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블루’. 코로나 19와 우울감을 뜻하는 블루의 합성어로 코로나로 인해 발생하는 우울 증상을 뜻하는 용어이다. 최근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40% 이상이 ‘코로나 블루’를 겪었다고 답했을 만큼 ‘코로나 우울’은 우리 사회에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증상의 주요 원인으로는 사회적 거리 두기로 인한 고립감, 일상생활의 제한으로 인한 스트레스, 감염에 대한 염려 등을 꼽을 수 있다. 대표적인 증상으로는 불면증이나 소화불량, 불안증세와 무기력증 등이 나타난다. 1 2
요즘 우리는 코로나 19로 인해 멈추어버린 소소한 일상의 소중함에 대해 자주 이야기한다. 친구들과의 수다, 크고 작은 모임과 행사, 여름 휴가와 맛집 여행 그리고 무엇보다 마스크 없이 자유로웠던 그 시절 그때를 그리워한다. 코로나를 알지 못했던 ‘지난날’에 대한 짙은 향수는 11월 집단 면역이 형성될 ‘그 날’에 대한 기대로 고스란히 이어진다.
이 상황에서 다만 염려스러운 것은 집단 면역 형성에 대한 소중한 바램이 단지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에만 집중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자칫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현재에 충실하지 못하도록 만들 위험이 있다. 과거와 미래도 중요하지만, 지금 이 순간 우리가 느끼고 경험하는 것들과 코로나 상황속에서도 간직해야 할 본질적 가치들은 무엇보다 소중하다.
“이 마음에 심어 주신 당신의 기쁨, 곡식이다, 포도주다, 풍년에 흥겨운 저들의 기쁨보다 크옵니다”(시편 4:7). 다윗은 참다운 기쁨에 대해 노래한다. 그는 눈에 보이고 물질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것으로부터가 아닌 마음의 근원에서 흘러넘치는 기쁨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 기쁨은 본질적이고 참된 기쁨으로서 우리의 상황과 상태에 의존하지 않는 견고한 기쁨이다. 그것은 바로 ‘당신의 기쁨’, 즉 하느님에게서 오는 기쁨이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주로 외형적인 것에서 기쁨과 만족을 추구해왔다. 외모, 재산, 학벌, 지위뿐만 아니라 드러나는 성과나 수치 등에 삶의 가치와 목적을 두고 살아왔다. 이것은 비단 사회적 현상만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것의 가치에 민감해야 할 교회 안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난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예배 출석, 직분, 봉사, 헌금, 전도, 구제 등의 여부를 신앙의 척도로 여기거나 하느님께 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율법주의적인 태도는 여러 가지 원인에서 비롯된다. 경쟁과 성취 중심의 교육제도와 문화에 길들여진 우리는 신앙도 눈에 띄는 성과물로 보여야 한다는 생각을 했을 수도 있다. 혹은, 자본주의 원리에 따라 하느님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우리도 무언가를 드려야 한다는 거래의 원칙을 적용했을 수도 있다. 그 외에도 뿌리 깊은 기복 신앙, 복음에 대한 불확신, 신학 지식의 부족, 율법주의적인 설교, 하느님 아버지상에 대한 오해와 결핍 등이 그 원인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율법주의적 신앙관은 오히려 신앙의 성숙을 가로막는 역할을 할 수 있다. 하느님의 값없는 은혜는 잠재적으로 거부하면서 그로 인한 공허함을 종교적 행위를 통해 채우려하기 때문이다. 개인의 노력과 성과를 통해 하느님과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의식은 오히려 그분과의 관계를 더욱 멀어지게 하는 원인이 된다. 왜냐하면, 주권적인 은혜를 베푸시는 하느님에 대한 불신은 깊어지고 사랑받는 자녀로서의 정체성과 확신은 점차 사라지기 때문이다. 더불어, 사랑의 대상인 형제와 자매들을 종교적 행위와 실적으로 평가하려는 유혹에 직면하게 된다.
코로나 19로 인해 우리는 그동안 익숙히 행해오던 대부분의 교회 활동을 중단해야 하는 상황에 맞닥뜨리게 되었다.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은 실제로 크게 당황했고 불안했으며 깊은 우울감을 느끼고 있다. 교회 안 ‘코로나 블루’는 하느님이 아닌 종교적 행위에 마음을 기대고 있었던 우리의 슬픈 단면을 드러내 준다. 하느님의 헤아릴 수 없는 사랑과 은혜를 벗어나 ‘나’의 의로운 행실에서 안정감과 우월감을 누렸던 삶, 과연 그 삶 속에서 우리는 참된 기쁨을 누리고 있었는가? 또한, 우리는 ‘함께’ 그 기쁨을 나누었던가?
우리가 창조된 목적은 단 하나, 하느님과 영원히 함께하기 위해서다. 하느님의 임재안에 거하게 되면 자연히 그분의 사랑과 은혜가 우리 안에 흘러넘친다. 나무가 시냇가에 심겨지면 열매는 자연스레 열리게 된다. 따라서, 우리가 드리는 참된 예배와 봉사, 전도와 구제는 은혜를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은혜로 인해 맺히는 싱그러운 열매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누구든지 나에게서 떠나지 않고 내가 그와 함께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15:5).
2021년 11월이 오면, 아니 우리가 살아 숨 쉬는 이 순간, 우리 마음에 심어주신 하느님의 기쁨을 회복할 때 교회 안 ‘코로나 블루’의 면역은 비로소 시작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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