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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신학 1기/청년(靑年), 그들의 세상을 말하다 - 2019년

<취지문> 감히 어떻게 / 양권석

 

 

양권석(성공회대학교)

 

이 달의 사건과 신학은 따로 주제를 정하기 보다는, 청년세대를 대표하는 여덟 사람의 글을 모아 보았다. 주제는 여덟 명이 모두 제 각각이다.

 

미래의 소득에 대한 기대와 희망은 점점 더 어두워만 가는데, 학자금과 주거비용으로 무거운 부채를 안고 시작하는 청년들의 사회 생활에 ‘희년’이 필요하다는 외침이 있는가 하면, 청년 실업의 문제가 비민주적이고 위계적인 직장문화와 관련되어 있음을 고발하면서, 사업장의 민주화 없이는 청년실업을 해결할 방법이 없다는 주장도 있다.

 

청년이 바라보는 정치 이야기도 있다. 유권자를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기득권을 위해서 봉사하고 정치인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데 급급한 지금의 정치 현실을 고발하면서, 다양한 목소리들을 대표할 수 있는 올바른 대의정치 실현을 위한 정치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페미니즘의 쓸모 여부를 논하는 사회의 부당함을 고발하는 목소리도 있다. 별 근거도 없이 정한 ‘우리’ 혹은 ‘모두’의 범주에 자신과 모든 사람이 속할 수 있다고 믿으면서, 뻔뻔하게도 모두를 위한다는 명분을 세우고, 그리고는 정작 그 모두의 경계 밖에 있는 사람들의 삶을 부정하는 현실, 그래서 끊임없이 소수자들의 목소리가 외면하고 왜곡하는 현실을 고발하고 있다. 엄연한 강간을 모두를 위한다는 명분을 내 세우며 간음으로 읽는 교회와 사회를 향한 비판이다.

 

오늘의 대학과 교육현장을 바라보는 날카로운 시선도 있다. 진정한 공부와 연구를 가능하게 하는 지도하는 자와 배우는 자 사이의 인격적이고 교육적인 인간관계는 사라지고, 시장과 다름없이 경쟁과 경제적 이해관계가 지배하면서, 그 안에 위계적 질서가 만들어지고 고착화되고 있는 교육현장에 대한 고발이다. 교육현장의 존재 이유는 앎과 배움을 위해서다. 하지만 그 교육 현장을 지배하는 인간관계는 교육의 존재 이유를 스스로 부인하고 있다.

 

교회와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성찰 또한 정말 진지하고 솔직하다고 느낀다. 에큐메니칼 활동가들이 그 운동을 계속하게 할 수 있는 자존감을 찾아야 한다는 간절한 이야기, 그래서 에큐메니칼의 칼(刀)을 더 예리하게 다듬어야 한다는 희망의 표현이 오히려 아프게 들린다. 한 신학생은 하느님의 잔치가 끝나버린 교회에 더 이상 머무를 수 없어서, 다니던 신학교를 그만두고, 하느님과 함께 춤추기 위해서 하느님의 잔치 현장으로 가겠다고 한다. 그러면서 내게 주신 하늘의 씨앗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꼭 싹을 틔워 보겠다고 다짐한다. 부끄럽고 또 부끄러울 뿐이다.

 

교회와 사회에 대한 절망이 가득한 이 시대에 오히려 청년을 찾는 목소리가 높다. 자신의 기득권은 조금도 내려놓을 생각이 없으면서, 다시 한 번 청년들의 희생과 열정의 수혈을 바라는 음흉함이 분명히 있다. 그래서 한 청년은 그 청년을 말하고 싶어하고, 동원하고 싶어하는 자들을 가장 경계해야 한다고 경고한다. 사건과 신학을 향해서도, 원고료 주면 치킨이나 사먹고 말겠다고 냉소를 보낸다. 하지만 그 가득한 냉소가 오히려 옹골찬 각오처럼 들린다.

 

사실은 취지문이라는 이름으로 이런 사족 같은 이야기를 널어놓고 싶지 않다. 그저 있는 그대로 읽어 보라고 말하고 싶다. 현실에 대한 분석이 정확해서도 아니고, 글이 아름답고 좋아서도 아니다. 그렇다고 메시지가 명확해서 그런 것도 아니다. 오히려 문장이나 수사로 말하기 힘든 무엇, 내용이나 메시지로도 가릴 수 없는 무엇이 보이기 때문에 함께 읽어 보자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어떤 이는 냉소와 비관으로 가득한 글이라고 여길지 모르겠지만, 내게는 오히려 깊게 도사린 희망과 신념을 읽을 수 있어서 좋았다.

 

올 한 해를 지내면서, 교회를 포함한 많은 곳에서 세대간 의식의 차이에 당혹감과 절망을 표현하는 기성세대의 모습이 곳곳에서 이어져 왔었다. 사건과 시위의 현장에서 주저함이 많은 청년들을 바라보며 불편한 심기를 여과없이 드러내는 사람들도 있었고, 어떤 교회에서는 성급하게 세대 간의 논의를 시도해 보려고 청년들에게 접근했다가, 그들의 얼굴에 드러나는 무관심과 주저함과 냉소에 당황하기도 했던 것 같다.

 

긴급 수혈을 바라듯, 청년들에게 기대를 보내면서 동원하려는 심사를 숨기지 않는 기성세대를 향한 젊은 사람들의 경계심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뜬금없는 이야기 같지만, 기후변화에 관한 유엔 회의에서, 스웨덴 소녀 툰베리가 세계의 정치지도자들을 향해서 했던 연설의 한 토막이 생각난다. 

 

“여러분들이 미래의 희망을 바라며 우리 청년들에게 오셨다구요? 감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여러분들은 저의 꿈을 훔쳐간 사람들입니다. 그 헛된 말들로 내 어린 시절을 앗아가 버린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지금도 여러분이 할 수 있는 모든 이야기는 돈과 경제 성장에 관한 동화 같은 이야기뿐입니다. 어떻게, 감히, 그럴 수가 있습니까?”

 

지금 와서 다시 왜 청년을 찾습니까? …

 

이들의 목소리를 제대로 듣기에는, 어쩌면 나와 우리 교회와 우리 사회가 스스로 닫고 있는 문이 너무 많고 너무 무거운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