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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신학 1기/사월과 부활

살아남은 자의 증거, 상처 / 한수현

살아남은 자의 증거, 상처

- 한수현(감리교신학대학교 강사)


상처란 말의 그리스어는 크게 세 개의 단어가 있다. 트라우마(τραῦμα), 몰로프스(μώλωψ), 그리고 플레게(πληγή)이다. 이 세 가지 단어의 의미가 잘 나타난 예를 들어본다면, 첫째는 사마리아인(눅 10:34)이 여리고에서 죽어가고 있던 이에게 다가가 기름과 포도주로 치료해준 상처(트라우마)이고, 두 번째는 고난 받는 초대교회 교인들을 위로하기 위해, 예수가 매를 맞아 상함(몰로프스)으로 그리스도인들이 나음을 얻었으며 이제 죄에는 죽고 의에는 살게 되었다는 본문(벧전 2:24)이다. 마지막 세 번째는 옥에 갇힌 바울과 실라를 데리고 집으로 간 간수가 그들의 상처(플레게)를 씻겨 준 본문(행 16:33)에 나온다. 간수는 바울과 실라를 가두고 고문한 빌립보의 지배체제와 생사고락을 함께하던 사람이었다. 옥문이 열리고 바울과 실라가 풀려나자 자신의 삶을 의탁했던 힘이 무너지는 것을 보았다. 칼을 들어 죽으려 하던 순간 새로운 삶의 기회가 열렸다. 그는 그의 집을 열어 제일 먼저 폭력이 스쳐지나간 자리에 난 상처를 자신의 손으로 씻어 주었다.

이렇게 세 곳에 등장하는 그리스어 트라우마(τραῦμα), 몰로프스(μώλωψ), 플레게(πληγή)의 의미는 매우 깊고 치료되기 힘든 상처를 뜻한다. 매우 깊은 상처이기 때문에 치료가 된 이후에도 그 흔적이 남는 경우가 많았을 것이다. 그래서 사건과 그 흔적을 함께 지칭하는 단어로써 사용되었을 것이다. 상처는 생존의 표시이다. 그리고 살아남은 자에게 상처는 의미를 가진다. 이렇게 볼 때 "예수의 상처로 나음을 얻었다"는 표현에는 이미 예수의 생존에 대한 의미가 숨어 있다. 예수의 상처는 예수의 생존을 의미하고 그의 생존은 그와 같은 상처를 가진 이를 회복케 하는 힘이 되었다. 예수를 상처로 기억했을 때, 예수는 그를 믿는 자들의 상처 속에 살게 되었다.

신약성서의 증언자들은 예수의 부활이 그의 상처에서부터 시작됨을 기억했다. 그들의 삶의 나음과 변화가 예수의 상처에서 왔음을 되새겼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상처는 예수의 상처를 떠올리게 하였고, 자연스럽게 예수의 부활을 바라보게 했다. 우리는 처음 그리스도를 믿었던 사람들과 그 다음 세대들이 이 신앙을 예수의 가르침에서 받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근대의 많은 신약학자들은 이것이 예수를 잃은 상처를 지닌 사람들이 당시 로마의 끊임없는 폭력과 죽음의 향연에 맞서 찾아내고 발견했던 하나님의 뜻이라 보고 있다.

예수가 죽었을 때, 그들은 분노했다. 자신의 희망이 꺾어진 것에 대해 분노할 여유는 없었다. 그들은 제일 먼저 자신들과 함께 동고동락했던 유다의 배신에 분노해야 했다. 유다가 스승을 팔지 않았다면 스승이 불현듯 잡혀가지도 않았을 것이고 처형당하지도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들을 가장 분노케 했던 것은 예수가 처형당할 때 도망친 자신들이었다. 그 분노는 스승과 함께 하지 못했다는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 보다는 그 상황을 만든 유다와 베드로에게 향했다. 가장 신뢰받았던 지도자인 베드로는 스승을 세 번이나 부인하지 않았던가!

