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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신학 2기/우리사회 가족에 대한 판타지–정상가족

우리는 졸지에 ‘비정상 가족’이 되었다 / 박새롬

 

박새롬 (순천덕신교회)

 

1

“가족이 함께 살아야지 떨어져 사는 건 비정상 아닌가?” 내 삶에서 ‘비정상’ 이야기를 들을 줄은 몰랐다. 오랜만에 시부모님과 시누이 가족들 나와 아들이 모인 자리에서 남편과 떨어져 지내는 우리 가족을 ‘비정상’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우리 가족이 살아가는 모습을 많은 사람이 걱정하며, ‘언제 남편 있는 곳으로 이사 가느냐?’ ‘남편과 같이 살아야 하지 않겠냐?’는 수백 번의 질문에도 내적 평화로움을 가지고 답할 수 있는 내공이 쌓였다고 생각했는데 ‘비정상’이라는 단어에 나의 평화로움은 깨어졌다.

 

“요즘 세상에 정상, 비정상을 운운하는 것 자체가 사회적 감수성 없는 일이지 않나?”

나는 결코 평화롭지 못한 방식으로 ‘네가 한 말에 부끄러움을 주겠노라’는 마음으로 맞받아쳤다. 우리는 졸지에 ‘비정상 가족’이 되었다. 남편과 아내가 떨어져 산다는 이유로...

 

어느 날 아이가 내게 물었다. “엄마 우리 가족 이혼했어?” 멋쩍은 웃음을 내보이며 묻는 아이의 질문에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용기를 내어 묻는 아이와 이런 상황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다는 호기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함께 사는 가족의 삶의 내용에 관심보다 표면적인 가족의 모습으로 정상과 비정상(이혼한가정)을 구분 짓는 우리 사회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2.


우리 가족은 나, 남편, 초등학교 5학년 남자아이 이렇게 3명이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다. 엄마가 아이를 키워야 한다고 모두가 말할 때 나는 신대원 과정을 시작했고, 목사인 남편의 아내로 사모로서 살기를 원할 때 나는 나의 사역을 시작했다. 우리 가족은 누군가를 위하여 살기보다 나로 살아가며 우리가 되는 것을 선택한 가족이었다. 처음부터 그런 선택을 지향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희생과 헌신의 강요로 누군가는 불행한 구성원이 되기보다 서로가 희생하며 함께 행복한 가정을 만드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이 공유되면서 흔히 ‘정상’이라고 말하는 틀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이 염려하고 걱정하는 가족의 모습이다. “부부가, 가족이, 엄마와 아이가 같이 살아야지... ”라는 말을 많이 한다. 우리 가족 삶의 형태를 응원하거나 지지하는 사람들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우리 가족은 누구보다 이 삶의 형태를 지지하며 각자의 삶을 살아간다.


2년 동안, 남편이 자신의 일을 선택하며 가족과 떨어져 지내게 되었다. 목회자인 남편이 사역지를 찾아가면 가족들이 따라가는 것이 정상이겠지만 각자의 삶의 상황을 살피는 방법을 찾다 보니 떨어져 살게 되었다. 또한 우리의 삶을 돌보기 위해 다시 모여 살기도 했다. 그러다가 이제는 나의 사역지가 옮겨져서 다시 떨어져 살게 되는 삶을 살고 있다. 처음엔 나와 아이가, 지금은 남편과 아이가 함께 생활하고 있다.

 

새로운 삶의 방식을 선택하고 지내는 어느 날, 아이의 식습관 걱정, 아이의 교육 걱정 등에 대해 남편이 내게 어려움을 호소하였다. 나는 남편의 어려움의 호소가 반가웠다. 지금까지 아이를 교육하는 것은 나의 일이라고 여기며 지칠 때도 있고 서운함을 가질 때도 있었으나, 지금은 남편이 홀로 양육자로서 내가 했던 고민들을 하기 시작하였다. 남편은 아이의 교육과 양육에 있어서 근거리 양육자인 자신의 방식을 수용해주길 요청했다. 이제야 아이 양육에서 함께 고민하고 공감하는 일이 시작되었다는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나의 일이라 여겨졌던 가족의 일이 우리의 일이 되는 것을 경험하는 순간이었다.

 

3.

