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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신학 2기/우리사회 가족에 대한 판타지–정상가족

태초에 가족이 있었다? / 채송희

 

 

채송희 (교회여성 네트워크 움트다)

 

개신교 신앙에서 ‘가족’은 중요한 개념이다. 우리가 신앙 안에서 인식하는 ‘가족’은 우리에게 친밀감과 소속감을 주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누군가를 배제하고 차별하는 기제가 될 수도 있다. 가족은 결혼, 혈연, 입양 등으로 연결된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이다. 일반적으로 가족은 혼인을 통한 공동주거, 사회적으로 허용된 성관계, 입양을 포함한 재생산, 경제협력 등을 특징으로 한다. 가족 구성원들은 가족 공동체 안에서 경제적 협력, 성별 분업, 상호 돌봄, 합법적인 성관계, 출산과 양육, 정서적 지지, 애정관계 유지 등을 기대하거나 요구받는다.

 

가족이라는 단위를 보는 두 가지의 관점이 있다. 하나는 생물학적인 관점인데 이는 가족이라는 제도가 인간의 생물학적 본성에 기인한다고 보는 입장이다. 다시 말해 인간은 누구나 본능적으로 가족을 만들어서 그 안에서 경제적 협력을 하고, 생물학적 재생산을 하고, 정서적 안정을 얻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가족을 사회학적인 관점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즉 이런 관점에서 가족은 문화의 영향을 받는 사회적 제도이다. 가족은 자연스럽게 사회의 변화에 영향을 받게 되며 사회가 변화하면 가족생활과 가족관계도 변화한다. 전통적으로 가족은 혈연에 기반을 둔, 애정을 주고받는, 함께 사는 공동체라고 정의되어왔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의 삶을 볼 때 이 조건에 모두 들어맞는 가족은 과연 얼마나 될까?

 

태초에 가족이 있었다?

 

교회에서 ‘가족’은 신앙생활의 중심에 있다. ‘OOO 장로님의 아들’, ‘OOO 집사님의 딸’과 같은 표현을 교회에서 쉽게 들을 수 있다. “하나님이 직접 만드신 제도가 두 개 있는데 그게 바로 ‘가족’과 ‘교회’다”와 같은 말도 낯설지 않다. 창세기 2장을 근거로 이와 같은 말을 하게 되면 이는 가족이 생물학적 본능으로 생긴다는 입장보다도 더 가족이라는 제도를 강조하게 된다. 가족이 하나님이 직접 만드신 제도라고 한다면 가족은 신성불가침한 영역과 닿아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대체 어떤 형태의 가족이 ‘성경적인 가족’일까?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니 아브라함의 가족을 이상적 가족형태로 보면 되는 걸까? 아브라함이 살던 시대는 부족사회였다. 베스터호프라는 학자는 이 시기의 가족은 가부장을 중심으로 아내, 자녀들, 첩과 그 아이들, 사위와 며느리, 손자와 손녀, 고아와 과부의 자손과 사생아들, 나그네와 같은 이방인들, 그리고 그들과 같이 살고자 하는 주변 사람 모두를 포함하는 일종의 ‘부족적 가족’이었다고 말한다. 산업사회 이후를 살고 있는 오늘의 우리들이 이런 가족 형태를 유지하는 건 당연히 어렵다. 게다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사실은 아브라함과 아버지는 같고 어머니는 다른 누이였다고 하는데(창 20:12) 오늘날 우리가 형제자매와 결혼을 하는 것도 말이 안 된다. 대한민국에서 8촌 이내 혈족 사이의 결혼은 민법으로 금지하고 있으니까. 아브라함은 사라말고도 하갈에게서도 자녀를 낳았다. 일부다처제는 그 시대에는 낯선 것이 아니었다. 신약으로 넘어가보자. 신약이 기록된 1세기에 가족은 친척과 하인을 포함하는 개념이었다. 구약보다는 좀 더 간소해졌지만 여전히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가족의 형태와는 많이 다르다. 지난 2천 년 동안 역사적으로 기독교인들이 경험한 가족의 형태는 시대마다 변화했다. 그러므로 성경에 나타난 특정한 가족의 형태가 ‘성경적 가족’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게다가 부모와 미혼 자녀로 이루어진 핵가족은 구약과 신약을 통틀어 성경 시대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성경에는 가족구성원의 올바른(?) 역할을 알려주는 것 같은 구절도 종종 등장한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엡 5:22-24) 텍스트가 서술하고 있는 문화적, 사회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그것을 무조건 오늘날에도 적용되는 걸로 치환하는 것은 위험하다. 성경에는 종(노예)에 대한 본문이 많이 등장하는데 그 본문을 오늘날에도 노예제도나 인종차별을 지지하는 본문으로 읽어서는 곤란한 것과 마찬가지다. 또한 성경의 전체적인 맥락을 보지 않고 일부 구절만을 떼어내어 읽는 것도 옳지 않다. 이런 방식은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생각을 강화하는 식으로 성경을 해석할 위험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위의 말씀은 종종 가정 안에서의 위계를 정당화하는 방식, 즉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해야한다는 논리를 입증하는 방식으로 사용되어 왔다. 하지만 이 구절 바로 앞에는 이런 말씀이 있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 5:21) 남편과 아내에게 서로에게 복종할 것을 당부하는 것이다. 아울러 28절에는 이런 말씀도 있다.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과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엡 5:28) 이 말씀이 잘 지켜지지 않아서 개신교 가정에서 아내들에게 가해지는 다양한 방식의 폭력에 대해서 교회는 잘 말하지 않는다. 성경의 앞뒤 맥락을 전체적으로 고려하지 않고 일부 구절에 집중해서 아내들이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이 신앙의 미덕인 것처럼 강조하는 것은 성경을 올바르게 보는 방식이 아니다.

