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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신학 2기/청년과 불안

‘혼자’에 길들여진 청년의 불안 / 김한나

 

김한나(NCCK 신학위원, 성공회대학교)

 

산업화와 도시화로 인해 지역 공동체가 해체되고 개인의 공적인 생활과 사적인 생활이 분리되기 시작하면서 개인주의 문화는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오랜 시간 공동체를 통해 이어져 온 주요 가치와 윤리적 덕목들은 사회적 관계와 함께 점차 소멸되고, 개인의 자유와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젊은 세대의 삶의 목표가 되어가고 있다. 개인주의는 소리 없이 강하게 개인 간의 연대를 약화시키며 인류의 공동체성을 파괴하고 있다. 게다가, 최신 온라인 미디어의 급속한 발달은 개인의 익명성을 토대로 피상적인 인간관계를 확장시키고 ‘인스턴트 공동체 문화’(개인의 목적을 위해 쉽게 가입하고 쉽게 해지하는)를 양산하고 있다. 이처럼, 개인주의로 인한 공동체 이탈과 이로 인한 소속감의 결여는 청년들의 불안의 사회적 원인이 될 수 있다.

 

공동체를 통해 전수돼 온 사회적, 윤리적 가치 대신 개인의 기호와 경험을 중시하는 개인주의로 인해 현시대 청년들의 불안은 점점 심화되고 있다. 이는 견고하고 공적인 도덕적 가치보다는 언제든 변화될 수 있는 상대적인 가치를 삶의 기준으로 삼기 때문이다. 또한, 개인주의는 인류가 보편적으로 누려오던 공동체 유대감과 상호의존의 정신을 감소시켜, 각 개인을 고립된 섬으로 이탈시킨다. 사회적인 관계 속에서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며 정신적, 물질적 지원을 나누던 인류는 이제 이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강박과 불안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청년들은 이러한 문화적 흐름 속에서 태어나 개인주의적인 가치를 습득하며 안타깝게도 그것을 삶의 지표로 삼게 되었다. 이제는, ‘안물안궁’(안 물어봤고 안 궁금하다)이라는 용어가 생겨날 만큼 타인에 관한 관심 자체가 터부시된다. 이는 현시대가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윤리적 가치인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정신에서 얼마나 멀어지고 있는지 보여준다. 이웃의 아픔을 긍휼히 여기며 적극적으로 이를 돕는 것이 하느님의 뜻임을 우리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알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디어는 개인주의 경향을 더욱 가속화시키며 이러한 청년들의 불안을 해소할 수 있는 대안으로 부상하고 있다. 사람들과의 소통을 통한 정보 습득과 공동체를 통한 정서적 만족을 대신해 요즘 세대는 미디어를 소비하는 행위로 이를 대체하려 한다. 공동체 안에서 인품과 덕을 갖추는 것을 윤리적 이상으로 여겼던 과거와는 달리, 미디어를 통해 만들어지는 유행과 트랜드를 따라가는 것이 젊은이들의 이상이 되었다. 공동체와 보편적 가치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열망은 오히려 그 이면에 결핍과 불안을 동반하여, 미디어를 통해 만들어지는 일시적인 유행에 쉽게 귀속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다수의 젊은 세대들은 온라인상에서 유행하는 짤, 밈, 신조어 등을 알고 사용해야만 시대와 현실에 뒤떨어지지 않은 ‘인싸’라고 여긴다. 또한, 그들은 ‘인싸템’을 구입하고 ‘핫플’을 방문해서 SNS ‘인증샷’을 찍어야만 사회적 소외로 인한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개인주의 문화는 교회 안에서도 그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그리스도의 몸에 깊이 연합되어 서로 간 진리의 양분을 나누어 먹으며 함께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 교회 공동체의 본분이지만, 일부 청년들은 지역교회뿐만 아니라 보편교회에 대한 소속감의 부재로 홀로 외로움과 불안을 느끼며 신앙생활을 영위하는 경우도 많다. 성경에 따르면 우리는 자율적이고 개체적인 존재로 창조되지 않았다. 우리는 전적으로 하느님께 속한 존재로서 공동체 안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존재다. 하느님께서는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다고 말씀하시며 돕는 배필인 하와를 창조하심으로 최초의 가정 공동체를 만드셨다(창2:18-25). 이처럼,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도움을 필요로 하며 상호 보완해야 하는 존재로서, 각자의 은사와 소유를 타인을 위해 사용하며 공동체 안에서 함께 공생하는 존재다. 또한, 개인주의적 사고는 타인과의 관계를 넘어서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에도 악영향을 끼친다. 우리가 하느님께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 그리고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삶의 주권을 하느님께 맡기는 것이 참된 신앙이라면, 개인주의는 하느님으로부터 독립하고자 하는 마음을 부추겨 죄에 가까워지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를 모든 표면적인 불안의 원인이 되는 심연의 불안으로 향하게 한다.

 

시편을 묵상하다 보면 불안과 낙심의 감정을 숨김없이 하느님께 호소하는 기도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시편 기자들의 공통점은 불안의 정점에서 절망으로 치닫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을 향해 그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비참한 상태 속에서도 하느님의 전능하심과 역사와 구원의 언약을 묵상하며, 진리의 빛으로 그들을 하느님의 성소로 인도해주시기를 간구한다. 이러한 기도의 과정을 통해 그들은 하느님과 그분의 약속에 소망을 둘 수 있는 기쁨의 상태에 이르게 되어 하느님께 영광과 찬양을 올리게 된다. 이처럼, 모든 세대와 인류의 역사 속에서 존재하는 인간의 불안, 그 근원적 해결은 하느님께 있다. 우리의 시선을 자신의 내면으로 향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소망의 근원이신 하느님께 향하는 것이 불안을 넘어선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길이다. “그러니 좋은 날이 다 지나고 ‘사는 재미가 하나도 없구나!’하는 탄식 소리가 입에서 새어 나오기 전, 아직 젊었을 때에 너를 지으신 이를 기억하여라”(전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