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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신학 2기/우리사회 가족에 대한 판타지–정상가족

정상 가족의 새로운 패러다임: 트랜스미션과 수열체 집단 / 최병학

 

최병학 목사 (남부산용호교회, 동아대 기초교양대학 조교수)

 

<사르트르의 장례식을 위해 모인 3만여 명의 군중들>

 

1. 들어가며

 

현재 우리 사회는 가족에 관해 ‘정상가족’이라는 담론에 치우쳐있어,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 가족은 비정상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가족에 대한 환상은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배제, 젠더 또는 세대 간의 갈등으로 증폭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가족의 유형은 무엇일까요? 이 글에서는 정상 가족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축하고자, 다가올 인공지능(AI) 시대에는 어떻게 가족이 구성되는지 소개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 대안으로 사르트르의 집단 구분을 정상 가족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제시하고자 합니다.

 

2. 가족, 국가 보육시설이 대신하다!

 

서석찬의 소설 『에덴』 (델피노, 2019)은 트랜스미션(Transmission, 전송)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트랜스미션이란 두뇌의 전기 신호를 인공두뇌와 인공 육체로 전송하는 수술을 말합니다. 이제 인류는 언어라는 장벽을 무너뜨리고 죽음이라는 신의 영역에 발을 디디게 되었습니다. 소설은 그 시대를 배경으로 합니다. 곧 인공두뇌와 육체로 죽지 않는 존재가 되어 버린 인류의 모습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공지능은 인간인가요?, 인간이 아닌가요? 또한 이때 가족이란 어떤 의미일까요? 소설 속으로 들어가 볼까요?

 

먼저 주인공 신우와 그의 연인 수진이 사는 세상은 언어도 ‘언어 임플란트 서비스’로 원어민과 같은 외국어 실력을 갖출 수 있게 된 세상입니다. 또한 트랜스미션을 거쳐 더 이상 죽음이라는 인간적 한계에 얽매이지 않는 시대입니다. 소설은 그 시대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트랜스미션이 보편화되기 전에는 부모가 아이들을 키우며 가족 단위의 삶을 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부모가 전통주의자거나, 트랜스미션 수술을 받았으나 자녀를 직접 양육하기를 원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아이들은 라라처럼 국제 정부에서 제공하는 보육시설에서 지내다가 성인이 되면 독립해서 살게 된다.”

 

기존 정상 가족 개념을 해체합니다. 아니, 아예 가족의 기능을 국가 보육시설이 대체하죠? 이렇게 지구촌은 급속도로 변할 것입니다. 계속 소설이 묘사하는 시대를 읽어볼까요?

 

“21세기 지구에는 각각 다른 정치, 경제, 사회제도를 가진 국가들이 200여 개가 넘게 있었다. 지금 신우가 사는 지구의 NE8 지역은 그 당시 한국이라는 국가가 있던 곳이다. (중략) 케빈의 ‘천재성’은 우리가 흔히 주변에서 이야기하는 그 정도가 아니었다. 컴퓨터에 관해서라면 정말이지 특별했다. 케빈은 독학으로 8살 때 본인이 원하는 컴퓨터 게임을 스스로 만들었고, 11살이 되자 딥러닝을 기반으로 기초적인 수준의 인공지능을 개발했다.”

 

소설은 영원히 죽지 않는 피아니스트가 되겠다며 수진이 트랜스미션 수술(사람의 뇌와 신체를 인공 뇌와 신체로 교환하는 수술)을 받기로 결심하며 시작합니다. 그러나 전통주의자(트랜스미션에 반대하는 사람들)였던 신우는 수진의 결정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결국 두 사람은 헤어집니다.

 

“모든 게 완벽한 듯 보이는 사회 시스템은 가끔 신우를 숨 막히게 했다. 막연히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에 최근 개발이 한창인 화성에서 몇 년 정도 일하면서 경험을 쌓아볼까 생각했지만, 인간의 몸을 가지고는 화성에서 일할 수 없었다. 신우를 포함한 대부분의 상급학교 학생들은 졸업하고 25세인 기준 나이가 지나면 트랜스미션 수술(사람의 뇌와 신체를 인공 뇌와 인공신체로 교환하는 수술)을 받은 후에 화성에서 일정 기간 경험을 쌓고, 지구로 돌아와 정부 기관의 관리자로 선발되는 것이 최고의 엘리트 코스라고 믿었다. 하지만 신우는 트랜스미션 수술을 받는 게 싫었다. 자신의 몸을 안드로이드와 마찬가지인 인공신체로 교체하는 것은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이라 생각했다.”

