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건과 신학 2기/청년과 불안

정답-없는-사회 / 하성웅

 

하성웅(한국기독청년협의회, EYCK)

 

일전에 글을 기고하면서 자료를 찾던 중에 점증하는 ‘청년고독사’에 관한 기사를 읽게 되었다. 기사는 고독사가 무엇이며, 현재 청년들의 고독사가 늘어나는 상황과 원인에 관한 내용이었다. 고독사란 주변 사람들과 단절된 채 홀로 살다가 아무도 모르게 생을 마감하는 외로운 죽음을 말한다. 주로 고독사는 독거노인이나 중년의 남성들의 일로만 여겨져 왔는데, 최근 들어 20, 30대 청년들의 고독사가 늘어나고 있어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2017년 63건의 청년고독사 사망사례가 지난해는 100건을 넘기면서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고 하니, 심각하게 이 문제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고독사의 원인으로 기사는 1인가구의 증가를 지적한다. 20, 30대가 40%를 차지하는 1인 가구가 점차 증가하면서 자연스럽게 청년고독사도 증가했다는 것인데, 단순히 1인 가구의 증가가 원인이라기보다는 청년 1인가구가 경제적 빈곤으로 인해 취약한 주거환경에 내몰리고, 그로인해 심리적, 물질적으로 고립되는 것이 좀 더 실질적인 청년 고독사의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청년고독사의 증가는 우리시대 청년이 얼마나 불안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보여주고 있다. 불안은 개인의 것임과 동시에 우리 사회의 것이다. 코로나19로 인한 경기침체, 얼어붙은 취업시장, 부동산 가격폭등으로 인한 주거문제 등 불안정한 사회경제적 여건은 청년들을 경제적 고립으로 몰아세우고, 이는 관계의 단절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의 단절은 우울증으로 이어지고, 극단적인 경우 고독사로 이어진다.

 

“미래를 준비하는 시기니 참고 견뎌라”, “청년시절의 고생은 사서도 한다”, “청년시절에 힘들지 않은 사람이 있나?” 같은 청년들의 나약함을 탓하는 기성세대의 이야기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괜히 꼰대라는 말이 유행했을까? 그러한 말들은 청년시절의 노력과 학력이 웬만하면 실제 삶의 개선으로 이어지고, 소위 계층이동이 이어질 수 있었던 시절의 이야기다. 기성세대는 가능했을지 모르지만, 지금 청년세대는 그렇지 않다. 이제는 개인의 학업성취와 노력만으로는 출발선의 차이를 극복할 수 없다. 삼포세대, 칠포세대, 달관세대, 수저론, 이생망 등의 용어들은 더 이상의 길 찾기를 포기하는 청년세대의 절망을 보여준다.

 

청년들이 느끼는 불안에 관해서 좀 더 파고들어보자. 정신의학적 용어로 불안이란 불쾌한 일이 예상되거나 위험이 닥칠 것처럼 느껴지는 불쾌한 상태를 말한다. 불안은 공포와 함께 두려움의 감정에서 나오는 한 갈래로서, 대상의 실재 여부에 따라 나눠진다. 그러니까 두려움의 대상이 명확하다면 그것은 공포이고, 대상이 명확하지 않고 미래의 가능성으로만 존재한다면, 그 때 느끼는 감정은 불안이다.

 

