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하는 그리스도인과 4월 혁명, 그리고 부활절
- 강성호('한국기독교 흑역사' 저자)
4월은 이상하리만치 한국 현대사의 분수령을 이룬 사건들이 몰려 있는 달입니다. 분단체제를 반대하며 발생했던 제주4․3사건(1948)과 자유당 정권을 무너트리고 민주주의 역사를 새로 쓴 4월 혁명(1960), 그리고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 4․16 세월호 참사(2014)까지. 4월부터 6월까지 이어지는 기간은 그야말로 한국 근현대사의 박람회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중 4월은 가장 집약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 기독교가 역사 밖의 초월적인 존재가 아니라 역사적 주체이다 보니 이 세 사건과도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제주4․3사건 때는 이북 지역에서 내려온 반공 청년들이 모여 만든 서북청년회가 무고한 민간인들을 잔혹하게 죽였습니다. 문제는 서북청년회의 핵심 멤버들이 기독교를 배경으로 삼은 경우가 많았다는 점입니다. 실증적 차원에서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게 많지만, 영락교회 청년들이 서북청년회에서 활약한 사실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외에도 서북청년회에서 테러를 일삼았던 인물들이 한국전쟁 후 교회 지도자로 변신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서북청년회의 테러를 지휘했던 임일이 나중에 ‘목사’로 활동한 사례를 들 수 있습니다. 유신 때 도시산업선교회를 용공조직으로 모함했던 가짜 뉴스 생산자 중에는 서청 출신의 경찰 간부인 김재국 장로가 있습니다. 이래저래 서북청년회와 기독교의 관계는 복잡하게 얽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그렇다고 극우 개신교의 뿌리를 서북청년회로 이야기하는 건 지나친 비약이라 할 수 있습니다).
종종 사람들은 4월 혁명 때 한국 기독교의 참여가 없었는지 물어봅니다. 아쉽게도 이때는 한국 기독교가 ‘저항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습니다. 아무래도 한국 기독교가 자유당 정권을 전적으로 지지하고 협력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히려 사회적 지탄을 받았습니다. 이는 전시체제기(1937-45) 때 이루어진 신사참배 강요의 트라우마에 기인합니다. 해방 후 교회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자유만 보장만 해준다면, 그게 누구든 상관없이 열렬히 환영할 준비가 되어 있었거든요.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등장한 이승만은 감리교 신자였을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제도적 특혜를 한국 개신교에 제공했습니다. 이를 마다할 이유는 없었죠. 그래서 한국 기독교는 자유당 정권과 공생관계를 이루었고, 그 결과 4월 혁명의 주체가 아니라 일종의 적폐 세력으로 비판을 받아야 했습니다.
오히려 4월 혁명은 한국 기독교가 저항의 주체로 거듭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워낙 이때 한국 기독교가 사람들한테 욕을 많이 먹어서 정신 차렸다고 해야 할까요. 민주화 운동의 산 증인이었던 故 박형규 목사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그의 회고록인 『나의 믿음은 길 위에 있다』를 보면, 그는 4월 혁명을 겪으면서 자신의 삶이 확 바뀌어버렸다고 고백합니다. 이때부터 그는 도시빈민선교, 반유신운동, 인권운동 등에 헌신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4월 혁명은 교회개혁운동의 문을 열었습니다. 자유당 정권에 적극적으로 협력했지만, 여전히 떳떳하게 잘 지내는 교회 지도자들을 규탄하는 청년들의 목소리가 울렸기 때문입니다. 비록 4월 혁명이라는 공간 속에서 이루어진 교회개혁운동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지만, 개혁의 주체로 등장한 기독청년들을 역사 속에서 확인할 수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4월 혁명은 한국 기독교 역사의 메타노이아(Metanoia: 회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기독교의 중요한 절기 중 하나인 ‘부활절’이 4월에 치러지다보니 4월 혁명을 부활 신앙에 근거하여 재조명하는 경우가 발생했다는 사실입니다. 이천년 전 예루살렘성 밖에서 일어난 예수의 부활과 한국 땅에서 발생한 4월 혁명 사이에는 시간과 공간의 차가 있습니다. 4월 혁명을 계기로 등장한 저항하는 그리스도인은 이 두 사건을 시공을 초월한 계시와 종말론적인 의미의 아날로기아(Analogia: 닮음)로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저항하는 그리스도인은 4월 혁명을 부활이라는 메타포로 재해석한 겁니다. 