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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신학 2기/대선정국, 외면당하는 낮은 목소리들

신천지, 주술, 그리고 에큐메니칼 / 고 성 휘

 

고 성 휘 (NCCK 교육위원)

 

오래전 일이다. 강원지역 세습무 연행을 연구하기 위해 강릉 단오제 굿에 참여한 적이 있다. 세습무의 굿 내용, 절차, 사용하는 장단, 선율, 세습무 가계도 등을 기록하는 중에 그들의 연행에 대한 지극한 정성을 보았다. 우리는 예배를 위해 이렇게 정성을 기울였던가 반성을 하게 된 대목이었다. 한참을 뛰면서 굿을 벌이는 중 꽃 하나가 방향이 잘못된 것을 본 그들은 연행을 멈췄다. 냉정했다. 사소한 꽃 하나 때문에. 그리고 다시 시작된 연행. 6시간이 넘게 번갈아 가며 굿을 행하던 그들이 서서히 지쳐갈 때쯤 뒤에서 허리 굽은 할머님이 나오셨다. 치마를 들쳐 올리고 그 안에 또 옷을 들쳐 올려 꼬깃꼬깃 만 원 한 장을 소중히 꺼내셨다. 헌금이다. 무당은 손가락 하나만큼 접혀있었던 만원을 한참 쳐다보았다. 그리곤 만원을 어떻게 모았냐고 물어보는 것 같았다. 소곤소곤, 중얼중얼 그리고 끄덕임. 세습무는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말을 꺼냈다. 이분에게 제일 소중할 만 원 한 장의 가치를 설명하였다. 그리고선 굿을 시작하는데 이전의 굿과는 사뭇 다른 농축된 땀을 뻘뻘 흘리며 “이 할매의 소원을 들어주시고... 이 할매의 소원이 온 동네 온 마을 온 사회에 거름이 되게 하시고...만복이 이 할매에게 오게 하시어 할매의 삶이 형통케 하소서”...세습무의 간절함은 그녀의 연행에서 묻어났다. 만 원짜리 한 장에 6시간 동안 방방 뛰는 굿을 하고도 다시 일어나 한 시간여 지극정성을 들인 굿을 마치고 잠시의 휴식을 갖는데 그들의 얼굴이 환했다.

 

가난한 과부의 헌금이 생각났다. 오늘날의 교회는 만 원 한 장에 이토록 온 정성을 다해 복을 빌어주는가. 이들의 민간신앙보다 고등종교라 자처하는 기독교가 나은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기독교는 복을 빌어주는 종교가 아니니 그들과 다르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가. 만 원 한 장의 정성에도 복을 빌어주는 그들의 기반은 민중의 삶에 있었다. ‘우리는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자’...며 떠들썩한 동네 어르신들의 “얼씨구” 한판은 중재로서의 무당과 서로를 격려하는 민중들의 어울림이었다. 그냥 그들은 민중과 함께 두루뭉술 살아가는 삶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다. 특정한 공간을 공유하지 않아도 그들은 삶 자체로 힘이 있는 공동체였다.

 

최근 대통령 후보의 비선실세로 떠오른 주술집단에는 이런 민중의 삶이 배어있던가. 무교에서 함께 출발한 것이라 여길 그들 집단 안에는 민중의 삶이 존재하지 않는다. 민중의 염원을 기복과 사행심으로 탈바꿈하여 복을 빌어주고 사리사욕을 채우는 주술집단의 이익만이 존재할 뿐이다. 민간신앙에 사행심을 부추겨 사적 이익을 취하고 중재자로서의 무당이 아닌 권력자로서 무당의 위치를 획득한 그들이다. 게다가 자신들의 사적 이익을 더 확대하고 공고화하기 위해 정치와 오랜 밀월관계를 이어오기도 하였다. 이들의 문제는 어떤 특정 종교를 넘어서 권력을 탐하는 자들과의 끝없는 밀월관계를 바탕으로 한 사적 이익 추구에 있다.

