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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신학 1기/사월과 부활

수난의 4월, 침묵하는 신(神) / 정길화

수난의 4월, 침묵하는 신(神)

- 정길화(MBC PD, <이제는 말할 수 있다> CP 역임)


달력장에서 4월을 바라보는 일은 참으로 괴롭다. 시작부터 끝까지 수난과 희생의 연속이다. 들머리에 위치한 역사적 사건은 제주4.3이다. 오랜 기간 제주4.3은 금기어였다. 제주4.3은 71년이 지났건만 아직 변변한 이름도 갖추지 못하고 있다. '사태', '항쟁', '학살', '사건', '반란' 등의 여러 이름으로 불리면서 우리 사회의 길항과 대립이 드러났다. 지난 4월 3일 국방부는 71년 만에 “제주4·3특별법의 정신을 존중하며 진압 과정에서 제주도민들이 희생된 것에 대해 깊은 유감과 애도를 표한다”고 유감을 표명했다. 실로 만시지탄이다.

4월 8일과 9일은 참담하다. 우선 1970년 4월 8일에 와우 아파트 붕괴 사건이 발생했다. 33명이 사망하고 40여 명이 부상했는데 이는 이후 무수한 ‘한국형 부패+부실 사고’의 전형이 되었다. 더욱 참담한 것은 따로 있다. 1975년 4월 8일 인혁당 재판에서 사형 확정 판결이 났다. 이튿날 18시간 만에 8명에 대한 사형이 집행되었다. 박정희 체제의 독재와 인권유린은 제어할 수 없는 폭력적인 속도로 질주(疾走)해 나갔다. 국제법학자협회는 4월 8일을 ‘사법사상 가장 암흑의 날’로 명명했다. 전율의 4월 8일과 9일이다.

4월 16일은 고통스런 기억의 날이다. 5년 전 한국민들은 300여 명이 넘는 생명들이 사실상 ‘수장’되는 장면을 ‘생방송’으로 지켜봐야 했다. 불법적인 선박구조 변경, 상습적인 과적과 부실한 선내 고박(固縛), 원인을 알 수 없는 급속 항로 변경 등이 물리적인 요인이었다면 총체적인 안전불감증, 무능한 초동 대응, 침몰보다 더 비겁한 구조 불이행, 책임을 모면하려는 권력자의 사악함 등은 근본적인 원인이다. 여기에 고통에의 공감 없이 관급 보도자료를 맹종하던 언론의 ‘기레기’ 행태는 덤이다. 살아남은 모든 이들에게 고통스런 4월을 강제하고 있다.

4월 16일 세월호 침몰은 보릿고개를 극복한 초고속성장, 한강의 기적, OECD 가입, 올림픽과 월드컵을 치른 선진국.... 등의 찬사가 한낱 허명에 불과했다는 것을 뼈아프게 깨닫는 집단체험의 날이었다. 한국의 실상과 우리 사회의 실력, 한국민의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난 세월호다. 문제는 5년이 지나도록 아직도 침몰의 원인, 구조 불이행의 이유를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1912년 4월 14일에 타이타닉호가 침몰했다는 것은 전혀 ‘위안’이 될 수 없다. 다만 오만과 탐욕의 결과라는 점에서 평행이론이 적용될 수 있다.

1960년 4월 19일은 불의와 부정에 항거한 민중혁명의 날이었다. 이승만 12년 독재가 3.15 부정선거로 치달았을 때 어린 학생들이 분연히 거리로 나섰다. 경찰이 쏜 최루탄에 목숨을 잃은 김주열 군의 시신이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 떠올랐다. 마침내 분노는 전국을 뒤엎었다. 국민을 상대로 발포한 이승만 정권의 폭력으로 100명이 넘는 희생이 있었다. 다만 4.19는 민중의 분출이었을 뿐 새로운 세계에 대한 준비가 없었다. 그래서 미완의 혁명이다. 4.19의 과실(果實)은 구체제의 야당에게는 하늘에서 떨어진 요행이었다.

이렇듯 달력장의 4월은 수난과 희생으로 점철된 시련과 신음의 계절이다. 하필 4월인가. 달력을 보면 유달리 4월에 역사의 분기점이 되는 사건, 사고가 많기는 많다. 그래서 잔인한 4월이다. 이 4월을 말할 때 고전적으로 인용되는 T.S. 엘리어트의 <황무지>에서는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고 4월의 역설을 말하였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문명의 황폐함과 비극성’을 노래한 시로 평가받는 이 시는 한국 현대사의 4월을 말할 때 비유의 진핍성(眞逼性)으로 인해 자주 소환된다.

이렇듯 잔인한 4월’을 겪을 때마다 사람들은 신의 침묵에 고통을 받았다. 극복할 수 없는 운명적 환난을 당하여 그들이 구원을 찾을 때 신은 부재(不在)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한국 사회의 현대사적 전개 과정에서 교회는 대체로 부재했고, 때로는 방관하거나 상황을 악화시키기도 했다. 가령 제주4.3의 현장에서 또한 이승만, 박정희 독재의 국면에서 일부 기독교가 취한 방식에는 진실이 밝혀지지 않았다. 고통받는 사람들을 외면하던 교회 중의 일부는 그 연장선에서 심지어 세월호 배지를 달면 출입을 금지했다.

이 모든 수난과 희생의 4월이 있을 때 한국의 교회는 주로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프란치스코 교황은 “고통에 중립지대는 없다”고 말했다. 엔도 슈사꾸가 <침묵>에서 “하나님 당신은 왜 침묵만 지키고 있느냐?”고 물었을 때, 신은 “나는 침묵만 하고 있지 않았다. 너와 함께 괴로워하고 있었다.”고 답했다. 과연 여기에 함께 할 수 있는 한국의 교회는 어디에 얼마나 있는가. ‘희망의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 박사는 한국인의 수난사를 보고 이는 ‘한국민족 공동의 미래를 위한 정치적 약속’이라고 규정했다. 이 약속의 땅, 4월에 다시 부활절이 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