청년들이 불안을 느끼는 것은 이와 같은 불확실성, 모호성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청년들이 두 가지 모호성에서 불안을 느낀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는 미래에 대한 모호성에서 오는 불안이다. 지금 청년들에게 미래는 불투명하다. 어느 정도 노력하면 결실이 보여야 하는데, 보이지 않는다. 더 나은 삶을 위해서도 아니다. 그저 평범한 삶을 살기 위해서인데, 그마저도 기약이 없다. 이로 인해 청년들은 다음 단계의 삶, 다른 차원의 삶을 모색하는 것에 대해 엄두도 내지 못한다. 도전이 청년의 미덕이라는 말은 이제 옛말이다. 도전은 도박이다. 실패하면 다음은 없다. 그러니 다양한 진로와 창조적 삶의 가능성보다는 그나마 안전하고 단선화 된 진로를 선택하고 준비한다. 물론 이것도 기약 없는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청년들이 느끼는 불안은 미래에 대한 모호성에서만 오는 것은 아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모호성에서도 불안은 찾아온다. 청년들은 사회가 규정한 정상적인 삶과 자신의 고유한 삶의 사이에서 괴리감과 불안을 느낀다. 사회는 끊임없이 정상적인 삶의 모델을 제시해주고, 그러한 삶이 행복한 삶이라고 말한다. 직업은 무엇이 좋은지, 연봉은 적어도 얼마 이상이어야 하는지, 집은 몇 평은 되어야 하는지, 노후를 대비하기 위한 연금은 얼마나 부어야 하는지 등등 평범한 삶의 조건들은 매우 세밀하다. 특별히 자본주의 사회는 인간을 소비하는 주체로 만들어낸다. 소비할 수 있는 삶이 정상적인 삶이다.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효율적인 일들을 선택하는 것이 지혜로운 삶의 방식이다.

 

물론 나는 주체화 자체가 문제라고 보지 않는다. 문제가 되는 것은 획일화되고 단선화 된 주체화이다. 즉, 우리사회가 하나의 삶을 정답이라고 외치고, 모든 사람을 그러한 삶으로 주체화시키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체화가 문제가 되는 것은 인간 자신의 고유성과 잠재성, 다양성을 배제하기 때문이다. 기성세대가 요구하는 삶, 우리사회가 규정하는 정상적인 삶, 자본주의사회가 요구하는 소비하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청년들이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다양한 삶의 가능성을 내버리는 것과 같다. 사회가 규정한 삶과 자신이 추구하는 삶 사이의 괴리감 속에서, 청년들의 자기정체성과 고유성은 모호해진다. 그리고 그것은 해소되지 않고, 지속적인 불안으로 다가온다. 이를 보면서, 청년들이 자기신념과 고집을 가지고 도전하지 않는다고 지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너무 큰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한 선택을 우리사회가 존중해주지도 않는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이제 청년들에게 도전은 도박이다.

 

그런데도 불안 속에서 청년들은 생존하고 있다. 사회가 어떤 상황인지 상관없이 긍정을 가지고 도전하려는 청년도 있고, 자신이 선택한 소소한 삶에 대해서 만족하고, 누리면서 사는 청년들도 있다. 그렇게라도 불안한 삶을 이어가려 한다. 하지만 불안한 삶을 고스란히 청년들 개인이 감내하는 이러한 방식으로는 우리사회가 나아질 수 없다. 정부와 정치권이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사회경제적 불확실성, 제도적 공백 속에서 고립되는 청년들의 삶에 주목해야 한다. 일자리를 늘리고, 경제를 활성화시키는 정책과 더불어서, 기본적인 주거, 문화생활을 보장해주는 정책을 마련해야하고, 상처받은 청년들의 마음과 삶을 보듬어주는 세밀한 정책을 개발해야 한다.

 

이와 함께 우리사회의 인식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사회는 청년들이 자신의 잠재성, 다양한 가능성을 실현하고 도전할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선택하고 도전한 길에 대해서, 존중받고, 만족할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나는 이러한 사회를 ‘정답-없는-사회’라고 칭하고 싶다. 정답이 없기 때문에, 비로소 모든 가능한 삶이 정답이 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우리의 숙제라고 생각한다. 우리사회가 유일하고 정상적인 삶의 모델을 제시하기를 멈추고, 다양한 삶의 잠재성을 인정해주는 사회, 청년들이 주체적으로 선택한 삶을 정답이라고 이야기해주는 사회를 만드는 일이 우리 사회의 과제다. 이처럼 실효성 있는 정책과 더불어 우리사회의 인식이 변화될 때, 비로소 미래에 대한 모호성, 자기 자신에 대한 모호성으로부터 오는 청년들의 불안이 해소되기 시작할 것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