 

그렇다면 대체 ‘성경적 가족’ 혹은 ‘기독교적 가족’이라는 건 어떤 걸까? 과연 그런 게 있기는 한 걸까?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마가복음 3장의 이야기이다. 예수님이 무리들과 같이 있을 때 누군가가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예수님을 찾아왔다는 소식을 예수님에게 전했다. 그때 예수님은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고 반문하시면서 둘러앉은 사람들을 향해 말씀하셨다. “바로 너희가 내 어머니이고 동생들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들이 내 형제고 자매고 어머니이다.” 아마도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그 누구도 가족에 대한 이런 정의는 들어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당시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가족에 대한 개념에 강력하게 도전하며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새로운 가족에 대해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말하는 예수님의 새로운 가족은 혈연을 뛰어넘는 공동체였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동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예수님의 가족이 될 수 있다. 어떠한 차별도 없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성경적 가족’에 대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눅 14:16),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마19:29). 이런 말씀들을 보면 예수님은 가족 공동체를 해체하려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그 호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 혹은 그리스도와 지향이 비슷한 사람들이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그리스도인들은 종종 가정파괴자라는 오해를 받았다. 사실 오해라고 하기에는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말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가족의 개념을 확장했고 피가 섞이지 않은 교회 공동체의 사람들을 진짜 형제, 자매처럼 대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좀 오글거리기는 하지만 오늘날까지도 교회에서 서로를 ‘형제님’, ‘자매님’하고 부르기도 하나 보다.

 

교회, 그리고 가족

 

다시 우리들이 속한 교회 공동체의 이야기를 해보자. 교회에서는 ‘가족’을 굉장히 강조한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교회에서 말하는 가족의 형태는 암묵적으로 규정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주로 부모와 미혼자녀로 이루어진 핵가족이다. 가족에는 결혼을 한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고 그들의 돌봄과 양육을 받는 자녀들이 있다. 그런 형태를 갖춘 가족이 개신교 가족의 모범이라고 여겨진다. 좋은 신앙인이라면 좋은 배우자를 만나서 결혼을 해서 자녀를 낳고 그 자녀를 믿음으로 잘 길러야 한다. 그게 규범이기 때문에 그렇지 않은 사람들, 예를 들어 나이가 찼는데도 결혼을 하지 않는다거나, 결혼을 했는데도 자녀가 없다거나, 사정이 있어서 이혼을 했다거나 하는 건 모두 뭔가 부족하거나 혹은 잘못된 거라고 여기기 쉽다. 여기서 가치판단이 개입된다. 물론 서로 사랑하는 남자와 여자가 만나 결혼을 해서 가족이 되고 자녀를 낳고 자녀를 잘 돌보는 건 너무나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게 과연 하나님이 원하시는 가족의 유일한 형태와 기능인지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교회에서 너무나 당연하게 그렇다고 여겨지는 일들이 사실 한걸음 물러서서 생각해보면 다르게 보이는 경우들이 종종 있다.

 