 

사적 이익을 취하려는 종교는 어떤 종교이든 매한가지이다. 신천지 집단이 이단이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보다 훨씬 더 넘어서는 문제, 즉 그들이 표방하는 종교를 가장하여 사적 탐욕을 채우려는 문제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돈 없는 자들의 주머니를 털면서 황금빛 미래를 꿈꾸게 하고 (그것이 현세이든 내세이든) 정든 가정에서 이탈하게 하며, 일터에 가야 할 사람들을 포교수단으로 활용하여 사람들의 정상적인 삶을 황폐하게 만든다. 삶에서 분리시켜 특정한 종교 논리에 복종하게 만들어 그들의 목소리를 무음으로 만든다. 그 안에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한 많은 목소리를 찾아볼 길이 없다. 신도들의 목소리가 없는 종교. 오로지 신도들을 복종시킬 명령어만 존재한다. 대구 코로나 확산 때문에 신천지 교인이라는 것을 숨기고 죄인 아닌 죄인이 되어 숨죽여야 했던 수많은 신도들의 척박한 삶이 가슴 아플 때, 신천지를 대표하는 자들의 변명은 한결같았다. 그 안에 신도들의 암담하고도 척박한 삶을 걱정하는 자들의 언어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로지 자신들의 존재근거가 흔들릴까봐 걱정하는 명령어만 존재하였다. ‘신천지임을 숨겨라’ 가슴 아픈 일이었다.

 

이제 먼 길을 돌아 기독교로 와 본다. 기독교는 위의 주술집단이나 신천지와 어떻게 다른가? 기복, 사행심을 부추기는 일이나 신도들을 복종시킬 명령어만 존재하는 집단, 사적 이익을 영구지속시키기 위해 종교라는 틀 뒤에 숨어 꼼수를 부리는 집단과는 전혀 다른 종교로서 과연 존재하였던가? 권력 유착의 역사 앞에 기독교 역시 자유롭지 않았음을 반성해야 할 일이다. 1969년 삼선개헌지지, 1972년 유신헌법지지, 1980년 신군부를 위한 국가조찬기도회 등 국가권력과 유착하여 얻어 낸 절대 이익 집단 안에 민중은 없다. 가난하고 또 가난했을, 그럼에도 하루 품삯 한 푼 두 푼을 하나님께로 향하는 헌금이라고 제단에 바치는 민중들의 푼돈을 모아 자기 배를 채우며 자금 운용의 지속성을 위해 변칙 세습을 하는 집단이 존재하는 한, 우리는 그 어떤 이단 집단에게도 돌을 던질 수 없다. 현재 보수 기독교인들이 종교의 정통성 시비 등으로 그토록 부르짖던 이단의 정죄함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대신 주술집단과 밀착된 한 정치인을 지지하는 모습으로 탈바꿈한 것만 봐도 그동안 정통종교와 이단과의 시시비비는 모두 권력과 사적 이익에의 탐욕에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주지 않는가. 그들에게는 종교의 정통성과 이단과의 문제가 아니라 혐오, 서로의 차이를 종교 정통성의 차별로 갈라 권력을 누리려는 집단의 탐욕만이 있었을 뿐이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루살렘 성전에서 허가된 장사를 했던 장사치들의 실체다. 이익이 남지 않아 거부했던 화폐를 이제는 받을 뿐이다. 멸시하면서.

 

이제 남은 하나, 다시 되묻고 또 다짐해야 하는 일은 사회적 약자의 돌봄이라는 공동체적 염원이 원칙으로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다. 원칙과 진영 사이의 거리가 존재한다면 결과는 모두 매한가지일 뿐이다. 만일 목적과 기독교적 사명이 일치되지 않는다면 집단의 이익 우선행위와 한치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결과에 다다르기 위해 이단의 비정통성 문제를 제기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비민중성을 엄밀히 꾸짖고, 민중의 삶과 그들에 대한 돌봄이 우선이 되는 원칙을 철저하게 지켜야만 한다. 그 원칙이 존재하지 않는 한, 민중에게 그들 자신의 말을 돌려주고 함께 어우러지는 삶을 공유하지 않는 한 주술과 신천지와 기독교는 별반 다를 것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