우리 가족에게는 우선시 되는 사람의 의견은 없다. 그 상황에서 더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의 의견이 우선시 된다. 아이가 아빠와 살기를 선택한 것은 그에게 안정적인 환경이 더 중요했기에 스스로 선택한 결정이었다. 내가 가족을 떠나 사역을 시작하게 된 것도 그 상황에서 나에게 그 일이 필요하고 해야 하는 일로 여겼던 가족들의 결정이었다. 여성이 교회 현장에서 사역하는 것이 제한적이라는 현실 인식에서 가족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이유로 제한받지 않아야 한다는 가족들의 배려이며 희생이었다. 이 순간에 먼저 돌봐져야 하는 것은 ‘엄마의 꿈을 응원하는 것, 여성으로 현장 목회의 좁은 무대에서 사역하는 아내를 응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이의 거주할 곳도 아이의 의견으로 선택을 하였다. 우리는 부모로서 ‘돌봄의 가치’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여 엄마와 함께 사는 것에 대한 제안을 먼저 했지만 아이가 더 중요하게 여기는 ‘우정의 가치’를 수용할 수 밖에 없었다. 환경의 변화에 더 영향을 받을 수 있는 나이, 상황이라는 것과 아이의 선택을 존중하기 위함이었다.

 

우리 가족은 다양한 형태로 지내며 배운 것들이 많다.

가족의 의사결정을 하는 법, 우리 가족 의사결정의 기준은 더 약한 곳이다. 가족의 유대감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양도 중요하지만, 질도 중요하다. 떨어져 살면서 서로의 삶이 괜찮은지, 그렇지 않은지를 더 세심하게 살피게 되었다. 고마운 것, 미안한 것, 함께라서 더 좋은 것의 의미를 더 많이 생각해 보게 되었다. 무엇보다 스스로 잘 존재하며 함께 연결되는 삶의 방식을 배워가고 있다.

 

무엇보다 성인으로 결혼했지만 완전한 성인이지 않은 나와 남편이 더 성숙할 수 있는 배움과 성찰의 시간을 갖게 되었다. 나와 남편은 혼자 살아본 시간이 없이 함께 살기를 시작했던 사람들이었다. 결혼 이후 함께 사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어려움을 다시 혼자만의 시간 동안 배우고 해결하며 성장하는 각자의 모습을 바라 본다.

“지금까진 괜찮아! 문제 없어! 그러나 함께 사는 날을 준비해보자” 우리 3명의 이야기이다.

 

4.

 

무엇이 정상일까? 가족 구성원 모두 자신 중요한 방식을 선택하면서 서로 돕는 것이 비정상인가? 한 사람의 포기와 희생으로 만들어진 가정이 정상인가?

 

서로의 일을 결정할 때 모두의 만족함을 위하여 떨어져 있기를 동의하는 것이 비정상인가? 세 가족이 함께 살아야 하는 이유로 누군가의 의견만 성취되는 것이 정상인가?

 

각각 구성원들이 서로의 꿈을 지지하며 각자의 자리에 살아가는 것이 비정상인가? 각각 구성원들이 한 사람의 꿈을 위해 자기의 자리를 포기하는 것이 정상인가?

 

우리는 떨어져 있든 함께 있든 각자의 의견을 존중하는 방식을 선택한다. 이것이 정상이 아니라면 무엇이 정상일까?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며 묻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우리의 모든 가족의 형태는 그 존재 자체로 의미가 있고 소중하다. 누구도 자신의 기준에서 한 가족의 통합적인 삶의 모습을 볼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 우리 가족이 처음 떨어져 살 때, 우리 스스로도 지금은 불완전한 가족이다라는 생각을 하며 늘 아쉽게 지냈다. 다른 사람들의 핀잔 어린 질문에 위축되어 지냈다. 마치 우리가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잘못 살고 있는 사람들처럼 스스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 시간들이 우리에게 주는 배움을 나누며 우린 더이상 불완전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비정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 가족의 고유한 스토리이며 우정이다. 이 삶 안에는 우리만의 고유한 사랑과 아픔과 위로와 우정과 격려가 있다.

 

이 고유함을 어떤 기준에 의해 비정상과 정상으로 나눌 수 있을까? 우리 가족은 지금도 자라고 있는 중이다. 각 사람은 더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존재로 성장하고 있다. 또한 독립된 존재들이 서로를 수용하고 지지하며 친교하는 것, 연합하는 것을 배워나가고 있다. 배움의 방식은 일률적이지 않다. 각 사람이 다양한 것처럼 배움의 방식도 다양하고 배움의 공간의 모습과 내용도 다양하다. 각 가정의 모습들이 다양하고 그 안의 삶의 내용들이 다양한 것처럼. 이 우주 안에서 하나의 주체적인 존재로 연합하며 살아가는 것을 배우는 작은 공동체가 우리 가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