 

이후 신우는 트랜스미션의 잘못을 파헤치려고 합니다. 거기서 ‘케빈 박’을 만나게 됩니다. 한국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때 인공지능 ‘나비’를 스스로 개발할 정도로 천재였습니다. 어버지가 사고로 뇌를 다치자, 인간의 마음과 영혼을 단순한 뇌신경 사이의 전기 신호가 아닐까라고 생각했으며, 15살에 어머니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간 이후에는 ‘스파익스’라는 회사를 만들고 ‘언어 임플란트 서비스’를 만들어 인류의 언어 장벽을 허물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알츠하이머병에 걸려 절망에 빠진 케빈은 에덴 프로젝트를 개발합니다. 두뇌 데이터를 인공두뇌에 전송하여 마침내 20대 시절의 육체를 다시 가지게 되고 알츠하이머를 비롯한 질병과 수명의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난 신인류로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케빈의 고백입니다.

 

“저의 아버지는 제가 어릴 적 교통사고로 뇌를 크게 다치셨습니다. 그 사고로 아버지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변하셨습니다.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저는 인간의 생각, 마음, 영혼들이 뇌신경들 사이의 전기신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고,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언어 임플란트 서비스를 성공시켰습니다. (중략) 이제 우리는 인공두뇌와 신체를 만들고, 이를 우리의 뇌 기술과 접목해 인간을 질병과 죽음에서 자유롭게 만들 것입니다.”

 

신우는 케빈 박을 추적하며 트랜스미션의 잘못을 파헤칩니다. 죽음도 인간의 권리이며, 트랜스미션 수술을 받는다는 건 나 자신을 잃는 행위라고 생각하는 신우는 트랜스미션을 반대하는 모임인 ‘크루세이도’에 가입하며 열정적으로 트랜스미션에 대한 진실을 밝혀내려고 합니다. 물론 그러한 과정에서 진실을 밝혀내는 것이 중요한 일인지 의구심과 회의감을 갖기도 합니다.

 

아무튼 신우는 수년이 지나도록 만족할 만한 성과를 얻지 못하자, 자신의 일에 회의감을 느낍니다. 사실 신우에게 트랜스미션은 사후 세계의 유무에 대한 논쟁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가령, 죽음을 겪어보기 전에는 사후 세계의 존재에 대해서 알 수 없고, 사후 세계를 알기 위해서 죽고 나면 다시 살아날 수 없습니다. 결국 신우는 트랜스미션의 진위를 알아내기 위해, 동료들에게 편지 한 통을 남기고 자신이 직접 트랜스미션 수술을 받게 됩니다.

 

이 소설은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사람과 동물이 다른 점은 무엇인가?”, “영혼이나 마음이란 것이 존재하는가?”, “뇌의 본질은 무엇인가?”, “영혼과 뇌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뇌를 다쳐도 영혼은 그대로 유지되는가?”, 그리고 우리 주제와 연결하여 가족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이제 다가올 세상은 우리의 영혼을 로봇과 다른 육체에 트랜스미션하여 그 정체성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세상이 될 것입니다. 이때 가족은 국가 보육시설이 대신합니다. 가족 개념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3. 수열체 집단, 융합집단, 서약집단

 

사르트르의 『변증법적 이성 비판』은 집단의 존재 구조와 혁명의 과정에 대한 흥미로운 철학적 분석을 담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르트르는 역사의 실타래를 ‘실천하는 개인’에서부터 풀어서 ‘타자와의 관계’, 나아가 ‘집단의 성장’을 추적하는 것으로 매듭을 짓습니다. 이것은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대자존재’인 인간이 어떻게 집단을 형성할 수 있는가?”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사르트르는 여기서 4가지 집단을 구별합니다. 그것은 ‘수열체 집단’, ‘융합 집단’, ‘서약 집단’과 ‘조직 집단 및 집단의 해체’입니다.

 

‘수열체 집단(grope-sérié)’이란 개인들이 병렬로 느슨하게 관계를 맺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무기력한 수동성을 그 특징으로 하는 것입니다. 사르트르는 버스의 예를 듭니다. 가령 파리의 생제르맹데프레 버스 정류소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임이 바로 수열체 집단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서로 모르며, 서로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없습니다. 그들은 다만 수열적으로, 즉 나란히 함께 있을 뿐입니다. 이들은 제각기 자신의 길을 가다가 잠시 모였을 뿐입니다. 가족을 포함하여 학교, 국가 등 모든 사회는 근본적으로 이러한 수열체라고 사르트르는 생각합니다. 1980년 4월 사르트르의 장례식을 위해 모인 3만여 명의 군중들도 바로 사르트르가 살아서 말한 수열체 집단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융합 집단(groupe en fusion)’은 이런 겁니다. 가령 우연히 같은 버스를 탔다 하더라도 사고가 나서 승객 모두가 위험에 처했을 때는 상황이 달라집니다. 이때는 휴머니즘이 발생하며 심지어 타인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경우도 생깁니다. 바로 이러한 집단을 사르트르는 융합 집단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융합 집단의 가장 완벽한 형태는 혁명 집단입니다.

