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들이 한 자리에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었다. "주님,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나라를 되찾아 주실 때가 바로 지금입니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때나 시기는 아버지께서 아버지의 권한으로 정하신 것이니, 너희가 알 바가 아니다. 그러나 성령이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능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그리고 마침내 땅 끝에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 (새번역, 사도행전 1:6~7)
사도행전은 누가복음에 연결되는 누가공동체 저작의 두번째 작품이다. 그래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묶어 누가-행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누가-행전을 쓴 사람들은 2세기초 로마지역에 살았던 공동체로 나사렛 예수의 이야기에서 시작하여 로마에 예수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지기까지를 역사라는 틀을 빌어 기록했다. 누가-행전이 매우 긴 문서임에도 모두 신약성서에 실렸음을 보면 얼마나 그 영향력이 대단했는지를 알 수 있다. 누가 문서의 가장 중요한 에센스가 위의 행전 1:6-7절이다. 1세기 초대교회에 가장 중요한 질문중의 하나는 아마도 본문에 나온 이스라엘 회복의 날(때)였을 것이다. 누가복음의 예수는 딱 잘라 말한다. "너희가 알 바가 아니다"
누가-행전을 기록한 사람은 1세기 혼란했던 초대 교회의 역사를 베드로에서 바울로 이어지는 성령에 이끌린 사도들의 이야기로 기록한다. 그러나 바울 서신이 사도행전의 기록들을 면밀히 살펴보면, 1세기 예수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한 교회는 할례를 받지 않는 이방인(행전?, 갈라디아서?)들이 온전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할례와 율법은 여전히 유대인들의 특권이었고, 곧 이어질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방의 제국과 시민들은 심판받게 되리라 생각했다. 이런 생각의 굴레를 벗어난 사람들 중 하나가 당시 지중해의 두 번째 도시였던 다소(Tarsus)에서 태어난 바울이란 유대계 헬라인이었다.(로마 시민권도 있었다고 하니 오늘날의 한국계 미국인 개념과 비슷하다) 그는 평생을 예루살렘 교회의 비난과 편견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이방인을 아무 조건없이 구원하신다고 믿었다. 할례와 율법을 평생 지키고 산 바울이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유대교의 새로운 확장을 고민하던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지식인들의 영향이었을 것이다.(아마 집사 스테판도 그 중 하나였을 것이다.) 바울과 같은 사람들의 불굴의 의지는 결국 초대교회의 목표를 이스라엘의 회복을 기다리는 모임에서 복음을 들고 세상으로 흩어지는 모임으로 변화시켰다. 기다리고 머물고 벽을 쌓고 편견을 만들어가는 공동체가 아니라 실천하고 흩어지고 벽을 허물고 편견을 타파하는 선구자들로 변화시킨 것이다.
초대 교회의 이방인들에 대한 결단은 그들의 정체성을 결정하게 되었다.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행 11:26) 현대 교회는 성서가 기록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이란 명칭이 어디에서 유래되었는지 잊지 말아야 한다. 스스로의 안전과 승리를 포기하고 수 천년동안 내려왔던 민족적, 종교적 경계를 무너뜨리고 과거 유대를 거닐었던 예수의 한계를 뛰어넘어 이방인, 즉 타인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했던 이들의 이름이 '그리스도인'이었다.
흔히 11월이 오면 백신 접종률이 집단면역을 이루기에 충분해질 것이라 말한다. 정부의 정책과 민간 사업들이 모두 그날까지 현상을 유지하는 것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우리 공동체가 회복할 날이 올까? 면역의 날을 끊임없이 정부에게 질문하는 모습은 마치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메시아를 기다리는 유대인들을 떠올린다. 그 날만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눈에는 오늘 끊임없이 지워지고 스러져가는 교회의 타인들이 보이지 않는다. 나의 구원은 타인의 구원 없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얼마가지 않아 이제 세계는 백신을 맞은 자들과 그렇지 못한 자들로 양분될 것이다. 거기에는 계급과 자본으로 얼룩진 구분과 분리가 있을 것이다. 아마 한국 사회와 교회도 11월까지, 그리고 그 이후로도 그러한 분리와 차별을 겪게 될 것이다. 그것을 보지 않고 보듬지 않는 자들은 '그리스도인'이라 불릴 자격이 없지 않을까? 성서의 역사는 유대의 역사이다. 그리고 유대의 역사는 인간의 역사이다. 그 날을 기다리는 자들에게 내일의 소명은 없었다. 그들에게 내일을 살아갈 능력은 주어지지 않았다. 우리는 아마도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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