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수현(감리교신학대학교)
미나리는 1980년대 미국 이민자 가정에서 자란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를 영화화 했다고 한다. 이민자는 아니었지만 필자는 미국에서 13년 동안의 유학생활을 경험한 적이 있다. 필자의 미국 유학시절 이야기이다. 미국에서 신학을 공부하는 유학생들에게 미국 영주권은 양가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물건이다. 유학생이 영주권을 목표로 한다는 것은 미국에 체류하겠다는 의미이며, 미국 사회에 편입해서 살기로 마음먹었다는 의미이다. 결국 유학의 목적이 공부가 아니라 미국 이민이었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 (물론 유학 이후 미국에서 학자의 직업을 구해서 이후 영주권을 받는 것과는 다르다.) 교회는 신학생들에게 편리하게 영주권을 획득할 수 있는 곳이기에 많은 유학생들이 이민 교회를 통해 영주권을 취득했으며, 이는 이후 몇 년 동안 신학 유학생들이 한국에서 미국 학생 비자를 받기 어렵게 되는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다.
하여튼, 영주권을 꿈꾸는 이들에게 전설처럼 내려오는 영주권을 얻는 최후의 방법이 있었다. 유학생들은 이를 닭공장 솔루션이라 불렀다. 그 소문의 진위는 확인해 보지 않았지만, 그 방법은 다음과 같다. 미국의 거대 육가공 공장은 많은 미국인들이 일하기 꺼려하는 곳이다. 값싼 닭가공육들은 빈민층의 주요 단백질 공급원이고 이를 위해서 값싼 노동력이 필요하다. 그래서 미국의 닭공장은 영주권이 필요한 사람들을 후원해 주는 대신 그들의 노동력을 싼값에 이용한다. 취직해서 3년을 버티면 영주권을 취득할 수 있게 된다는 소문이었다. 그러나 상상을 초월하는 근무 여건과 비인간적 처우를 견뎌야 한다고 했다. 많은 유학생들이 결국 공부를 포기하고 한국에 돌아가지 않겠다면 닭공장이라도 가서 가족을 부양할 것이라 우스갯 소리를 하곤 했다. 이방인이 합법적인 영주권을 얻기 위해 극한의 노동과 비인간적인 환경을 감내하는 것은 그만큼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일정기간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함을 뜻한다.
그곳 닭공장은 누군가에겐 농담거리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잠을 이루지 못하는 깊은 고민거리가 되는 곳이었으리라. 어두운 심연에서 우리를 보고 싱긋 비웃는 공포의 대상이자 끊임없이 유혹하는 대상이기도 하다. 미나리의 주인공 부부의 미국에서의 직업은 병아리 감별사이다. 아마 초창기 닭공장 정도 되지 않을까? 미국의 이민자들로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미국은 기회의 땅이기도 하지만 고향은 아니다. 그들은 이방인이다. 자기 자신에게도 그리고 그 땅에 사는 다른 누구에게도. 한 사회의 이방인으로 산다는 것은 하루 하루를 생존을 목적으로 살아야 함을 뜻한다. 거칠게 말하면 이기적인 삶이고 세련되게 말하면 자신의 욕망에 솔직한 삶이다. 영화 [미나리]에서 남편인 야곱 (제이콥, Jacob)은 자신의 욕망에 매우 솔직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 욕망을 구체화시키기 위한 방법과 의지에도 충실하다. 미국에서 농업으로 성공하겠다는 그의 욕망의 계획은 아내 모니카의 안정을 향한 욕망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그래서 나에게 이 영화는 다민족사회를 말한다기 보다 한 가족, 또는 공동체 안에서 각기 다른 욕망들의 충돌을 그리는 것으로 보인다. 남편의 성공을 향한 꿈과 안정을 바라는 부인, 그리고 그 충돌 속에서 갈곳을 잃은 자녀들의 모습들이 나타난다.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욕망의 충돌에 가장 어른인 할머니는 매우 초연하다.
사위 야곱에게 충고하지도, 딸인 모니카에게 훈계하지도 않는다. 그저 묵묵히 자신의 과업인 데이빗(손자)를 돌보는 일을 계속할 뿐이다. 영화 중간에 미나리를 심은 냇가에 나타난 뱀을 쫓으려는 손자를 말리는 할머니가 그려진다. 할머니는 말한다. “보이는 것은 위험하지 않다. 보이지 않는 것이 위험한 것이다.” 정작 가장 위험한 것은 자신의 욕망을 위선으로 가장하는 것들이란 말일 것이다. 그래서 할머니는 솔직한 욕망을 터트리고 충돌시키는 딸과 사위를 지켜만 본다. 전통적인 가치에 익숙한 이들은 이를 가정의 위기로 읽을 수 있겠지만 감독의 기억에는 나름의 분명한 욕망과 실현 방법을 열심히 고민하고 있었던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생생한 식민지와 한국전쟁을 겪은 경험은 가르쳐 주었을 것이다. 정작 위험한 것은 욕망이 아니라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내세우는 위선임을 말이다. 식민 이데올로기와 이후 시작된 여러 정치 이념들의 충돌은 한국사회를 끊임없는 위선의 시대로 몰아넣었다. 모든 희생이 개인의 욕망이 아니라 선한 가치를 위한 선택임을 내세우는 위선은 여전히 한국 사회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윤여정씨가 연기한 할머니는 영화의 중요 긴장을 이끌고 가는 인물은 아니지만 마치 미국 땅에 심긴 동아시아의 식물, 미나리와 같이 자연스럽게, 진정한 가족의 가치에 대해 질문한다. 창고에 불이 난 이후, 거실에서 엉킨채 잠든 가족들을 바라보는 할머니의 눈은 마치 냇가에 핀 미나리와 같이 자연스럽다. 어쩌면 인간은 자신의 욕망을 솔직히 말하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투쟁함을 통해 서로를 알아가는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어느 순간 자신의 욕망이 잿더미가 되어버렸다 해도 다시금 엉켜 살 수 있는 것이 가족이란 공동체가 가지는 의미일 수도 있겠다.
역사적 예수에 관심있는 학자들은 예수의 시대가 바로 수많은 인간의 욕망들이 충돌하던 시대였다고 말한다. 끝나지 않는 제국의 식민 사회 속에서 천부적 재능으로 권력을 얻는 헤롯 가문의 지배 아래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다양한 욕망을 종교적 위선으로 감추고 살고 있었다. 민중들은 그 위선에 이끌려 서로를 정죄하고 폭력을 일삼으며 서로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외치는 시대였다. 그러한 켜켜히 쌓인 위선의 지층들을 바라보며 갈릴리 나사렛에서 성장한 예수라는 청년의 깨달음과 가르침을 하나님의 아들의 그것이라 믿는 것이 기독교이다. 수많은 욕망이 위선의 탈을 쓴 시대에서 과연 기독교는 미나리에서 말하는 공동체의 가치를 생산할 수 있을까? 어쩌면 감독은 무의식적으로 질문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미나리를 보면서 든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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