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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신학 2기/대선정국, 외면당하는 낮은 목소리들

지금 그 선배들은 어디 갔습니까? / 전 남 병

 

 전 남 병 (목사, NCCK 정의평화위원)

 

*글을 쓰면서도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아마 많은 비판에 직면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사랑과 지지는 변함없습니다. 이 글은 제가 속한 여러 단체나 NCCK의 입장과는 전혀 상관없음을 미리 밝힙니다. 또한 선배-후배라는 다분히 위계적인 표현 선택도 딱히 다른 단어를 떠올리기 힘들어 그대로 사용하였습니다.

 

최근 모 정당 대통령 후보(와 배우자)의 무속 관련 선언에 대한 연명 요청을 받았습니다. 1월 25일 ‘무속 정치·비선 정치를 염려하는 그리스도인’ 명의로 발표된 “Not again 비선 정치, Not again 무속 정치”라는 선언문입니다. 저는 여기에 연명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조금도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글 자체의 내용 문제를 떠나 이 선언문 발표가 다른 한쪽을 편드는 행위가 되기 때문입니다. 아니라고 한다면 어쩔 수 없지만 진보적 입장의 에큐메니칼 진영이 어느 한 후보를 지지하는 경향성, ‘무속 정치·비선 정치’라는 발화의 이면에 도사린 특정 후보 지지에 대한 혐의는 지울 수 없습니다.

 

“편드는 것이 잘못된 것이냐?”에는 저도 이견이 없습니다. 또한 구태와 혐오, 차별에 기반한 정치를 하고 있는 저쪽이 너무 나쁜 후보인 것에도 동의합니다. 하지만 저는 에큐메니칼 진영의 선배님들이 편들고 있는 그 후보와 당 역시 마뜩치 않습니다. 이런 경우 으레 “적폐 세력, 반민주 세력이 정권을 잡는 것을 보고만 있을 것이냐?”, “아무리 그래도 저쪽은 아니지 않느냐? 역사를 퇴보시키는 세력에게 나라를 맡길 수는 없지 않느냐?” 말씀합니다. 그러면 묻고 싶습니다. 이쪽은 괜찮습니까? 잘했습니까? 진보적인가요?

 

부동산 개혁, 되었습니까? 재벌 개혁, 되었습니까? 노동 개혁, 되었습니까? 교육 개혁, 되었습니까? 세월호의 진실, 밝혀졌습니까? 안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왜 이리 개혁이 늦느냐, 촛불의 성과만 따먹고 왜 바뀌는 게 없느냐?” 비판에 직면할 때면 “왜 나만 가지고 그러느냐, 그래도 쟤들보다는 낫지 않느냐? 비교할 걸 비교해라, 내부총질 하지 말라”고 항변합니다. 진보라 하면 내가 비판하는 자들보다 조금 더 잘하는 것에 대해 말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들이 못했던 점을 개선하면서 진보가 세상을 좋게 할 능력이 있음을 보여줘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러나 소위 진보라 말하는 민주당 세력은 이런 비판 앞에서 “그래도 저쪽 보다는 내가 조금 덜 타락하고 조금 덜 무능하다”고 말해 왔습니다. 이 얼마나 군색한 논리인가요?

 

2017년 위대했던 촛불시위 이후 저는 세상이 변할 줄 알았습니다. 문재인 정부는 그 사건을 촛불 혁명이라고 명명했습니다. 그렇다면 촛불 혁명으로 세워진 정부는 당연히 혁명 정부가 되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혁명적이지 않았습니다. 혁명은 구 체제(Ancien Régime, 앙시엥 레짐)를 새 체제로 바꾸는 것입니다. 그러나 촛불 혁명을 자처한 세력은 시대 전환이라는 거대한 요구에 부응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안 했습니다. 왜냐하면 보수를 자처하던 세력은 수구였고, 진보인 줄 알았던 민주당은 보수였기 때문입니다. 저쪽은 대놓고 기득권을 자처하고, 이쪽은 아닌 척 하면서 기득권을 챙겼습니다. 그나마 도덕적 우월감이 자산이었는데, 이제는 그마저도 자본 잠식 상태인 것처럼 보입니다. 청년들이 정치에 혐오감을 갖고, 수구 정당의 후보를 지지하는 현상은 이러한 기득권 돌려막기에 파산선고를 내린 것이라 하면 너무 과한가요? 군사독재 시대의 비정상 사회가 민주주의 시대의 비정상 사회로 수평이동 한 것은 아닌지 묻고 싶습니다. 이런 가운데 ‘그래도 진보 세력이 한 번 더 집권해야 하지 않겠느냐?’ 하는 것은 허상이 아닐까요? 진보가 알고 보니 진보가 아니니까요.

 

저는 에큐메니칼 운동과 민주화에 헌신한 분들의 노력과 진심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지금 자신과 동일한 입장을 가졌다고 생각되는 세력이, 선배님들이 과거 어둠의 시대를 지나면서 가졌던 생각과 같은지, 진정한 진보인지 물어보는 과정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번 선거는 정책과 토론이 실종되었다고 말하지만 정작 ‘우리’ 안에도 이런 모습이 사라진 것은 아닌지 심히 우려됩니다. 과거 대통령 선거를 보자면 ‘비판적 지지’, ‘민중 후보’ 등의 예처럼 여러 입장이 치열한 갑론을박을 거쳤습니다. 다시는 안 볼 것처럼 싸우기도 했지만, ‘다양성 속의 일치가 우리의 첫 번째 원칙’이라는 아름다운 동의가 있었기에 다시 큰 물줄기로 합쳐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최근의 모습을 보면 대화와 토론은 사라진 채 자신의 입장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상대방의 동의 여부에는 상관없이 의제를 제시하고 그에 동의하지 않으면 ‘아직 세상을 몰라서 그래. 어떻게 진보가 그럴 수 있느냐?’ 하는 식으로 치부해버립니다. 그럴수록 후배들은 그렇게 말하는 선배들과 담을 쌓고 지낼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에큐메니칼 진영 안에 토론과 대화의 구조 및 문화가 복원되길 바랍니다. 또한 운동 선배들이 한 후보에 대한 지지를 요청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거대 양당이 지배하는 정치 구조를 바꿀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을 함께 제시했으면 좋겠습니다. 진의가 어떠하든, 정작 민주당에서는 한 표라도 더 얻기 위해 다당제를 염두에 둔 ‘정치개혁안’을 당론으로 정하는 판에 우리가 그들보다도 빈곤한 상상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됩니다.

 

저는 현상이 아닌 ‘체제를 바꾸자’는 선배들의 꼬임에 넘어가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하나님 나라 운동, 참 근사해보였습니다. 신자유주의의 물결 속에서 저 거대한 장벽을 도무지 넘을 수 없을 것 같은 무력감에 사로잡혔을 때, 매번 기꺼이 실패에 동참했던 에큐메니칼 운동의 역사, 그리고 그 도도한 역사 안에서 찢어진 깃발이라도 들고 서 있었던 운동 선배들의 모습을 보며 눈물을 훔치고는 다시 일어났습니다. 지금 그 선배들은 어디 갔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