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건과 신학 1기/사월과 부활

사월의 할렐루야 / 최영실


사월의 할렐루야

- 최영실(성공회대 명예교수)

 

'할렐루야'를 부를 수 없는 사람들

사월, 개나리, 목련,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나고, 먼 산에 피는 진달래가 진홍빛으로 눈부시다. 시인 이영도 님은 이 ‘눈부시게’ 피어나는 ‘진달래’를 이승만 정권의 총칼에 의해 스러진 4. 19의 젊음 넋들로 노래하면서, ‘맺혔던 한이 터지듯 온 산하를 붉게 물들이고 있다’고 피맺힌 울음을 울었다. 우리의 굴곡진 역사에서 억울하게 죽임당한 젊은 넋들이 어디 4.19의 ‘그들’만이었을까? 4.15 제암리 학살 사건, 제주 4.3 학살 사건, 4.9 인혁당 사법살인 사건, 그리고 바로 5년 전, 304명의 무고한 생명이 속절없이 죽임당한 4.16 세월호 참사!

아이러니하게도 이 아픈 역사의 사월에 교회는 부활절을 맞는다. 이번 부활절에도 교회들은 부활을 축하하며 예쁘게 색칠한 달걀을 나눠 주고, 성가대는 부활절 칸타타를 부르며 ‘할렐루야’를 찬송했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아픈 역사의 희생자와 죽음의 고통을 겪으며 살아가는 가족들에게 저 부활절 할렐루야 찬송은 어떤 의미였을까?


‘아픈 역사’와 무관한 ‘할렐루야’

예은 엄마 박은희 전도사의 세월호 참사 3주기 증언은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정말 부끄럽게 만든다. “참사 초기에 기독인 유가족들은 ‘한국교회 큰일 났다. 무슨 일이 나도 나겠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사회 부정부패가 드러났기 때문에, 그래서 한국교회가 부끄러워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내 역할 못했다고 자책하고, 대대적 회개 운동이 일어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들려오는 건 막말뿐이었습니다. 탄핵 반대 집회에서 찬송가, 주여 삼창, 할렐루야 소리가 들렸습니다. 정말 큰일 났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한국교회를 버릴 수도 있겠다는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한국교회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한마디로 3.1 운동 이후 교회가 민족의 고난의 역사를 외면한 채, ‘몰역사적’으로 변질되었다고 말한다. 일제 말, 친일로 돌아선 교회 지도자들, 분단 이후 친미-반공 노선을 따른 교회들이 제국의 침탈과 독재 권력의 불의에 침묵하고, 영(靈) 주의와 기복신앙으로 일관하면서, 고난 받는 자들을 외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교회를 이토록 몰역사적으로 만든 원인은 무엇일까? 그것은 일제가 식민 지배를 위해 이용한 ‘정교분리’의 거짓 교리와 독재자들이 만든 ‘분단 이데올로기’가 아닐까? 그리고 그 잣대로 힘없는 자들을 ‘죄인’으로 정죄했기 때문이 아닐까?

민족을 분열시키고 전쟁과 죽음으로 몰아온 저 지긋지긋하고 무서운 ‘반공 이데올로기!’ 원수를 사랑하고 화해와 평화를 이루라는 예수의 지엄한 말씀도 ‘반공’이라는 두 글자 앞에서는 한낱 ‘헛소리’가 되어 버린 것만 같다. 반공을 절대적인 신적 규범과 율법처럼 신봉한 극우적인 기독교인들은 ‘극우단체’의 일원이 되어 무고한 이들을 빨갱이로 몰아 ‘정죄’하고, ‘죽이는’ 일에 앞장섰다. 마치 유대인들이 ‘하느님을 잘 섬기는 일’이라고 믿으면서 예수와 제자들을 죽인(요 16:2) 것처럼. 지금도 이들은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집회와 기도회를 열면서 ‘빨갱이’를 몰아내자고 소리치고 있다. 이들에게 부활절은 무슨 의미일까?


예수의 부활은 불의한 지배 권력자를 심판한 ‘하느님의 사건’이다!

