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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신학 1기/사월과 부활

레퀴엠을 뚫고 소망을 노래하라 / 성석환

 

레퀴엠을 뚫고 소망을 노래하라

- 성석환(장로회신학대학교)

 

시인 엘리엇에게 4월은 '잔인한 달(the Cruelest Month)'이다. 현대사를 돌이켜보건대, 다른 어떤 이들보다 한국인들에게 더 잔혹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민주화가 이뤄지고 세계 10위권의 경제적 성장을 자랑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그 ‘잔인성(cruelty)’은 날이 갈수록 그 강도가 더해가는 듯하다. 허나, 잔인한 십자가의 죽음을 이기고 부활로 오시는 주님을 만나는 계절이기도 하니 그리스도인은 새 소망을 노래하지 않을 수 없다.

억울하게 죽어간 이들, 죄 없이 생명을 빼앗긴 이들, 말 못하고 소리 없이 사라진 이들, 기꺼이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제자도를 실천했던 이들, 그리고 그에 겹쳐 자기만의 유익을 추구하는 이기심으로 생명을 배신하고 권력과 부의 편에 섰던 악인들이 아직도 뒤엉켜 역사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으니 여전히 암울한 고통을 느끼지만, 그럼에도 레퀴엠에 멈출 일이 아니라 부활의 노래를 불러야 하는 것이 우리의 일이다.

 

잔인하지만, 희망으로

71년 전 4월, 제주에서는 유례가 없는 잔인한 비극이 있었다. 이제야 국가가 ‘4.3 기념식’을 거행하고 비로소 지금껏 숨죽여 울던 이들의 아픈 상처를 보듬어 보지만, 지나간 세월 동안의 그 억울한 한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으랴. 대체 왜 조국의 군대와 경찰이 그토록 무참하고 잔혹하게 양민들을 죽여야 했는지... 이념과 권력 앞에 속절없이 사라져간 고귀한 생명들을 생각하면 그들의 레퀴엠은 쉽게 끝나지 못할 것이다.

추념사를 읊던 총리도 울먹이고, 그 난리에 가족들을 잃었던 이들도 울었다. 70여 년이 지나서야 “우리는 빨갱이 아니다.”, “우리 가족은 잘못한 것이 없다.”고 외치며 그 억울한 세월을 눈물로 삭인 이들에게 국가와 군경이 사과했다. 여기에 교회도 반드시 사과해야 할 당사자다. 이에 NCCK는 ‘4.3제주민중항쟁’ 70주년이던 지난 해 ‘서북청년단’의 과오와 한국교회의 침묵에 대해 공개적으로 사과했다. 만시지탄이나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직접 당사자들은 이 문제에 대해 여전히 침묵하고 있다. 더 나아가 지금도 사회의 이념갈등을 자극하고 냉전적 체제를 지지하고 있다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에서 한국교회가 과연 진정한 부활의 봄을 맞이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우리 사회의 어두운 곳에서 신음하는 이웃에게 다만 절기가 아닌, 다만 신학적 교리가 아닌, 생명을 살리고 소망을 노래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기억과 빛’으로 명명된 광화문의 기억공간을 찾았다. 아이들과 선생님과 또 우리네 이웃들의 이름이 선명히 새겨진 그곳을 대면하는 일이 아직 힘들다. 5년 전 팽목항의 그 한탄과 고통과 분노는 우리 모두에게 집단 트라우마가 되었다. “벌써 5년이나 됐냐?”라고 묻는 질문조차 상처가 되는 가족들의 아픔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더구나 아직 그 가족의 곁으로 돌아오지 못한 이들이 있지 않은가?

그야말로 생때같은 내 자식, 내 아이, 내 가족 300여 명이 순식간에 사라졌는데, 여전히 책임 있는 설명이나 해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심지어 그것을 방해하는 세력이 있다고 하니, 그 실체를 분명히 밝히고 드러내야 그나마 유가족들의 마음에 위로가 될 것이다. 또 끝까지 아이들을 포기하지 않았던 선생님들, 선장은 도망갔지만 남아 아이들을 구조한 승무원들, 수많은 생명을 구조하고 기진하여 죽어간 잠수사들, 우리는 그들을 기억해야 한다.