앞에서 우리는 성경에서 시대와 문화를 초월한, 보편적인 가족의 형태를 찾기는 어렵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오늘날 교회에서 말하는 가족의 형태는 암묵적으로 정해져 있을 때가 많다고도 말했다. 왜 그럴까? 이것은 한국 사회의 상황과 관련이 있다. 교회에서만 그러는 게 아니라 한국 사회에서도 1960년대 이후 남자와 여자가 결혼해서 자녀를 키우는 핵가족을 가족 형태의 규범으로 여겨왔다. 이런 가족의 형태를 규범화한 현상에 대해 사회학에서는 ‘정상가족’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정상’이라는 말에는 정상이 아닌 상태, 즉, ‘비정상’이 존재한다는 뜻이 숨어 있다. 대체 누가 왜 이런 가족의 형태를 정상이라고 말했을까? 한국 사회는 1960년대 이후 급속한 근대화와 산업화를 경험했다. 부모와 미혼자녀로 이루어진 핵가족이 그 당시에는 가장 적합한 가족의 형태였다. 아버지는 열심히 일을 해서 돈을 벌고, 어머니는 대신 집에서 살림을 하면서 자녀를 양육했다. 사회복지가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이라서 가족끼리 뭉쳐서 힘을 모아 살아남을 수밖에 없었다. 또 경제성장을 최우선으로 여겼던 정부도 이런 정상가족이 규범이라는 생각을 부추겼다.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도 가족 중심주의가 강한 민족이다. 심지어는 같은 아시아 국가인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서도 그렇다. 여기에 근대화의 생존 문제까지 더해지니 산업화에 적합한 핵가족을 정상가족으로 여기는 독특한 한국적 가족주의가 발달하게 되었다.

 

문제는 이런 정상가족에 대한 규범이 교회에서 수용이 되었다는 점이다. 아니 수용이 된 정도가 아니라 ‘신앙’이라는 미명하에 강화되기까지 했다. 이런 정상가족에 대한 강조는 얼핏 보면 굉장히 은혜로워 보이지만 정상가족에 속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배제하고 차별하는 기제로 작동할 수도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와 그들의 자녀로 이루어진 중산층 가족이 교회에서 신앙적 규범으로 제시될 때 오늘날의 다양한 가족의 형태를 소외시키게 된다. 미혼자, 비혼자, 이혼자를 비롯한 다양한 1인 가족, 한부모 가족, 조손 가족, 무자녀 가족, 청소년이 가장인 가족, 재혼 가족, 만혼 가족, 다문화 가족, 이주민 가족, 빈민 가족, 실업 가족 등은 교회에서 편안하게 발을 딛고 있기가 어렵다. 이러한 소외는 앞에서 말한 설교에서뿐만 아니라 교회에서 사용되는 언어, 교회 행사, 교회의 구조 등에서 다양하게 발생한다. 통계청이 2021년 7월에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대한민국 전체 가구의 31.7%가 1인 가구로 가장 많고 다음으로는 28.0%인 2인 가구가 많다. 다시 말해 혼자 살거나 둘이 사는 가구수가 전체 가구의 60%에 육박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교회에서 그런 가족들은 여전히 주변부에 있거나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

 

오늘, 예수의 가족

 

지구화, 전 세계적 이주 현상, 전통과 절대적인 권위에 도전하는 포스트모더니즘, 4차 산업혁명, 메타버스를 비롯한 가상현실, AI의 등장으로 인해 전통적인 혹은 근대적인 가족의 개념과 형태는 해체되고 있는 추세다. 교회도 이런 사실을 인식하고 또 이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한국 교회를 보면 이러한 흐름을 성경적 가족에 대한 도전으로 보고 전통적 가족 혹은, 가부장적 가족으로 회귀하려는 시도를 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은 절대로 대안이 될 수 없다. 유통기한이 이미 지났다. 그렇다면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니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예수님이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들이 내 형제고 자매고 어머니이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 말을 듣고 마음이 불편했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예수님이 혈연공동체인 당시의 가정을 해체하고 무너뜨린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단순히 해체하고 무너뜨리는 게 목적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이 말씀과 함께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가지고 오셨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새로운 가족을 선포하셨다. 그 가족은 핏줄과 결혼으로 연결된 가족의 개념과는 비교할 수 없이 크고, 새롭고, 다양하고, 급진적이고도 종말적인 공동체였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교회는 교회 공동체 안에 예수님이 말한 가족을 이루어 가기 위해 지금껏 우리가 신앙적 규범으로 생각해 온 가족에 대한 개념을 다시 생각해 보고, 다양한 가족의 형태를 포용해야 한다. 김혜령 교수는 예수님이 말한 가족 개념의 확장이 사랑받는 대상을 확대시키는 것에 머물러서는 안 되며 이 시대 가족들이 겪는 아픔과 불행이 혹시 우리 모두가 속해있는 사회의 구조적 문제와 교회의 무관심한 태도에서 기인한 것은 아닌지 정의의 관점에서 성찰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말하는데 이는 오늘날 우리가 꼭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 참고문헌

김은혜. “한국사회의 가족해체와 가족신학의 정립의 필요성 장신논단.” 『장신논단』 39권(2010. 12), 223-250쪽.

김혜령. “김은혜 교수님의 <한국사회의 가족해체와 가족신학의 정립의 필요성>을 읽고 펼치는 짧은 생각 – 공공신학과 어울리는 가족신학을 위하여,” 『여성신학』75권(2012. 8), 22-27쪽.

 

이 글은 서울YWCA가 서울시 성평등 기금으로 2021년에 발행한 『샬롬, 페미니즘입니다』에 실었던 글을 다듬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