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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신학 2기/드라마 오징어 게임; ‘K-’를 생각한다

K-교회를 생각한다 / 이준봉

 

 

이준봉 (서울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지난 9월, 세계 최대의 신자 수를 자랑하는 여의도순복음교회를 설립한 조용기 목사가 별세하였다(향년 86세). 그에 대한 평가가 긍정이냐 부정이냐에 상관없이, 이는 모든 사람이 주목할 만한 사건이었다.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 각지의 기독교인들 역시 David Cho에 대해서 한 번쯤 들어보았을 만큼 잘 알려진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여의도순복음교회와 조용기 목사는 한국 개신교를 대표하는 아이콘의 역할을 하였다. 역사신학자인 이재근은 20세기 당시, 세계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한국인으로 조용기 목사를 지목한 바 있다.[각주:1] 물론, 20세기를 넘어 21세기에도 조용기 목사와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위상은 변하지 않았다. 약 80만 명(일각에서는 100만 명이라고도 한다)에 가까운 등록 교인들과 25개에 달하는 위성 지교회, 여기에 소속한 수많은 직원들과 목회자들은 그의 권위를 실감 나게 했다.

 

사실, 여의도순복음교회와 연관이 있는 관계자들이나 오순절 계통의 신자들만 조용기 목사를 흠모해온 것은 아니었다. CTS나 극동방송과 같은 기독교 방송 채널에서는 말할 것도 없으며, 일반적인 기성 교회의 목회자들도 그의 업적을 자주 치하하곤 하였다. 나 역시 보수적인 개신교 신앙의 환경에서 자라오면서, 직·간접적으로 조용기 목사에 관한 평을 들을 기회가 많았다. 대개 비판적인 어조보다는 그가 이루었던 공로에 대하여 더 자주 청취했던 기억이 난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성도 수를 보유한 교회라든지, 성령 세례와 체험의 본보기라든지, 열매(결과)로 그 목사의 믿음을 알 수 있다라든지, 전설적인 신유 경험담을 회자한다든지 등으로 말이다. 자연스럽게 나는 조용기 목사를 (교황에 필적하는) 개신교계의 우두머리와도 같은 존재로서 인식하게 되었다.

 

이를 방증하는 한 가지 에피소드가 기억난다. 신학대학에 갓 입학하였을 때였다. 새내기였던 내가 제일 처음으로 계획한 일은 바로 조용기 목사를 만나러 가는 것이었다. 그 당시, 나의 소명은 교회를 개척하여 슈퍼메가처치로 성장시키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마치 조용기 목사가 구현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나는 방학을 맞이하여 파주에 위치한 오산리최자실기념 금식기도원으로 향했다. 때마침 금식기도성회가 열리고 있던 터라, 금식을 하면서 조용기 목사가 설교단에 올라오는 날을 기다렸다. 서너 일이 흘렀을까, 드디어 조용기 목사가 설교하는 날이 도래했다. 평소에 목사나 부흥사, 아니면 교수들에게 질문하기를 좋아했던 나는 조용기 목사에게도 질문할 거리가 많았다. 수첩에 여러 질문 목록을 써놓고 설교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뭐, 교회 개척 어떻게 하느냐, 부흥에 성공하려면 뭘 해야 하느냐, 이런 따위의 질문들이었다. 15분가량의 설교를 마치고 끝맺는 기도를 하더니, 갑자기 양복을 입은 경호원들 3~4명이 그를 의전하며 데려갔다. 이런 생경한 광경은 처음인지라, 따라가서 질문할 생각도 못 했다. 그 모습은 흡사 대기업의 총수와도 같았다.

 

최근, SNS를 위시하여 각종 언론과 플랫폼에서 능력주의(meritocracy)에 관한 논쟁이 한창이다. 능력주의란 개인의 우수성과 재능을 기준으로 지위나 보상을 분배하는 사회 체계를 의미한다.[각주:2] 이는 공정 혹은 불평등이라는 담론과 결부되어 다루어지면서, 각 입장에 따라 명암이 나뉘는 개념이기도 하다. 일례로, 능력주의가 노동의 효율성을 극대화하고 사회 발전을 촉진하며 공리성의 정의를 실현하기에 긍정되어야 한다는 의견이 있는가 하면,[각주:3] 능력주의는 능력을 가진 자가 능력을 갖지 못한 자를 지배하는 구조적인 모순이자 공동체 개념을 배제한 개인주의적 이기심의 발로이기에 지양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각주:4] 두 입장 모두 오늘날의 한국 교회에 적용할 만한 지점이 있겠으나, 나는 후자의 시각에서 개신교 내 산재한 문제들에 대해 좀더 다뤄보고자 한다.