이들에게 4월 혁명은 자유를 위한 몸부림의 역사이자 저항의 상징이었기 때문이죠. 저항하는 그리스도인의 역사의식은 부활 신앙을 바탕으로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례로, 민중신학자 서남동은 예수의 부활과 4월 혁명을 서로 조명해야 그 뜻과 의미가 더욱 잘 드러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저항의 신앙은 부활과 4월 혁명을 과거의 신화로 전락시키지 않고, 현재 진행 중인 사건으로 끊임없이 환기시켰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1971년 부활절 때 구체화되었습니다. 진보 기독교 진영의 청년들이 부활절 전날 나무로 만든 십자가를 선두에 세우고 행진에 나선 겁니다. 이들의 걸음은 다음 날 부활절 연합예배가 열리는 남산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불의를 방관하고 있는 교회의 죄를 스스로 짊어짐으로써 고난에 동참하고, 교회와 사회를 향해 양심의 부활을 촉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전년도에 전태일의 죽음을 목도하면서 불의에 저항하기로 다짐한 이들이었습니다. 기독청년들의 행진은 경찰의 방해로 제지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물리적 충돌이 일어났고, 기독청년들은 신앙의 자유가 훼손 받았다는 주장을 펼치면서 공명선거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한국 사회는 박정희 vs 김대중이라는 경쟁구도로 이루어진 대통령 선거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1971년 대통령 선거가 부정선거로 얼룩지지 않도록 기독청년들은 투표장에 가서 투표와 개표 과정을 감시했습니다.
민주주의가 완전히 유린된 유신 시대에도 부활절은 민주주의의 부활을 상징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1973년에 일어난 남산 부활절 연합예배 사건은 “총과 칼로 사납게 윽박지르고”, “군화발로 지근지근 짓밟아” 대는 유신 정권에 균열을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은 빈민촌에서 활동하던 사회선교 활동가들이 남산 부활절 연합예배에 참석한 신자들을 대상으로 ‘민주 회복’과 ‘언론 자유’를 촉구하는 유인물을 배포할 계획을 세우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아쉽게도 이들의 계획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지만, 유신 정권은 이들에게 내란예비음모죄를 적용했습니다. 이때부터 아무도 상상하지 못한 파장이 일어났습니다. 1970년대를 뒤흔들었던 반유신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겁니다.
이처럼 부활절은 현대사의 절망을 넘어서는 희망으로서 역사의 전환점을 이루었습니다. 여기에는 억압받은 노동자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예컨대, 1978년 3월 25일 한국기독청년협의회의 주도로 개최된 부활절 예배가 끝날 무렵 김정자, 정명자, 김복자 등의 노동자들이 “노동3권 보장하라”, “동일방직사건 해결하라”, “산업선교는 빨갱이가 아니다”는 내용을 외쳤던 겁니다. 이들은 예배 방해와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기소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교회가 예언자적 역할을 감당하지 못할 때 나온 ‘돌들의 아우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언론이 무거운 침묵을 지키고 있다 보니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그밖에도 기독청년들은 고난 속에 그리스도의 부활을 고대하며 저항의 신앙을 고백하는 경우가 적잖이 있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던 그 주는 부활절과 겹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5년 전 참사 당시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마도 대부분의 교회는 세월호 참사를 맞이하는 부활절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난감했을 겁니다. 제가 다녔던 교회도 그랬습니다. 세월호 참사 때 교회 지도자들이 각종 망언을 쏟아낸 이유는 세월호 참사를 어떠한 언어로 담아내야 할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다고 여겨집니다. 저항하는 그리스도인은 4월 혁명을 메타노이아(회심)와 아날로기아(닮음)로 적극적으로 해석함으로써 부활 신앙을 희망으로 가능하게 했습니다. 이러한 고민과 사유가 세월호 참사 5주기를 맞이한 우리들에게 요청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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