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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신학 1기/한국교회 총회

[취지문] 총회 :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기 위한 진지한 노력과 판단의 과정

총회 :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기 위한 진지한 노력과 판단의 과정

- 양권석(성공회대학교)

대부분의 기독교 교단들이 총회를 갖는 9월이 지나갔다. 교단 총회라는 것을 개별 교단 내의 일을 처리하는 실무적인 과정이라고 생각해서, 그 교단 밖의 사람들이 세세하게 들여다보고 이렇게 저렇게 평가하거나 판단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보았듯이 교회 안에서만 아니라 교회 밖의 언론이나 여론도 각 교단의 총회의 진행과정과 결의 사항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특히 세습, 동성애, 이단판결, 종교인 과세, 여성, 이주민과 난민, 타종교 등에 관한 각 교단 총회의 결정은, 그것들이 교회 안과 밖의 소위 말하는 타자들과의 관계나 사회적 관계에 관한 입장의 결정이라는 점에서 교회밖의 언론과 여론에서도 예민하게 관심을 갖는 사안들이다. 그래서 <사건과 신학> 9월호는 교회 안팎에서 관심을 갖는 주제들을 중심으로 각교단의 교단총회의 의사결정과정을 살펴보기로 하였다. 일곱분의 필자들이 개별 주제들을 중심으로 관련된 문제들을 설명하고, 교단 총회들의 의결이나 문제를 다루는 방법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있다.

살다 보면 바쁘다는 핑계로 각각의 문제들에 대해서 세심하게 검토하고 판단하기 보다는, 그냥 여론의 추이를 쫓아가기 쉽다. 하지만 따져 보면, 각각의 문제들은 하나 같이 다 사람의 삶에 관한 문제이고, 누군가의 존재 이유에 대한 문제이다. 그런 만큼 교단 총회의 결정이라는 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치명적인 낙인이 되고 존재를 부정당하는 아픔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교회는 세상을 대표하여 하느님께 기도하는 공동체요, 하느님을 대변하여 세상에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공동체다. 이 역할을 감당하려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참으로 진지한 식별의 노력과 판단의 과정이다. 이 세상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면서, 그들 곧 우리 이웃들의 고통과 아픔을 절실하게 읽어 내려는 노력이 필요하고, 그들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자리잡은 탄원과 기도를 찾아내려는 참으로 진지한 노력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리고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기 위한 간절한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하느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어떤 판단과 결단 그리고 실천을 원하시는지 진지하게 묻고 식별하여 행동으로 옮기는 과정이 필요하다.

어쩌면 교회가 세상에 보여주어야 하는 전부가 그것일지도 모른다. 세상 사람들의 탄원과 기도를 깊이에서 식별해내고 공감해 내려는 노력과 지금 여기서 하느님의 부름이 무엇인지 식별하고 실천하려는 진지한 노력을 바라보면서, 사람들은 그 교회가 정말로 바른 길을 걷고 있는 교회인지, 믿을 수 있는 복음을 전하는 교회인지 판단한다. 결국 한 교회가 이 세상에서 갖는 신뢰성 혹은 권위라는 것은, 그 교회가 총회를 통해서 보여주는 식별과정과 의사결정 과정의 진정성을 통해서 획득되는 것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최호윤님의 교단 총회를 바라보는 시각은 정말 귀하다. 그리고 교단 총회가 보여주어야 할 것은 무엇이고, 보여주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도 분명히 드러난다.
"하나님 나라는 이 땅에서 우리가 성취한 결과보다 이루어 가는 과정에서 형성되는 서로 사랑하고 섬기는 관계에 방점이 있다. 우리가 소속되거나 접하는 다양한 조직단위의 의사결정구조에서 한몸된 지체들의 마음을 얻지 못한다면, 한 걸음 더 나아가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더불어 살아가는 이 땅에서 믿지 않는 자들이 사랑을 느낄 수 없다면 우리가 결정하는 모든 과정에 논리적이고 절차적인 정당성을 확보할 수는 있겠지만 정작 더 중요한 사랑은 상실하게 된다."

그런데 교회의 몸된 지체들의 마음을 얻고, 그리고 믿지 않는 사람들마저도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하는 사랑과 기쁨을 느끼게 해 주는 총회의 판단과 의사결정이라는 것은 타자를 향한 개방성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교회를 왜 타자성의 강렬함이 살아있는 공동체라 했겠는가? 교회는 나의 인식이나 관념의 범위는 물론이요 어쩌면 교회 교리라는 울타리에도 결코 갇힐 수 없는, 나로서는 결코 안다고 말할 수 없는, 전적인 타자이신 하느님을 향하여 자신을 여는(metanoia) 공동체요, 그 하느님의 부름 앞에 한없이 자신을 낮추어야(kenosis) 하는 공동체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세상에서 만나는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도, 그들을 내 주장의 노예로 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결코 내가 내리는 정의나 판단에 가둘 수 없는 진정한 의미의 타자로 바라볼 줄 아는 사람들이 기독교인이고, 그런 사람들의 모임이 교회다.

타자성을 향한 이러한 개방이 없는 공동체가 획득한 표의 숫자만 내세우면서 절차적 정당성을 강변한다면, 이미 그것은 하느님을 위한 결정도 아니고, 우리가 만나는 세상의 이웃들 곧 타자들을 위한 결정도 아니다. 그러니 그 교회를 누가 타자를 위한 교회, 타자와 함께하는 교회, 그리고 타자성의 강렬함이 살아있는 교회라 하겠는가? 그런 교회를 누가 기도하는 교회, 구도하는 교회, 예수그리스도의 삶을 따르는 교회라 하겠는가? 긴말하고 싶지 않다. 오늘의 한국교회의 총회를 바라보고 계시는 하느님의 진노와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바라보는 냉혹한 시선 앞에 고개를 들 수가 없다.

하느님의 사랑은 신비다. 그 사랑은 우리 인간이 정한 모든 경계를 넘어서서, 전체와 보편을 품는다. 그래서 모든 피조물이 그 안에서 화해의 희망을 잃지 않고 살 수 있다. 그래서 하느님의 사랑에 참여하는 일은, 타자이신 하느님의 사랑의 신비를 향해서 자신을 개방하는 일이고, 그 사랑의 요청 앞에 자신의 담을 허물 수 있는 준비를 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타자들은 내가 굴복시키거나 종속시킬 대상이 아니라, 내게 새로운 도전으로 다가오는 대상이요, 나의 강고한 울타리를 무너뜨리면서, 나를 그 울타리 밖으로 불러내는 존재다. 여성, 이주민, 난민, 성소수자, 문화적 소수자가 바로 그런 타자들이다.

기본적으로 자신을 낮추어 타자를 향해서 자신을 개방하는 자세, 타자를 통해서 스스로 변화하고 회심할 수 있는 태도가 없는 의사결정은 이미 하느님을 향한 의사결정이 아니다. 그것은 이기적이고 타락한 집단의 자기집착의 표현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