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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신학 2기/드라마 오징어 게임; ‘K-’를 생각한다

죽어야 끝나는 욕망, 오징어 게임 / 고성휘

 

고성휘 (NCCK 교육위원, 장신대 박사후연구원)

 

전 세계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은 게임에 참가하는 사람뿐 아니라 게임을 지배하는 은밀한 구석의 관음증자들까지 모두 멈출 줄 모르는 인간의 욕망을 다루는 드라마이다. 게임보다 더 지옥 같은 실재를 발견한 2차 게임 참가자들은 돈을 향한 그들의 욕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결국 비인간성의 끝판을 보여주는 악한 군상들의 모습을 다 드러내면서 죽음으로서 그들의 욕망을 마무리하였다. 신자유주의 사회에 사는 파편화된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의 한계에 대한 불안은 한국이라는 배경의 특수함이 아닌 보편적인 어느 세계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현상으로 공감하게 된다. 456분의 1을 돌파해야 하는 목숨을 건 실재 아닌 실재는 게임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현실을 대변하고 있다. 그 현실을 은밀한 영역에서 즐기고 있는 관음증자로 표현되는 지배자들의 욕망 역시 극과 극의 지점에서 공통의 속성을 갖고 있음을 암시한다. 일남이 숨을 거두기 전 했던 말인 ‘돈밖에 없는 사람과 돈 없는 사람의 공통점은 재미가 없다는 것’은 결국 인간은 욕망을 추구하는 존재일 수밖에 없음이 바로 현실이라는 것을 허위적으로 암시한다. 욕망에서 빠져나올 인간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 그리고 그는 그 말을 증명하듯이 자신의 욕망을 따라 숨을 거둔다. 그 이후를 보지 못했다. 욕망만을 따라가는 사람의 끝은 그가 돈이 있어 지배자의 입장에 서든, 돈이 없어서 생존의 위협을 받는 약자의 입장이든 결국 죽음이 마지막 종착지임을 공격한다.

 

하지만 일남이 포기하듯 말하는 인간의 욕망, 죽어야 끝나는 인간의 욕망 앞에 오징어 게임은 그 욕망을 넘어서는 탈출구가 있지 않은가를 되묻는다. 결국 456억을 차지하게 된 기훈이 한 푼의 돈도 쓰지 않고 지배자의 색이었던 빨간색으로 머리를 염색하며 뒤로 돌아서 현실로 가는 모습에서 더욱 명확히 보인다.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생존에의 욕망과 불안 사이에 갈등하는 개인은 신자유주의의 거대한 구조 속에 어떻게 실재의 균열을 볼 수 있는가. 456분의 1을 차지하기 위해 순서대로 버리는 인간성의 매개는 이에 대한 새로운 문제를 제기한다. 물론 원작자의 의도가 아닐 수 있다. 이 드라마를 보았던 필자의 해석에 불과하다.

 

첫 번째와 두 번째 게임인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와 ‘달고나 뽑기’ 게임은 파편화 된 개인의 생존투쟁이 개인의 노력에 의해 어느 정도 가능함을 보여준다. 그러나 사회는 그리 녹록치 않음을, 개인적인 노력으로는 결코 돌파할 수 없는 벽이 엄연히 존재하며 그러기 때문에 너는 불안과 욕망 사이에 갈등하는 동물일 뿐이며 그 동물적인 감각으로 중간 숫자인 456에 집중하게 한다. 세 번째 게임부터는 생존을 향하는 불안의 주체가 버려야 하는 가장 첫째 순서가 물리적 약자임을 보여준다. 배제의 순서이다. ‘줄다리기’를 경험과 연륜에 의지하여 용케도 극복했으나 냉정한 배제의 둘째 순서는 남녀성관계의 비천함이다. 성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의 천박함을 극적으로 드러낸다. 성의 고귀함이 그 어떤 관계에도 선행하지 못하는 우리 사회의 현실을 암시한다. 분명히 오징어 게임은 몸으로 하는 게임임에도 인간의 몸에서 가장 성스러운 성은 배제 순서의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비극적 현실을 드러낸다. 자본이 없는, 맨 알몸인 개체들이 벌이는 게임에서 몸은 중요한 무기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떨어져 나온 조각인 성. 아름다운 성을 비천함으로 가두고 있는 우리 사회의 자화상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 드라마에서 가장 고민을 많이 하게 만드는 게임은 ‘구슬치기’이다. 이 게임은 마지막 보루인 ‘연대하는 개인’의 무력함을 차례대로 보여준다. 징검다리 건너기 전에 나타나는 일체 정적 관계의 배제가 그것이다. 알리와 상우의 연민의 정 배제, 오랜 삶을 함께 했던 부부연륜의 배제, 깐부로 맺은 동맹도 버릴 수 있는 의리배제 등이 수시로 넘나들면서 1대 1의 관계의 끈까지 철저하게 배제시킨다. 그러나 그 안에서 꽃 피는 두 여성의 심리적 연대는 성공하지 못했으나 가능성을 보여주는 하나의 매개로 작용한다. 그리고 나타나는 어이없는 깍두기의 존재는 신자유주의의 무한경쟁 속에도 위선적으로 표현되는 ‘모든 개인은 평등하다’라는 허위의식을 보여준다. 사회적 약자에게 던지는 ‘평등과 배려’는 존재하지만 그것마저도 사실은 허위였음을, 어차피 그 다음 게임에서 여지없이 무너져버리는 배제의 코드였음을 보여준다. 그 뒤로 수시로 무너져 내리는 배제의 코드들은 더 이상 손으로 셀 수 없이 포기하게 만드는 ‘인간의 악함’을 표방한다. 너희들은 ‘생존을 위해서는 악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라는 더 이상 빠져나갈 수 없는 막바지를 향한다.

 

그러나 역으로 이러한 일련의 배제항목들은 실재의 균열을 바로 보는 주체들이 존재하는 한, 우리는 이 지긋지긋한 연속적인 지배구조의 사슬, 어쩌면 넘지 못할 인간의 욕망으로 포장된 신자유주의 구조 틀조차도 넘어설 수 있는 역동성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래서 그렇지. 하나님에게 속한 인간 본성 자체의 의미를 더욱 고민할수록 거센 파도 그 뒤에 서 있는 예수를 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음을 다시 한번 생각할 기회를 주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또 다른 팁을 주고 있다. 기훈이 쌍용자동차 사건의 주인공으로서 등장하는 전체 기획이 이 모든 억압과 조장과 혼돈의 사회에서도 힘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현장에서 공감하는 주체의 힘든 고민에 있음을 암시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래서 우리는 일상의 삶과 괴리된 일체의 고민, 일체의 욕망에 종속되는 주체에서 벗어나 현장성이 갖고 있는 진정성을 다시 보자는 의미로 이 길고 긴 드라마를 재해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