 

현대의 한국 교회에서 목회자와 교회의 신앙을 측정하는 지표는 무엇일까? 갈라디아서(5:22-23)에 나타난 성령의 열매가 기준으로 작용하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사람들의 눈에 일단 보여야 한다. 목회자의 내적인 품성이나 서사에는 관심이 없으며, 오로지 외형적으로 나타난 결과만을 본다. 이번 주 재정 수입은 얼마인지, 출석 신자 수는 얼마나 되는지, 교회 건축과 이전은 언제 하는지, 교회 빚은 이제 얼마 남았는지, 교회 평수는 얼마나 되는지 등등. 심지어는 신체적 조건이나 학벌 등을 따지기도 한다. 이는 목회자들뿐만 아니라, 신자들 사이에서도 암묵적으로 통용되는 지표로 작용한다. 많은 개신교인은 목회자를 평가할 때, 소위 교회가 크거나 교인 수가 많으면, ‘성공한 목회자’ 내지는 ‘신앙심이 높은 목회자’로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그 과정에서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 목회자는 어떠한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별 관심을 갖지 않는다. 나는 이러한 결과주의적인 관점이 한국이라는 독특한 환경과 결합하여, 오늘날의 조용기 목사와 여의도순복음교회 및 그와 비슷한 부류의 목사들과 교회들을 양산했다고 생각한다.

 

이로써 K-교회는 개인의 윤리성이 소멸하면서 그 자체로 정화될 여지가 사라지고 말았다. 모두가 그러한 것은 아니겠지만, 이미 적지 않은 사례들이 위 주장을 입증한다. 자신이 목회하는 교회를 마치 본인의 전유물로 여기어, 자녀에게 그대로 넘겨주는 세습은 이제 당연한 일이 되어버렸다. 목회자와 그의 가족들이 교회나 교회 산하의 재단 공금을 횡령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성 윤리는 또 어떠한가? 소위 ‘잘 나간다고’ 자임하던 여러 사역자가 성폭력이나 성추행으로 입건되어 징역형을 살고 있으며, 개중에는 피해자에게 사과는 커녕 여전히 후안무치하게 떳떳이 목회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목회자와 교회를 치리해야 하는 총회 혹은 노회도 별반 다를 바 없다. 그들의 판단은 전적으로 동질 집단을 위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또한 능력주의와 결과주의의 폐단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결국, 그들에게 이익이 되는 사람들은 각종 일탈에 앞장서는 대형 교회 목사들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러한 한국 개신교계의 전락은 비단 대형 교회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앞서 언급했던 나처럼 교회를 개척하여 단순히 메가처치를 꿈꾸는 신학생에게도 잘못이 있을 것이고, 그와 같은 성공 신화를 추앙하는 신자들에게도 일말의 책임이 있으리라고 본다. 대형 교회가 아닌 중·소형 규모의 교회에서는 이러한 악습이 없을까? 글쎄올시다. 한편, 이는 교회만의 문제도 아니다. 개신교 대학, 신학대학에서는 어떠한가? 출판물을 많이 낼수록 학생들과 신자들에게 도움이 된다며, 표절을 일삼고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신학자들을 우리는 어떻게 봐야 할까? 모 개신교 대학의 총장은 자신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는 이유로 학교 직원을 무차별적으로 구타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운운하기도 했다. 어떤 대학에서는 자신의 입맛에 맞는 이념에 동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교수나 학생을 강제로 쫓아내기도 한다.

 

글을 다 써놓고 보니, 어째 K-교회의 부정적인 면모만을 기술하여 내심 씁쓸하다. 아마, 나조차 요즘의 교회와 목회자를 떠올리면 이렇게 느끼기에 그랬나 보다. 글을 마무리하기 전에 아까 언급한 능력주의와 관련해서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보고 싶다.

 

“그렇다면 과연 천국은 능력주의 사회일까?”

 

음…… 나는 능력주의 사회일 것이라고 강하게 확신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는 ‘능력’이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재능, 실적, 성취도 등과는 조금 다르다. 천국에서 일컫는 능력은 바로 예수께서 친히 보이신 ‘나눔과 비움’의 길이 아닐까 한다. 그리스도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 마침내 목숨까지 우리에게 건네어 주신 분이었다. 즉, 천국에서 정의하는 능력의 의미는 바로 ‘섬김과 사랑’으로 수렴된다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모습의 능력주의 사회가 동시대의 K-교회에서도 실현되기를 기대한다.

  1. 이재근, “역사상 최대 교회를 일군 한국 오순절 운동의 대표자,” <뉴스앤조이>, 2021. 06. 01. 발행. [본문으로]
  2. Scully, Maureen A. "Meritocracy." Wiley Encyclopedia of Management (2015): 1-2. [본문으로]
  3. 임명묵, 『K-를 생각한다』, (서울: 사이드웨이, 2021), p. 316-319, 350. [본문으로]
  4. 김미영, "능력주의에 대한 공동체주의의 해체," 「경제와 사회」 84 (2009), p. 258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