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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신학 2기/청년과 불안

“죽음으로 삶의 비참함을 증명하게 하는 사회에서 청년은 안녕할 수 없습니다.” / 조은주

 

청년정책조정위원회 민간위원 조은주

 

전 생애 걸쳐 특정 시기마다 ‘통과의례’처럼 주어지는 생애 과업은 이행기 청년에게 가장 혹독하게 주어진다. 청년은 더 이상 아동도 청소년도 아니기 때문에 ‘경제활동이 가능한 자’로 분류되어, 그동안 사회정책에서 소외되거나 배제되어왔다. 원가족이나 교육제도에서 벗어나 노동시장으로 이행하는 과정에 있는 청년은 취업, 독립 등 중요한 생애 과업을 반드시 청년의 시기에 성취해야 한다는 무언의 사회적 압력을 받게 된다.

 

이러한 생애 과업 수행에 대한 압박 속에서 청년들이 마주한 사회·경제적 환경은 결코 녹록치 않은 것이 현실이다. 청년 실업문제는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대두되기 시작하여, 노동시장의 이중구조화가 고착되는 가운데, 정규직보다는 비정규직, 비정형 노동의 확산과 저성장 시대의 경제불황과 고용한파 현상이 맞물려, 이제는 코로나 팬데믹으로 락다운(Lock-down) 세대의 출현이 현실화되는 양상으로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초, 중, 고 학창시절의 친구들조차 경쟁상대로 보는 것이 당연하고 익숙한 청년들이 마주한 현실은 각박하다 못해 야박하다. ‘닥치고 취업, 묻지마 창업’을 암묵적으로 종용하는 사회에 대해 한 청년이 말하길, ‘이미 강과 바다는 물이 다 말랐는데, 계속 청년들에게 강과 바다로 나가 물고기를 잡아라!’라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했다. 좋은 일자리를 만든다는 정부의 말은 믿을 수 없고, 민간 채용 시장은 경력직 혹은 중고신입 중심으로 채용공고를 내기 때문에 경력을 이제 막 쌓아가야 하는 미취업 청년들에게는 노동시장 진입 자체가 삶의 큰 장벽이자, 오롯이 혼자 감내해야 하는 고통으로 다가올 수 밖에 없다.

 

더 나은 삶을 꿈꾸고, 미래를 그려 나가다 못해 미래를 책임져야 한다고 말하는 사회에서 청년은 외마디 비명조차 지를 수 없다. 만약 힘들다고 하면, 요즘 청년들은 나약하다고 하거나, 어려움을 모르고, 힘든 일을 하지 않으려 한다는 식의 말을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노동시장으로 진입하기도 전에 생존 자체를 위협받고 있는데도 ‘노오-력’만을 언급하는 것이 과연 온당한가?

 

단순히 사회·경제적 상황이 ‘지금, 여기, 이 순간’을 살고있는 청년에게 혹독해서 청년이 느끼는 삶의 불안이 증폭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필자 개인의 삶의 서사에서 주요하게 영향을 미친 굵직한 사회·경제적 사건을 꼽아보더라도, 현실 자체가 불안정하다 못해 미래 자체를 상상하는 것조차 가늠이 안 된다는 점에서 삶의 불안과 공포는 공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10대, 20대, 30대의 삶의 좌표를 두고, 사회적으로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건들을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1997년 IMF 외환위기와 미국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촉발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는 빛나는 경제성장 이면에 얼마나 맘몬이 지배하는 금융·자본 시장에서 한 국가의 경제가 취약성을 갖는지를 피부로 느끼게 해준 사건이었다. 이러한 경제 위기 상황보다 삶의 불안을 더 가중시킨 사건은 한 국가가 시민을 지키지 못하는 무능력한 모습이었다.

 

2002년 월드컵으로 대한민국 환호와 함성으로 가득했던 당시, 미군 장갑차에 의한 중학생 압사 사건이 발생했다. 잊을 수 없는 이름 조양중학교 신효순, 심미선 학생이다. 당시 나 역시 학생이었고, 월드컵 응원의 열기 속에서 뒤늦게 사건을 알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죄책감을 느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불평등한 한미 관계의 단면인 SOFA 협정 등 국가 간 헤게모니와 역학관계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국가라는 큰 틀의 사회 안전망보다는 ‘가까운 곳에서 서로 돌봄이 가능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이 더 중요하지 않나?’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던 것 같다.

 

인생의 첫 촛불의 뜨거움이 채 가시기도 전에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침몰 사고가 발생했다. 아무런 조치 없이 배가 침몰하는 과정을 전 국민이 망연자실하게 지켜봤다. 국가의 방기와 무능력함이 끔찍했고, 절망스러웠다.

 

목숨을 잃거나, 잃을 수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국가가 최소한의 역할을 해줄 것이라고 믿을 수 없는 사회와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불안정한 경제 시스템을 목도한 청년들이 삶을 위협하는 재난의 상황에서 불안, 우울을 넘어, 공포를 느끼는 것은 삶의 지지기반인 사회 안전망이 매우 부실하다는 현실의 반증이다.

