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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신학 2기/청년과 불안

나는 불안하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 이준봉

 

이준봉(서울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일단 코로나19 이야기부터 해보자. 작년 초까지만 해도 나는 이 지긋지긋한 코로나바이러스가 언젠가는 감쪽같이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정부와 언론은 K-방역을 외치며 항상 ‘어느 시점’을 제시하곤 했다. 낙관적인 목소리로 ‘~~때가 되면 해결될 것이다’라는 식으로 미래를 전망했다. 하지만 “코로나의 긴 터널의 끝이 얼마 남지 않았다”라는 발언이 무색하게도 연일 코로나 확진 환자의 수는 최고치를 갱신하고 있다. [각주:1] 이제 더는 큰 기대를 걸지 않는다. 변화되는 상황을 담담히 목도할 뿐이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현실 속에서 괜한 예측은 하고 싶지 않다. 희망고문과 다를 바가 없을 테니까. 그런데 문제는 코로나만이 우리에게 걱정거리를 던지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나는 20대 중반의 청년이다. 혹자는 그 나이대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뭔들 못하겠느냐고 젊음을 부러워하기도 한다. 나조차 가끔은 유년 혹은 십 대 시절을 그리워하니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누군가가 부러워할 만큼 오늘날의 청년들은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을까? 정답은 자명하다. “아니요.” 보건복지부에서 고시한 「코로나19 국민 정신건강 실태조사」[각주:2] 에 따르면, 연령층이 낮아질수록 불안 수준은 점점 더 높아진다는 결과가 제시되었다. 또한, 우울 점수는 20대 여성이 가장 높았으며, 자살을 생각하는 비율의 분포는 20대 남성에서 가장 높게 드러났다. 코로나 이후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가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음은 사실이다. 하지만 주목할 점은 특정 연령층이나 성별의 사람들에게서 더욱더 많은 아픔이 호소되고 있다는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힘든 사람을 더 고통스럽게 만드는 걸까? 고려대학교 보건정책관리학부의 김승섭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우리의 건강은 결코 의료 기술만 발전한다고 해서 저절로 좋아지지 않을 것이라고. 아무리 의학이 발달하더라도 근본적이며 구조적인 문제가 개선되지 않는다면 인간의 아픔은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 아무런 걱정 없이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당장 내일조차도 살아내기 힘든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이 있듯이 말이다. 즉, 질병에는 사회적 원인과 책임이 있다는 의미다.[각주:3]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21세기의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청년들에게 일말의 관심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 모두가 취약한 환경에 처한 건 아니겠지만, 분명 청년들은 누구보다도 더 불안에 노출되어 있으며, 삶에 대한 막연함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나 자신을 조금 더 엄밀하게 정의하자면 ‘현재 신학을 전공하는 20대 남성 목회자 후보생’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여기에는 다양한 함의가 들어있는데, 우선 목회자 후보생부터 보자. 신학과 학부에 입학했을 때에는 좋아서, 설레는 마음으로 학교에 들어왔던 기억이 난다. 근데 신학대학원에 진학하기까지는 족히 일흔 일곱 번 정도 고심했던 것 같다. 점점 줄어드는 개신교인의 수, 그에 반해 목회자는 지나치게 많이 배출되는 세태, 연일 터져 나오는 부정적인 뉴스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더 이상 추락할 곳도 없이 나빠진 개신교인에 대한 사회적 시선. 이런 상황에서 목사가 되겠다는 결정은 선뜻 내릴 만한 것이 아니었다. 이전에 품었던 소명은 희미해지고, 불안과 의심에 파묻혀 신학대학원 입학 원서를 작성했던 나는 ‘단지 믿음이 없는 신학생’에 불과한 걸까? 그것을 오롯이 나 자신만의 잘못으로 넘겨야 하는 걸까?

 

한데, 어쩌면 난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일지도 모른다. ‘남성’ 목회자가 될 것이라는 점에서. 남녀 차별이 유독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곳이 바로 개신교계이기에 그렇다. 여성 목사 안수 문제부터 시작해서, 대다수의 한국 교회 내에서 통용되는 언어와 문화, 인식 등은 지나치게 편향된 채로 남아 있다. 이를 ‘나는 남자니까 다행이다. 어쨌든 내 문제는 아니네’라고 생각해서 피해가려고만 한다면 그만한 방관죄가 또 어디 있는가. 이미 기울어진 교계의 민낯을 직시한 청년 여성들은 일찍이 목회를 포기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각주:4] 그 이유는 내가 지금까지 체감하지 못한―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있는 줄도 몰랐던― 보이지 않는 답답함과 불안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누구의 책임이며, 어디에서부터 풀어가야 하는가. 남성 목회자인 나로서는 어떠한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

 

아마도 인간은 태곳적부터 끊임없이 불안을 느껴온 존재일 것이다. 성서가 우리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지시하는 까닭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하루가 멀다고 불안감은 불현듯 찾아온다. 만약, 불안이라는 경험이 그저 개인적인 병리 현상으로만 치부되어 버린다면 그것은 고통의 연장에 지나지 않는다. 공포와 두려움, 스트레스로 변모해버리는 불안은 사회 안에서 또 다른 불행과 자살 발생률을 잉태할 뿐이다. 하지만 우리가 불안의 경험 이면에 드러나는 사회·구조적 문제, 공동체의 책임과 윤리, 교회의 역할과 자세 등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일종의 마중물이 될 수 있다. 그때 불안은 더 이상 무가치한 대상으로만 남아 있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에게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매개체가 되어줄 것이다.

 

나는 이번 <사건과 신학> 2기에 합류하여 이 문제를 함께 고민해보고 싶다. 청년이 느끼는 불안감을 가진 채로, 이것이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향하는지 담담히 관찰하기를 원한다. 다양한 범주의 사건을 마주하면서, 잠시 멈추어 성찰할 곳은 없는지 생각해보려고 한다. 가끔은 신학생으로서 뭔가를 외치거나 직접 행동해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누가 보든 말든 상관없이. 르네 데카르트는 방법적 회의를 통하여, 결국 ‘생각나는 나 자신’만큼은 확실하고, 부인할 수 없는 명제임을 증명했다. 코로나가 언제 끝날지 모르며, 설사 감쪽같이 끝나더라도 행복한 사회가 도래할지 현재로서 의문이 드는 나는 이렇게 말하고자 한다.

 

“나는 불안하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1. 2021810일 기준, 국내 코로나바이러스 일일 확진자 수가 2,223명으로 이천 명대를 돌파했다. [본문으로]
  2. 보건복지부·한국트라우마스트레스학회(KSTSS), “20212분기 코로나19 국민 정신건강 실태조사결과 발표,” 20210726일 보도. [본문으로]
  3. 김승섭, 아픔이 길이 되려면, (서울: 동아시아, 2017), p. 6-7. [본문으로]
  4. 구권효, “그럼에도, 여성 사역자는 훨씬 더 많아야 한다,” <뉴스앤조이>, 2021. 08. 06. 발행.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