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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신학 1기/뉴노멀; 디스토피아와 유토피아 사이

뉴노멀 시대의 신앙과 신학 / 유경재


유경재(안동교회 원로목사)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 되면서 세계는 지금 포스트코로나가 어떤 변화를 가져올 것인가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학자들마다 나름대로의 전망을 쏟아내고 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분명한 것 하나는 포스트코로나 시대는 그 이전과 확실하게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뉴노멀’이란 말이 등장했다. 코로나19 사태는 약간의 삶의 변화가 아니라 문명 자체를 크게 바꾸어 놓을 것이지만 그것이 무엇이 될지는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기존의 모든 통계나 경험들이 무용지물이 될 만큼 크게 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 보면, 몇 차례의 큰 역사의 변동이 있었다. 첫 번째로 큰 변동은 출애급 사건으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오랜 노예생활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선민으로 새롭게 태어난 역사이다. 두 번째 역사적 변동은 바빌론 포로생활로, 국가는 무너지고 성전중심의 신앙이 불가능하게 되면서 새로운 신앙의 길을 모색한 시대였다. 세 번째 큰 역사적 변화는 BC와 AD로 나뉘어진 예수님의 사건으로 하나님의 통치가 본격화 한 거대한 변동이었다.


이런 대변혁 시대의 특징은 그 시대가 어떻게 바뀔지 예측할 수 없다는 점이다. 변화를 거부하고 과거에 집착하려 해도 시대가 용납하지 않기에 어쩔 수 없이 변화에 대응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러한 변화의 시대에 중요한 것은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사고의 유연성이다. 그런 유연성만 지닌다면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면서 새로운 역사를 열어갈 수 있다. 그렇지 않고 경직된 사고와 신앙으로 옛 것을 고집하는 개인이나 집단은 역사의 낙오자가 될 수밖에 없다. 분명한 것은, 거대한 변혁의 역사가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는 역사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거기에 새롭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고 그러려면 과거의 신학이나 교리에만 얽매인 경직된 신앙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사고, 유연한 신앙으로 깊이 들여다 보아야 할 것이다. 열린 사고, 유연한 신앙의 자세만이 변화의 충격을 흡수하면서 새로운 것을 찾아내고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갈 수 있다.


복음은 항상 그 시대의 상황에 따라 새롭게 해석될 수 있는 여지를 가지고 있다. 더구나 코로나19 사태와 같은 큰 역사의 전환점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이러한 대전환을 따른 새로운 신학이 나올 때마다 이를 저지하고 반대하며 핍박하는 보수세력이 항상 있어 왔다. 그러나 이런 시대의 변화는 하나님께서 친히 이끄시는 역사이므로 누구도 그것을 막을 수는 없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복음이 간직하고 있는 무한한 가능성에 대하여 열린 마음을 가지고 탐구하는 자세이다. 복음의 세계는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무한한 해석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성령께서 그 시대마다 새로운 깨우침으로 인도하실 때, 과거의 전통과 틀에 매이지 않고 새로운 것을 받아 드릴 수 있도록 우리가 항상 우리의 마음을 열어 놓아야 할 것이다. 사고가 경직되어 있으면 늘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따라갈 수 없다.


변화하는 시대에 따른 새로운 신학, 교회제도의 새로운 변혁이 필요한 데, 과거의 이론과 제도만을 고집한다면, 결국 새로운 역사에 대응하지 못한 채 소멸되고 말 것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한국교회는 코로나19 사태를 맞아 오히려 변혁을 거부하고 과거의 신앙과 제도의 틀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고 그 안에만 머물려 하고 있다. 특히 9월에 열린 장로교단 총회들은 전혀 새로운 역사에 대처할 어떤 의지도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되면 교회는 사회로부터 외면 당할 뿐 아니라 성령께서도 떠나가실 것이며 결국 교회는 소멸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포스트코로나 시대는 자본주의 체제에 길든 우리의 삶을 크게 바꾸어 놓을 것이며, 우리 사고의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따라서 교회도 그 시대가 요구하는 신학과 믿음의 형태를 새롭게 해석해 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며, 그것을 따라 교회를 새롭게 개혁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코로나19 사태로 교회들은 전에 한 번도 경험해 본 일이 없는 비대면 예배를 드려야 했고, 이러한 때 성찬예식은 어떻게 해야하는지 아직 논의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적당히 넘어가고 있다. 페이스북에서 온라인 성찬을 두고 찬반 토론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는데, 온라인 성찬에 문제가 없다는 찬성론자와 아직은 이르다 좀 더 논의를 해야한다는 반대론자들이 있었다. 전에는 한 번도 고민해 본 적이 없는 문제였다. 한 마디로 급격한 시대의 변화 앞에서 신학이 고민하지 않을 수 없고 변화되지 않을 수 없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언컨택트’ 시대에 ‘포노 싸피엔스’들은 대면하지 않고도 서로 소통함에 불편을 느끼지 않는다. 이런 뉴노멀 시대에 하나님의 은혜는 온라인을 통해 역사하지 않는가? 이런 시대에 예배는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신학은 더 이상 교조화된 틀에만 머물러서는 안 될 것이다. 거기서 나와 뉴노멀 신학을 새롭게 정립해 가야 할 것이다. (2020. 10.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