모두에게’ 말을 걸고 싶다보니 정작 다루어야 할 핵심내용이 흐려지는 느낌이 들었다. ‘너무 세게 말하면, 현실을 직시하면 부담스럽겠지?’ 그렇게 비껴가고 싶은 유혹에서 갈등할 때 진행자가 이렇게 말했다. “모두를 위한 교육은 누구를 위한 교육이 아닙니다. 우리 ‘한 사람’을 위한 교재를 만들어 봅시다.”

 

‘모두’에 포함되지 못해 경계 밖에 머무는 이들이 있다. 사회가 규정한 제도와 법칙에서 ‘정상’으로 소환된 이들만 들어갈 수 있는 ‘모두’의 범주. 그렇기에 ‘모두’를 위한 것은 사실상 경계 안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경계 밖으로 추방된 이들의 삶은 언제나 생략되거나, 왜곡되거나, ‘예외’로 치부됐다. 나에게 있어서 페미니즘이란 모두가 아닌, 그 ‘누구’에게 시선을 머물게 한 인식론적인 틀이었고, 들리지 않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파편화 된 삶의 조각들을 찾아가는 여정에 나를 초대해 주었다. 그래서일까? 성서 내에서 유일하게 군림한 하나의 목소리에 묻힌 ‘다른 목소리’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 ‘다른 목소리’는 교회에서 익숙하게 선포되는 말씀 해석과는 너무 달랐다.



흔히 요한복음 8장 1-11절의 말씀은 “간음한 여인이 용서받다”라는 주제로 소개되지만 정작 여인의 목소리는 생략돼 있다. 간음한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성전에 끌고 온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를 시험하기위해 여인의 ‘간음’ 죄명을 이용한다. 이 구절을 적극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은 간음한 남성은 어디에 있는지, 왜 이 여성 혼자만 끌려왔는지 묻는다. 그러나 나는 ‘간음’ 자체에 대해 묻고 싶다. 그렇다면 간음이라는 단어는 누구의 입장에서 서술될 때 유리한 단어인가? 간음이라는 말이 통용되는 전제 조건은 ‘상호평등한 위치와 관계’이다. 당시에 여성은 남성의 소유물로 인식됐다. 여성과 남성 사이에 위계관계가 형성돼 있었기에, 이 여성의 경험을 서술할 때 간음이라는 단어의 사용은 적절치 않다. 결코 여인은 ‘간음’이라는 단어로 자신의 삶을 온전히 설명할 수 없다. 사용할 수 있는 언어가 부재할수록 삶의 의미는 더욱더 납작해진다. 어쩌면 ‘간음’이 아니라 동의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루어진 성폭력은 아니었을까? 마치 지금 현실에서 성폭력을 ‘상호간의 합의된 행동’으로 명명하는 가해자의 언어로 인해 피해자의 목소리가 납작해진 것처럼 말이다.

 

언제나 다른 목소리는 하나의 목소리를 위협하는 부정한 존재로 그려져 왔다. 우리는 모두의 목소리에서 벗어나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 두려움이 ‘누구의’ 목소리와의 생생한 만남을 가로막는다. 다른 목소리는 알고 싶지 않았던 것을 알게 한다. 현재의 안일함에 머물지 말고 변화를 받아들이라고 요청한다. 기존의 선입견에서 벗어나 상황을 제대로 보라고, 새로운 방식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라고 촉구한다. 이것은 여러 위협들 중에서 가장 두려운 위협이다. 새롭게 알아가고 이를 받아들이는 과정은 상처받는 과정이다. 상처에 직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페미니즘을 알아가는 것은 지속적인 상처와 아픔에 노출되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를 위한 것은 누구를 위한 것이 될 수 없다는 걸 알게 된 이상 페미니즘을 몰랐던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고, 돌아가지도 않을 것이다. 나의 삶이 ‘모두’의 언어로 납작하게 해석되는 것을 거부하며, 단 ‘한 사람’ 내 경험을 서술할 ‘나’의 언어를 하나씩 회복하고 찾아가는 과정을 응원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