자신의 스승을 죽인 동족 유대인들에 대한 분노와 자신들의 배만을 불리고 있는 제사장들에 대한 분노가 걷잡을 수 없이 일어났다. 그러나 그들 뒤에는 로마가 도사리고 있었다. 로마 제국의 폭력과 칼날 앞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채울 수 없는 공허를 안고 떠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갈릴리 사람으로 인해 시작된 모임과 운동은 사라지는 듯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예루살렘에 남아 갈릴리에서 예루살렘까지의 여정을 이끌었던 스승을 생각하던 몇몇 사람들은 동족에 대한 미움, 성전에 대한 증오, 그리고 자신에 대한 분노 속에 그 스승을 남겨두길 원치 않았다. 약한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렸던 스승의 삶을 그저 흔한 정치적 희생양으로 둘 순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차라리 더욱더 강렬히 그리고 뜨겁게 그를 기억하기로 했다. 그들은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까지의 여정과 재판에서 죽음까지의 여정을 기록하고 마음속에 되새기며 사람들에게 전하기 시작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어떤 이들은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고, 어떤 이들은 분노했으며, 어떤 이들은 부끄러워했다. 어느덧 그들에게 스승은 죽은 자로 남아있지 않고 살아있는 자로, 그러나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함께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예수의 부활을 목격한 자들은 하나같이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으며,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한 몸은 그전의 썩어질 육체와는 전혀 다른 것이라 말했다).

부활에 대한 신앙과 확신이 증언이 되었다. 그리고 스승의 죽음은 이전과는 다른 의미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어떤 이들은 스승의 죽음이 이전까지 자신들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보장해주던 소와 염소, 그리고 양으로 드리던 종교 행사들을 끊어버리고 직접 신을 만나게 해주는 계기가 된다고 생각했다. 부활한 스승이 걸었던 죽음이 자신들을 지배하던 종교라는 족쇄를 풀어버리고 새로운 마음으로 신의 소명을 확인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어떤 이들은 예수의 부활로 그들의 부끄러움을 녹이고 미움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그들이 선포하는 예수는 증오와 분노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소망과 희망에서 나온 것이었다. 다시는 폭력과 미움의 상처가 없는 세상을 만들자는 움직임이, 먼저 간 스승의 길을 따르려는 발걸음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죽음이 아닌 부활을 전하는 사람들이 되었고 이제는 그들 속에 살아 역사하는 스승을 전했다.

어떤 이들은 스승의 가르침을 생각하며 그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자신의 삶의 일터에서 무엇인가를 실천하고자 했다. 그러자 부자들을 미워하고 욕심쟁이들을 꾸짖던 스승이 생각났다. 그래서 자신의 소유들을 팔아 가난한 자들과 함께 하는 공동체를 만들었다. 함께 스승을 기억하기 원하는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내 그 공동체는 예루살렘에서 입소문을 타고 각 지역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그러고 어떤 이들은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던 스승의 가르침을 상기했다. 고아와 과부, 성노동자들, 그리고 병자들에게 찾아가 스승이 그랬던 것처럼 함께 울며 그들의 상처를 싸매주었다. 이 모든 변화들 속에 어느덧 같은 동족을 향한 미움과 분노, 그리고 스스로를 향한 실망은 새로운 소망과 사랑을 창조하는 결단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그런 변화들을 담담히 기록하여 남겼고, 그 기록들은 신의 뜻을 따라 세상 어느 곳이든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는 책, 성서의 한 부분이 되었다.

2020년의 부활절은 좀 더 가까워지기 바래본다. 우리 곁을 황망히 떠난 모든 그리운 이들이 더 이상 멀어지지 않기를 희망한다. 썩어질 것으로 심으면 영원한 것으로 나타난다고 바울은 말했다. 죽음을 인정하는 것은 희망을 꺾어버리는 것이 아니다. 죽음으로 심겨져도 부활로서 걷어 들이자는 말이다. 어떤 몸짓도 모두 부활을 희망하는 몸짓이 되게 하는 것.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믿은 사람들이 어쩌면 유일하게 증언하는 것이리라. 먼저 간 자들을 부활의 메시지로 다시 소환하며 나의 삶 깊은 것으로 부터 그들을 기다리는 몸짓을 시작해야겠다. 몇 년이 걸리든 몇 십 년이 걸리든 부활의 증언이 사라지지 않게 하다보면 우리 안에 있는 부끄러움과 수치가 다시 만남의 기쁨으로 가리워져 우리 모두의 하나님 안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