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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신학 2기/청년과 불안

청년의 우울은 개인의 감정문제가 아니다. / 장재열

 

장재열(청춘상담소 좀 놀아본 언니들 대표)

 

며칠 전, 오랜 벗인 수녀님께 메시지가 왔습니다. “재열군, 내 고민 좀 들어 줄래요? 청년들이 찾아와서 나한테 고민을 말하는데 무어라 해줘야 할지 예전보다 나날이 어렵네요. 내가 나이가 들어서일까?” 올해만 벌써 여섯 번째입니다. 뭐가 여섯 번째냐고요? 이런 질문을 수녀님, 신부님, 목사님, 스님까지 다양한 종교 지도자분들께 받은 게 말입니다. 이럴 때, 저는 뭐라고 답할까요? “맞아요. 나이드셔서 그래요. 세대차이죠. 뭐. 하하하” 이렇게 답할까요? 아닙니다. 이렇게 답했습니다. “수녀님, 저도 그렇더라고요. 예전이랑은 뭔가 확실히 다르죠?”

 

청년들의 마음 건강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기에, ‘뭔가 다르다’고 한 걸까요? 실제로 처음 우리 단체가 설립되어 청년들의 고민을 들었던 2013년 이후, 내담자들의 상태나 주 호소 문제는 해마다 조금씩 바뀌어 왔습니다. 저와 함께하고 있는 팀원들은 말했지요. “예전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줄어든 것 같아. 위로나 공감이 정말 필요한 걸까...?”라고요. 청년들의 고민이 개인의 감정이나 정서적 측면에 중점을 두었던 시기를 지나, 점점 더 사회 구조적 모순에 의한 불안감으로 바뀌고 있다고나 할까요? 살짝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전년도에 코로나가 시작된 이후, 가장 많이 언급되었던 이야기 중 하나는 ‘20대 여성 자살 시도율’입니다. 2019년보다 2020년에 20대 여성 청년의 자살 시도율이 4배 늘어났다는 서울시정신건강복지센터의 발표 이후, 일대 파란이 일었지요. 코로나 때문일까? 왜 유독 20대 여성 청년일까? 다양한 전문가들이 그 이유를 분석했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20대 여성이 가장 대화와 유대감 속에서 위로를 받는 성별이고, 세대이기 때문이다.’라는 분석을 내어놓았지요. 그러니까 젊은 여성들은 만나서 대화하고 해소하는 타입이 많은데, 코로나로 못 만나기 때문 아니냐. 라는 의견이었는데요. 이 의견에 대해 저를 비롯한 많은 정신건강 전문가들은 절대적으로 반대의견을 내었습니다. 특정 성별의 ‘성격유형’으로 치부해서는 젠더 이슈밖에 안 된다는 거죠. 그렇다면 이유가 무엇일까요?

 

뜻밖에도 그 힌트는 통계청 고용동향 지표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2020년 9월 고용동향에서, 전년 대비 가장 많이 실업률이 증가한 그룹이 20대 여성이었습니다. 실업률의 증가와 자살 시도율의 증가 폭이 거의 비슷한 결을 보여준 것인데요. 이를 통해서 20대 여성이 유독 감정적이어서 쉽게 자살을 택하는 것이 아니라, 코로나 상황으로 인해 경제적, 환경적 안전망이 가장 먼저 무너진 세대라서 자살 시도율 역시 동반 견인되었다는 분석을 할 수 있었습니다. 즉, 코로나가 장기화 될수록, 20대 여성 외에도 다음 순서로 차례차례 고용 및 경제 지표들이 무너지는 세대가 뒤이어 자살 시도율 증가를 할 것으로 예측했는데요. 실제로 2021년에 접어들며 자살율 및 자살 시도율이 2030 남성층에서 증가세를 뚜렷하게 보였습니다. 즉, 20대 여성이 ‘유독 자살 시도를 많이 한 것’이 아니라, ‘가장 먼저 무너진 도미노의 첫 블록’이었던 것이라고도 볼 수 있겠지요.

 

이러한 최근 증가하는 청년들의 불안과 우울, 극단적 선택의 증가는 개인의 감정이나 성격보다는 ‘사회적 불안(Social Unrest)’으로 보아야 한다는 의견이 힘을 얻고 있는데요. 작년 9월, 국무총리실에서 주관한 청년 정책 컨퍼런스에서 공론화된 개념입니다. 청년들의 우울, 불안의 반 이상이 개인의 트라우마, 양육기의 상처 같은 심리적 기제보다는 주거, 취업, 노동환경, 젠더 불평등 등 사회 구조적 문제에서 촉발되었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들에게 위로와 공감 힐링보다 근본적으로 위에서 서술한 ‘구조적 문제’들이 개선되지 않으면 안 된다 라는 겁니다.

 

저 역시도 상담 현장에서 피부로 느끼고 있습니다. 이전까지 청년들은 ‘뒤처짐에 대한 불안’을 토로하곤 했습니다. 저희가 통계로 조사한 청년 21,492명 중 56.1%가 “나만 뒤처지는 것 같아 두려워.”라고 했었거든요. 상당한 수치지요. 그런데, 2020년 이후 양상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뒤처짐에 대한 불안보다, 무기력이나 무력감이 대세로 떠올랐달까요? 둘은 완전히 다른 면이 있는데요. 뒤처질까 봐 불안한 청년은 “그래서 나는 이 난국을 타파하기 위해 뭘 하면 좋아?”라고 묻습니다. How를 묻는다는 건, 무언가 방법이 보이면 힘을 낼 수 있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최근에는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우리 부모님 세대의 평범한 삶을 살 수 없잖아? 왜 노력해야 하지?”라는, Why의 말들이 넘쳐납니다. 사실 그렇잖습니까? 아주 간단한 예를 들자면요. 예전에는 이력서 10장을 보내면, 2개는 면접을 보고, 1개는 합격해서 취업하던 시대라면 지금은 100장을 보내도 단 한 곳에서도 면접을 오라고 하지 않는데, 이런 청년에게 위로와 공감이 얼마나 힘을 가질까요? 그가 겪는 우울과 불안은 ‘취업 준비의 끝없는 늪’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회가 만들어져야 해결될지도 모릅니다.

 

이런 청년들의 사회적 불안 앞에, 전화를 걸어온 수녀님도, 저도 끝내 “이거다!”하는 답을 찾지는 못했습니다. 1시간이 넘게 통화를 했는데도요. 하지만 그것 하나는 확실히 알 수 있었습니다. 청년의 우울은 절대로 개인의 감정 문제가 아니라는 것, 요즘 청년들이 나약해서 더 많은 우울이 발견되는 게 아니라, 요즘 사회가 더욱 청년들에게 기회와 공정을 약속하지 않는 세상이어서 우울이 늘어간다는 것을요. 우리 윗세대가 해야 할 일은, 위로와 공감, 경청만큼이나 ‘청년들이 희망을 다시 붙잡아볼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