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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신학 2기/2021년 11월: 집단면역 그날이 오면

백신과 면역 그리고 ‘백신 여권’, 꼬리에 꼬리를 물고 / 박흥순

 

코로나바이러스 백신 접종을 시작한 후 7개월이 지난 11월 지금 정부는 “전 국민 집단면역이 형성되었다”라고 발표했다.(이 글은 정부가 집단면역 달성시기로 예상하고 있는 2021년 11월을 시점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 편집자 주) 국내 코로나바이러스 첫 확진자가 나온 작년 1월 이후 22개월 만이다. 거의 2년간 마스크 쓰며 생활해야 했고, 물리적 거리두기로 힘겹게 살았던 나날을 끝낼 수 있으리라는 희망에 모두 기대가 크다. 하지만 곧 겨울철로 접어들고 인플루엔자 유행을 예측한다면 한동안 더 마스크 쓰고, 물리적 거리두기를 지속해야 할 전망이다.

 

집단면역 소식은 해외여행을 손꼽아 기다리는 사람에게 정말 반가운 소식이다. 올 1월 26일부터 ‘백신 접종 증명서’를 발부하기 시작했던 아이슬란드부터, 덴마크와 스웨덴도 ‘백신 접종 증명서’를 ‘백신 여권’(vaccine passport)처럼 사용했다. 관광과 여행이 중요한 수입원인 이스라엘이나 스페인 같은 나라도 큰 관심을 나타냈고, 아시아에서는 태국과 싱가포르가 ‘백신 여권’에 주목했다. 그렇다면 ‘다가올 크리스마스 연휴나 신년 연휴 기간에 자유로운 해외여행이 가능할까?’ 안타깝게도 그 가능성은 아주 희박하다.

 

올해 말까지 코로나바이러스 백신을 보급하고 집단면역 효과를 볼 수 있는 나라는 미국과 유럽에 불과할 전망이다. 대부분 아시아 국가가 집단면역을 실현하는 시기는 2022년 말쯤으로 예상한다. 방문 계획을 세웠던 캄보디아와 라오스는 2023년 이후로 미뤄야 할 형편이다. 특히 사회적 기업과 협동조합 현장을 둘러볼 계획에 설렜던 과테말라 방문도 2023년이 지나야 가능할 것으로 예상한다.

 

코로나바이러스 백신 접종과 ‘백신 여권’ 그리고 자유로운 여행이란 주제는 개인 영역에 머물지 않고, 사회와 국가 문제로 확대할 수밖에 없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경험하는 다양한 양극화 경험은 사회와 사회, 국가와 국가 사이에도 현격히 나타난다. 백신 접종을 서두르는 일부 부유한 나라는 전체 인구에 몇 배에 달하는 백신을 구매했었다. 가장 부유한 13% 나라가 사용 가능한 백신 51%를 선구매했다. 예를 들어서 캐나다는 전체 인구 3천 8백만 명보다 10배나 많은 4억 1천 4백만 도스(doses)를 예약 완료했다. 대부분 가난한 나라가 백신 접종이 가능한 시기는 2022년 하반기나 2023년 상반기가 될 것이라 예상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이러한 불평등한 ‘백신 분배’ 상황에 대해 세계보건기구(WHO) 테워드로스 아드하놈 거브러여수스(Tedros Ghebreyesus) 사무총장은 “파국적인 도덕적 실패”(catastrophic moral failure)라고 지적했다. 또한 터키의학협회 오스만 엘벡(Osman Elbek) 교수는 불공정한 ‘백신 분배’는 “부도덕하고 파렴치한 자본주의”가 낳은 결과라고 지적한다. 다른 유럽 국가와는 대조적으로 독일과 프랑스는 ‘평등’에 근거해서 ‘백신 여권’에 분명한 반대 의사를 밝혔다. 4억 도스 백신을 주문했던 영국은 남은 백신 대부분을 가난한 나라에 기부할 것이고 말했고, 에마뉘엘 마크롱(Emmanuel Macron) 프랑스 대통령은 부유한 나라에 공급하는 백신량 가운데 최대 5%를 가난한 국가에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백신 접종과 집단면역은 ‘오래된 정상’(old normal)으로 되돌아가려는 경향성과 관련이 있다. 마스크 없이 이전처럼 자유롭게 만나고 모이고 즐길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상상하는 것이다. 하지만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은 ‘새로운 정상’(new normal)으로 전환할 수 있는지 묻는다. ‘오래된 정상’에서 지나치거나 잃어버렸던 시각을 회복해 ‘함께 사는 삶’을 실천할 수 있는지 질문한다. 경쟁하고 비교하며 살았기에 제대로 볼 수 없었던 ‘곁에 머물렀던 사람들’을 돌아볼 여유가 있는지 반성하는 것이다. 백신 접종과 ‘백신 여권’ 그리고 집단면역이란 말을 들으며 떠올린 성서는 누가복음이 소개하는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다.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색 옷과 고운 베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그런데 그 집 대문 앞에는 나사로라 하는 거지 하나가 헌데투성이 몸으로 누워서,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배를 채우려고 하였다. 개들까지도 와서, 그의 헌데를 핥았다. (누가복음 16:19-21)

 

멋지고 화려한 옷을 입고, 맛있고 기름진 음식을 날마다 먹고 마시며,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던 부자는 죽은 뒤 지옥에서 고통을 당했다. 하지만 거지 나사로는 아브라함 품에 안겼다고 확연히 다른 결말을 소개한다. 부자가 거지 나사로를 학대하거나 억압했다는 내용은 없다. ‘그런데 부자는 왜 지옥에서 고통을 당하는가?’ 무엇을 한 것 때문이 아니라 무엇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받은 형벌이다. 곁에 머물러 있던 동료이며 이웃이었던 나사로를 ‘투명인간’ 취급한 잘못이었다. 더불어 살 기회와 여건이 있었음에도 ‘함께 사는 삶’을 실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백신 접종과 집단면역 이후 ‘백신 여권’을 발급받아 해외여행을 떠나려는 기대와 설렘이 부끄러워진다. 글로벌 연대 차원에서 공정하고 정의로운 ‘백신 분배’를 강력하게 요구해야 할 것이다. 동시에 개인 차원에서는 곁에 머물러 함께 살지만 눈여겨보지 않았던 사람을 주목하는 섬세한 시선이 필요하다. 사회와 공동체를 함께 떠받드는 ‘한 사람’이 없어지는 상실과 부재가 사회와 공동체 전체에 끼치는 영향을 거듭 성찰하고 반성하는 것이다. 백신 접종과 집단면역 이후 사회와 공동체에서 논의해야 할 이야깃거리는 ‘함께 살기’이길 기대한다. 혹시 이러한 기대가 너무 ‘순진’하거나 ‘헛된 상상’이란 말을 듣게 될까 봐 조마조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