잔인하지만, 그래도 희망의 볕은 스며든다.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기억하며, 그 절망적인 시절에 그렇게 버텨냈다는 사실에서 기원적 희망을 본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겪는 약소국의 설움이 나라 잃었을 적 그 설움에 비하겠는가마는, 선조들이 보여준 그 기개와 당당함에 비한다면 지금 우리는 눈치보며 기웃거리는 비루한 후세들 같아 속이 상한다. 우리는 과연 ‘임정 100주년’을 기념하며 화해와 통일의 새 역사를 펼칠 수 있을까?

바로, 세계가 놀라고 우리도 놀랐던 ‘4.27 판문점 선언’이 그 질문에 답하는 역사적 만남이었다. 북한의 최고지도자가 남측 판문점에 내려와 남한 대통령과 회담을 갖고, 평화와 공동번영을 추구하자는 공동선언문을 함께 낭독한 사건은 그야말로 현대사의 질곡을 넘어서는 한 편의 드라마였다. 이후 대한민국 대통령이 평양 시민 앞에서 연설하고 북한 지도자와 백두산에 함께 오를 수 있었으니, 이 4.27 선언의 현대사적 의미는 앞으로도 결정적일 것이다.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 독재에 항거했던 청년들의 ‘4.16’은 ‘3.1운동’과 ‘5.18’, ‘6.10’을 이어 광화문의 촛불로 이어진 4월의 또 다른 이름이다. 이 사건들은 하나같이 더 좋은 세상, 더 정의로운 세상을 노래했다. 그래서 오늘의 부활절은 한국사회에서 특별한 선교적 의미를 갖게 된다. 교회 건물과 교리에 갇힌 부활절이 아니라, 저 사건들에 응답하며 신학적 상상력이 노래하는 이 시대의 부활로 육화될 때 진정한 부활절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생명의 부활을 향해

우리에게는 고통의 레퀴엠이 ‘희망의 노래’로 이어지도록 할 선교적 사명이 있다. 자신들도 십자가형을 당할지 모른다는 공포에 떨며 숨어 있던 제자들을 부활하신 주님께서 찾아오셨다. 주님은 그들에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Peace be with you!).” 하시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 20:19-21) 하셨다.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시면, 곧 권능을 받고 세상에 나가 부활의 새 소망을 증언하게 될 것이었다.(행 1:8)

그러면 한국교회가 증언해야 할 소망의 노래는 어떤 것인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이들은 세상의 권력과 죽음의 공포에 눌려 있을 수 없었다. 아무리 잔인한 현실이라 할지라도 부활하신 주님이 주시는 평강은 새 희망을 보도록 이끌어 간다. 이 선교적 사명이 교회와 그리스도인에게 있다. 이념에 의해 살해당하고, 무책임한 이들로 인해 생명을 잃어버리고, 강한 이들에게 짓밟힘 당한 이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전해야 할 사명이 있다.

어쩌면 십자가형틀이 기다릴지도 모르는 그 옛날 예루살렘 광장에서 다시 사신 주님을 증언했던 제자들의 그 당당함으로, 나라 잃은 백성들을 대신하여 이국에서 조국의 독립을 외쳤던 우리 선조들의 기개로, 조국의 민주주의와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떨쳐 일어섰던 민주 시민들의 용기로 오늘의 한국사회에서 주님이 주시는 평강을 누구나 누리도록 해야 할 공의로운 책임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다.

교회 건물이나 체육관에 갇힌 상투적이고 형식적이며 지루하기까지 한 부활절이 아니라, 십자가 고난에만 집착하는 가학적 고행이 아니라, 계란 하나와 세상과 상관없이 울려 퍼지는 칸타타만으로 채워지는 행사가 아니라, 오늘의 상처와 아픔을 보듬고, 진혼에 멈추지 않는 새로운 희망을 지역사회에서, 시민사회의 광장에서 노래할 부활의 축제를 증언하라고 부활하신 주님은 다시 우리를 세상으로 보내신다.

부족주의, 가족주의에 매몰된 종교생활을 그치고, 상처받은 이들을 우리의 가족으로 선언하는 부활절이 되기를 소망한다. 이제 그만 그 요란한 꽹과리 소리와 나팔 소리를 그치고, 4월 9일 나치에 의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던 본회퍼의 고백처럼 “그 선한 힘에 온전히 감싸여” 새 하늘 새 땅의 새 소망을 노래하며 부활의 ‘평강’을 전하자. 그리하여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 부활의 주님을 찬미하며, 이토록 아픈 4월에도 소망을 전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