예수의 부활은 관념적인 것도, 하나의 은유나 비유도 아니다. 또 그것은 달걀에서 병아리가 나오는 것 같은 자연현상으로서의 ‘자동사’적인 것이 아니다. 예수의 ‘일으킴’은 ‘타동사’로서, 십자가에서 죽임당한 예수를 하느님이 일으켜 살게 한 ‘하느님의 사건’이다. 이 ‘사건’은 예수의 ‘십자가 사건’에서 시작되었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역사적이며 정치적 사건이다. 예수는 로마 식민통치 하에서 동족인 갈릴리 사람들을 착취하고 억압하던 예루살렘의 종교가들을 향해서, 너희들이야말로 율법을 ‘불법’으로 악용해서(마 7:23) 동족인 갈릴리 사람들에게 ‘죄인’이라는 딱지를 붙여 차별하고 정죄한 ‘죄인들’(마 12:7)이라고 선언한다. 예수의 이런 선포는 약자를 억압하는 것으로 변질된 예루살렘 성전 이데올로기와 법 체제를 근간으로부터 흔드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예루살렘의 종교 권력자들은 예수를 “국가를 전복시키고(눅 23:2)”, “온 유대를 다니면서 백성을 선동한(눅 23:5)” 죄인이라는 죄목을 붙여서 로마에 고발했다. 그리고 로마는 정치범을 매달 때 사용한 ‘십자가 형틀’에 매달아 예수를 죽였다.

그런데 예수의 십자가 사건 이후에, 사도행전 저자는 베드로의 설교를 인용하면서 이렇게 선포한다. “당신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그 예수를 하느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행 4:10). 예수를 죽인 로마와 종교 권력자들의 거짓 이데올로기와 불의한 법 체제를 심판한 사건, 바로 이것이 예수의 부활소식의 핵심이다. 골로새서는 예수의 부활을 “모든 통치자들과 권력자들을 그리스도의 개선 행진에 포로로 세우고, 구경거리로 만든(골 2:12-15)”사건으로 증언한다. 이 놀라운 부활소식 때문에 우리는 부활절을 기리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할렐루야를 기쁘게 부를 수 있는 것이다.


불의에 맞서 ‘싸우고’, ‘고난당하며’ 부르는 ‘할렐루야’

한국교회는 ‘할렐루야’를 그 의미도 분명히 하지 않은 채, 너무 쉽게, 너무 자주 부르는 것 같다. 신약성서에서는 요한계시록에 몇 번 언급될 뿐, 예수와 바울, 요한, 그 어디에도 ‘할렐루야’라는 말이 없다. 이때의 ‘할렐루야’는 약자의 호소를 듣고 불의한 대적들을 심판하는 하느님을 찬양하면서 부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할렐루야’는 불의한 강자들이 약자를 억압하면서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예수를 믿는다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예수를 믿으면 고통과 고난이 없이 이 세상에서 잘 살고, 죽은 후에는 금 면류관을 쓰고 하늘의 영광을 누리는 자인가?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지금 이 땅에서, 예수의 십자가와 함께 이미 자신을 못 박고,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다시 ‘산 자들(롬 6:3-11)’이다. 그들은 이미 ‘죽음을 이긴 자들’(롬 8:35-39)로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고, 불의한 자들에 맞서 ‘싸우고’ ‘고난’의 현장으로 나아간다. 바울은 이 ‘고난’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특권’(빌 1:29) 이라고 말한다.

부끄러운 한국교회의 역사에서도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를 올바로 깨달은 소수의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교회 안에 머물지 않고, 고난의 역사의 현장으로 나아갔다. 그들은 불의한 독재정권 하에서 옥에 갇히고, 고문당하고,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지금도 분단 이데올로기에 의해 죄인 아닌 죄인이 되어 70여년의 세월을 숨죽이며 살아온 4.3 희생자들, 4.16 세월호 유가족들과 함께 ‘빨갱이’라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진실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투쟁을 벌이고 있다. 사월 ‘눈부신’ 진달래를 보며 우리의 아픈 역사를 함께 아파하고, 부활의 할렐루야를 들으며 저 고난의 대열로 함께 나아가자. 불의한 통치자들을 심판하고, 죽임당한 자를 일으켜 생명의 불꽃으로 타오르게 하시는 그 하느님을 ‘할렐루야’로 찬양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