 

미래에 대한 불안을 넘어, 공포를 이겨내기 위한 방법은 미래를 예견하여 실체화할 수 있어야 하지만, 어느 미래학자도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상황에서 삶의 지지기반마저 취약하다면 삶은 언제든 벼랑 끝으로 내몰릴 수 밖에 없다.

 

청년들의 사망원인 1위가 자살이라는 현상이 고착화된지 오래이다. 코로나19가 장기화 심화되며, 극심한 스트레스와 우울을 겪는 등 청년들이 많아졌다. 이제는 자살 문제를 넘어, 취업난과 생활고에 시달리다 고독사하는 청년들의 소식 역시 심심치 않게 보도되고 있다.

 

현장은 어떠한가? 실직으로 퇴직금 등으로 버티다가 몇 일 밥을 굶다 못해 몇 달 후원하던 CMS를 해지하고, 후원금을 다시 되돌려 받을 수 없겠냐는 전화를 받기도 한다. 또한, 보통 50대, 60대 성인 봉사자 분들에게 수요가 발생하는 일감인 반찬봉사 활동에 청년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유는 반찬을 얻어가기 위함이었다.

 

전화하고 찾아와주는 청년은 그래도 사회와 느슨하게 연결된 청년이지만, 아예 고립되어 있거나 사회에서 삭제된 청년은 벼랑 끝에 마주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 누구에게도 그 어떤 도움도 청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너무 비참하지 않은가?

 

‘자립준비청년(보호종료아동)’, ‘가정 보호 밖 청년’부터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을 돌봐야하는 영 케어러(young carer)’, ‘부모의 빚을 떠안은 청년’, ‘개인회생·파산 절차를 밟고 있는 청년’ 등 제도권 밖에 혈혈단신 생존을 위한 혈투를 벌이는 청년들이 있다.

 

청년들이 사회 구성원으로서 역할과 책임을 다할 수 있도록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책무를 규정한 「청년기본법」을 제정하고, ‘참여와 주도’, ‘격차해소’, ‘지속가능성’이라는 3대 원칙 하에 ‘일자리, 주거, 교육, 복지·문화, 참여·권리’ 등 5대 분야 44개의 과제를 담아, 작년에 발표한 「제1차 청년정책 기본계획」이 중요한 이유는 사회에서 쉽게 삭제되고, 잊혀진 청년이라는 존재 자체와 그 존재가 겪는 사회 불평등 문제 해소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온갖 곳에서 ‘청년’을 쉽게 호명하고 소비하고 있는 가운데, 정작 청년의 삶의 불안과 미래에 대한 공포는 ‘비참함을 증명’하지 않고는 주목받을 길이 없었다.

 

최근 「청년기본법」이 통과되고, 「제1차 청년정책 기본계획」이 발표되고 나서야, 「청년 고용 활성화 대책」을 정부합동 계획으로 발표함은 물론, 기재부가 「2021 하반기 경제정책 방향」을 발표하며, ‘튼튼한 청년 희망사다리 구축’에 관한 과제를 담아냈다. 이후 연달아 「자립준비청년 지원강화 방안」이 발표되고, 최근 청년정책조정위원회가 관계부처 합동으로 수립한 「청년특별대책」까지 공식 발표하기에 이른다.

 

지역에서 「청년기본조례」를 제정하고 「청년기본법」을 제정하며, 사회정책으로서의 청년정책을 말하는 청년들은 말한다. 청년의 ‘삶의 질’을 보장하기 이전에 청년의 ‘삶의 격’인 존엄성을 위협하는 각종 사회위험으로부터 청년들의 삶을 보호하고, 권리를 보장하는 일이 우선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생애 과업을 수행해나가는 과정에 부모로부터 자산이나 소득을 이전받지 못한 청년들은 삶의 출발선 자체가 다르다. 그런 청년들이 사회로부터 고립되거나 사회와 단절되지 않도록 함은 물론, 삶의 위기의 순간 벼랑 끝에 내몰린 청년들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도록 너르고 촘촘한 사회 안전망을 구축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죽음으로, 그것도 언론에서 그 죽음을 다뤄야만 청년의 삶을 반짝 조명하고 마는 식이라면, 삶을 둘러싼 불안과 공포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불안과 공포는 청년의 삶에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를 집어삼킬 가능성이 농후하다.

 

절박하고 절실한 마음으로 ‘경계에 선 청년의 삶’과 그 삶을 둘러싼 ‘불안과 공포의 원인’에 주목해주길 바란다. 그리고 그 삶의 안전망을 만드는 일이 결국 ‘청년 한 명을 위한 시혜’가 아닌 ‘우리 모두를 위한 권리의 확장’임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진정으로 청년의 삶이 안녕하길 바란다면, 죽음으로 삶의 비참함을 증명하게 만들고, 삶의 불안과 공포를 증폭시키는 사회를 결코 용인해서는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