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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신학 2기/2021년 11월: 집단면역 그날이 오면

경계에 서 있는 그리스도인과 정상성 / 이주영

 

얼마 전까지 대한민국을 휩쓴 <싱어게인>(JTBC 음악 경연 프로그램)은 여러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줬다. 여태까지 무한 경쟁 위주의 음악 경연 프로그램이 가진 틀을 깬 이유도 있지만, 우승자 ‘이승윤 가수’가 가진 매력도 한 몫 했다고 생각한다. 특히 그의 발언 중에 “나는 애매한 경계에 있는 사람이고, 그렇기 때문에 많은 것을 대변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각주:1] 는 말이 특별하게 다가왔다. 바로 내가 교회 내에서 그런 존재이기 때문이다.

 

한국 개신교 문화에 속한 경증 지체 장애인에게 정상성은 모호하게 다가온다. 이른바 정상적 그리스도인들과 정상적인 친교 관계를 맺고 정상적으로 예배를 드리지만, 절대로 정상의 범주에 들 수는 없다. 반대로 온전히 ‘비정상의 범주’에 속하는 중증 장애인들과 같은 위치에 서 있지도 않다. 말그대로 ‘정상과 비정상 사이의 애매한 위치’에서 신앙생활을 할 뿐이다. 돌이켜보면 여러 기억들이 있고, 또 모든 기억들이 암울하기만 한 것도 아니다. 진심으로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준 사람들도 분명 있었다. 하지만 늘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에게 위로와 격려 차원에서 건넨 말은 같았고, 이는 그들의 의도와는 다르게 나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진심으로 믿고 기도하면 예수님이 기적적으로 고쳐 주실 거야”. 보다 강하게 얘기하는 사람들은 “그게 너의 십자가다, 회개하라”고 말한 적도 있었다. 유소년 시절에는 주변에서 추천해준 ‘치유 집회’도 종종 참석했다. 결국 큰 척추 수술을 받고 2년간 교회를 떠나기 전까지 나에게 예수의 기적은 ‘정상으로의 회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정말로 예수의 기적은 정상 상태로의 회귀에만 그치는 것일까? 복음서에서 예수의 기적은 단순히 장애와 질병을 고치는 행위에 국한되지 않는다. 예수는 그들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루가 5:21-25)고 선포하는 행위를 통해 당시 질병과 장애를 죄악의 결과로 여기는 이스라엘 사회를 뒤흔든다. 나아가 “저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난 것은 누구의 죄입니까?” 라고 묻는 제자들의 질문에 “자기 죄 탓도 아니고 부모의 죄 탓도 아니다. 다만 저 사람에게서 하느님의 놀라운 일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요한 9:1-3)고 답하며 장애의 원인이 죄라는 자명한 인식과 전제 자체를 부정한다. 즉,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기적과 치유 사역은 단순히 병을 고치는 것이 아닌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사회적 인식의 경계를 허무는 데 그 의의가 있다.

 

철학자, 평론가이자 신학자인 발터 벤야민(1892-1940)은 이러한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이 사라지는 순간이 “구원의 계기”이자 ‘메시아의 도래”라고 애기한다. 그의 종말론적 시선 속에서 정상 상태와 비정상 상태는 상호 의존적인 관계이기 때문에 양자택일의 접근법으로는 구원의 시간이 도래하지 않는다. 오히려 비정상 상태 속에 있는 존재들의 시선, 다시 말해 사회 속에서 보이지 않는 자들의 시선으로 그들을 구분하는 경계를 바라볼 때 메시아는 도래하고, 비로소 구원의 시간이 시작된다.[각주:2] 이 때 예수의 기적은 더 이상 맹목적인 믿음과 기도로 쟁취하는 신비체험이 아닌, 삶에서 매순간 쟁취할 수 있는 혁명이 된다. “문 밖에 서서 두드리던”(요한의 묵시록 3:20) 메시아가 정상과 비정상의 벽 사이에 생긴 균열로 들어오기 시작한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인류가 추구해오던 정상성의 환상을 깨뜨리자마자 사람들은 ‘뉴노멀’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뉴노멀이 수많은 폭력적 정상성 중에 하나를 택하는 일에 그친다면 인류는 더욱 빠르게 공멸의 길로 접어들거나, 더욱 큰 고통을 맛보아야 할 것이다. 이는 수년 전에 일차원적 기적을 바라던 나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내가 가진 장애에 대해 전혀 새로운 관점을 가진 이후로 모든 것이 변화했다. 물론 한국 개신교의 장애 인식은 중증, 경증을 막론하고 아직 갈 길이 멀다. 다분히 폭력적이고 철저한 시혜적 관점에 머물러 있는 게 현실이다. 하지만 <싱어게인> 이승윤 가수의 말처럼 내가 경계선에 서 있기 때문에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그들의 자리에 서서 볼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꿈꿔야 할 ‘뉴노멀’의 모습 또한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세상과 교회의 경계에 선 그리스도인들이 새로운 통합과 포용의 가능성을 이야기하고 살아내야 한다. 그동안 애써 외면해오던 존재들의 편에 서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 순간 메시아는 도래한다. 가능성은 분명히 있다.

 

 

  1. Youtube, JTBC Voyage. “♨핫클립♨ "몇 년간 봤던 무대 중 최고" 진짜 핵대급(?)인 30호 가수의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싱어게인|JTBC 210118 방송” https://www.youtube.com/watch?v=OxVy7wAK0Jw (2021-02-21 검색) [본문으로]
  2. 김진영, 「김진영의 벤야민 강의실: 희망은 과거에서 온다」 p. 103. 포스트카드 (2019).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