 

프랑스의 예를 들어 볼까요? 1789년 6월 26일, 베르사이유 궁전에 있던 루이 16세는 2만 명의 외인부대를 파리에 주둔시키기로 결정합니다. 그러나 이 결정은 파리 시민들에게 위협으로 받아들여졌고, 결국 7월 14일, 이들은 바스티유 감옥을 공격합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프랑스 혁명 10년간의 대장정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습니다.

 

그저 그런 수열체 집단이었던 파리 시민들이 외부 위험(군대의 주둔)에 직면해 수동적인 상태에서 벗어나 위험에 대처하면서, 동시에 타자들 속에서 그들 자신을 발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모든 타자들이 나와 운명을 함께 한다는 자각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때 타자(그의 시선은 한때, ‘지옥’이었던)는 나의 부정이 아니라, 긍정이 됩니다. 수열체 역시 타자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우애적 상호성’의 폭발로 사라집니다. 수열체의 잔해 위에 융합 집단(혁명 대중)이 탄생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융합 집단의 폭풍 같은 열정이 사라지고 나면 어떻게 될까요? 촛불혁명 이후, 검찰공화국이 된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이겠지요? 이미 완성된 실천은 과거의 기억이 되고, 혁명 대중은 다시 수열체 집단으로 분해될 위기에 직면합니다. 사실 존재론적 지위를 갖지 못하는 융합 집단은 열기가 식으면서 해체됩니다. 이때 새로운 움직임이 일어납니다. 집단을 이탈하지 않고, 집단 속에서 공동의 목적을 추구할 것이라는 나와 그의 ‘서약’이 이루어지면서, 집단은 통일성을 확립하고 구성원 사이의 유대를 강화합니다. 바로 ‘서약 집단’의 탄생입니다.

 

그러나 융합 집단과는 달리, 서약 집단의 구성원들은 자신의 자유를 최대한으로 행사하면서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닙니다. 집단이 통일성과 영속성을 목적으로 하게 되면, 개인의 자유는 점차 위축됩니다. 집단에 대한 개인의 배반, 혹은 서약의 파기는 다만 단죄되어야 할 행동이며, 집단의 통일성은 더 이상 그의 자유에 의존하지 않게 됩니다.

 

여기서 사르트르는 ‘조직 집단 및 집단의 해체’를 이야기합니다. 수열체로 분해되는 것을 막기 위해 사용한 서약이 집단 구성원의 자유와 실천을 부정하는 결과를 낳는 것입니다. 자유를 부정하는 순간, 집단은 존재 이유를 상실하는 것입니다. 조직 집단은 타성이 만연하는 수열체 집단으로 전락하여 집단의 해체를 부릅니다.

 

따라서 사르트르는 ‘수열체로부터 융합 집단의 자발적 발생→서약으로 이루어진 집단의 존속→타성적 제도와 관료주의로의 점진적인 타락→수열체로의 다시 회귀!’ 이것이 인간 집단의 모습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좀 더 비관적인데, 이러한 집단 순환의 과정에서 인간은 타자와 함께 자유의 절정에서 점차 자유의 억압 상태로 하강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사르트르는 인간의 자유에 대해 강하게 집착하면서도, 기본적으로 관계 속에서 그것이 실현될 가능성에 대해서는 여전히 비관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혈연으로 맺어져 있지만 수열체 집단으로서의 가족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또한 혈연은 아니지만, 융합 집단으로서의 가족은 어떤가요? 정상 가족에 대한 고민을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어느 가족>(2018)이 아니더라도, 다가올 세상을 전망하며 고민하게 만듭니다.

 

4. 나오며

 

문득 사르트르의 생각을 쫓아가다, 지금 우리의 현실을 보니, 사르트르의 통찰이 맞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여기서 다시 헤겔의 생각은 우리들에게 새로운 세상의 가능성을 보여 줍니다. 역사를 ‘절대자의 자기실현 과정’으로 이해한 헤겔의 ‘이상주의’가 인본주의적인 사르트르의 눈에는 받아들일 수 없었겠지만, 그의 인본주의의 결과가 부정적이기에 우리는 새로운 세상을 이렇게 절대자의 자기실현이라는 희망으로 기대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요? 다시 칸트로 돌아가는 ‘형이상학의 쳇바퀴’, 그 아이러니입니다.

 

또한 트랜스미션에 대항하여, 썩어 없어질 이 육신의 나약함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며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다 정말 하늘나라, 하나님 나라로 가는 것은 어떨까요? 과학의 길과 신앙의 길이 이렇게 갈라집니다. 과학을 선택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재화가 필요하고, 신앙을 선택하기에는 인생 최고의 결단이 필요하네요. 정말 고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