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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신학 2기/미얀마, 광주, 5월 그리고 민주주의; 의식과 무의식의 흐름

오월의 기억을 마주하며 / 이주영



이주영 (성공회대학교 신학과)


나에게는 광주에 대한 특별한 기억이 있다. 2012년 겨울, 생전 처음 만난 어른들의 따뜻한 환대에 힘입어 광주에서 한 달간 지낸 적이 있었다. 당시 중학교 2학년의 나이였던 나는 과외 선생님의 영향으로 우파 정치에 대한 큰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나를 보살펴준 광주의 여러 어른들 앞에서 나의 정치 성향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심지어 내심 광주 시민군에 북한군이 개입했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확신에 차 있기도 했다. 어른들이 “자네는 누가 대통령이 되면 좋겠는가?” 하고 물어보시면 나는 박근혜 후보가 당연히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고 대답했다. 그러면 어른들은 불편한 내색 하나 없이 나의 생각을 진심으로 존중해 주셨다.

 

그 어른들은 나를 유독 예뻐해 주셨다. 그 체육관에 어리고 젊은 친구가 나밖에 없긴 했으나, 그분들은 그저 어린 학생 그 이상으로 나를 특별히 여겨 주셨다. 나들이를 가실 때도, 다 같이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갈 때도 나를 빼놓지 않고 데려가시고, 언제나 “자네의 말도 일리가 있다”라고 하시며 나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진지하게 들어주셨다. 그리고 그 어른들의 대부분이 광주의 시민군이었고, 그 중에는 ‘광주 미니버스 학살사건’으로도 알려져 있는 ‘주남마을 버스 총격 사건’의 생존자도 늘 같이 계셨다는 사실을 함께하는 식사 자리에서 알게 된 건 내가 광주를 떠나기 얼마 전의 일이었다.

 

살면서 우리는 많은 일들을 기억하고, 우리가 기억한 것보다 많은 것들을 망각한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그렇듯, 절대로 잊히지 않는 기억이 있다. 기억하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사건은 다르게 해석되고 다르게 기억된다. 그리고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5월의 광주는 아직 누구에게나 불완전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동구권의 신학자 미로슬라브 볼프는 그의 책 <기억의 종말. 홍종락 옮김. IVP (2016)>에서 ‘올바르게 기억하기’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에게 올바르게 기억하는 일이란 일어난 사건의 진실을 환하게 드러내 밝히고, 사건에 대한 기억이 가진 정서적 힘을 제거하는 동시에 새로운 세계를 향한 가능성으로 탈바꿈하는 행위를 뜻한다. 그리고 올바른 기억은 “악으로 훼손된 세상 속에서 정의의 도구이자 불의에 맞서는 방패가 되어주며, 세상 속에서 이뤄지는 화해의 행동이 다가올 사랑의 세계로 손을 뻗도록 도와준” [각주:1]다. 다시 말해, 지극히 개인적이고 파편화된 ‘악’에 대한 경험을 함께 직면하여 진실되게 기억하는 행위를 통해 그 경험이 피해자를 영원한 피해자의 자리에 머물지 않게 할 수 있고, 가해자의 영원한 지배에서 해방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우리는 새로운 세계를 향한 가능성으로 도약할 수 있게 된다. 이는 단순한 수동적 포기, 혹은 종교성에 의지하여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편협한 대안의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 종교성을 넘어선 사회 변혁의 기회에 주체적으로 동참하는 결단을 의미하며, 희생자의 정체성에서 벗어나 악의 경험을 딛고 일어선 새로운 사회를 창조할 세력으로의 부활을 암시한다. 악의 기억에 종말을 고하고, 동시에 새 시대의 초석을 놓는 사회적 행위자의 탄생을 결단하는 행위인 것이다.

 

물론 이는 말처럼 단순한 일이 아니다. 80년 5월의 광주는 아직 학살명령을 내린 주체가 누구인지조차 명확히 밝혀진 바가 없으며, 유력한 학살 명령권자는 아직도 본인의 악행을 인정조차 하지 않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시 계엄군의 총칼에 저항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못한 채로 스러져간 241명의 시민과 가족을 잃은 수많은 사람들에겐 올바르게 기억할 기회조차 제대로 주어지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며 조금씩, 아주 조금씩 사건의 진상이 수면위로 드러나고 있을 뿐이다.

 

올해 2월, 미얀마에서 군부 쿠데타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후 미얀마 시민들의 시민 불복종 운동을 통한 비폭력적 저항운동에도 불구하고 군부에 의해 수많은 무고한 시민들이 살해당하고, 체포 및 구금되었다는 소식은 나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미얀마에 있는 청년 친구들로부터 여러 비보를 전해 들었다. 하지만 미얀마 시민들이 80년 5월의 광주와 연대하고 있다는 소식은 나를 놀라게 했다. 40여년 전 광주의 기억이 새로운 저항 운동에 숨을 불어넣고 있었다. 희생의 기억은 더 이상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새로운 악의 탄생을 저지하고,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이들의 뜨거운 심장 속에서 끊임없이 다시 태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미얀마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고 있다. 군부는 전투기를 이용한 폭격과 무차별적 체포를 비롯한 더욱 잔혹한 방법을 이용해 시민들을 탄압하고 있다. 악의 지배는 현재 진행형이며 끝나지 않을 것 같이 맹렬하다.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한한 연대와 끊임없는 기도뿐이라는 현실이 나를 무력하게 만든다. 그러나, 언젠가 2021년 2월의 미얀마가 80년 5월의 광주처럼 희생의 기억을 넘어서 새로운 세계로 나아갈 가능성을 또 다른 광주와 미얀마에게 보여주리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광주는 비단 미얀마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2021년 5월과 6월 사이 어디쯤을 살아가고 있는 나 또한 변화시켰다. 2012년의 그 경험은 나로 하여금 내가 살아가는 세상을 다시 보게 만들었고, 80년 5월 광주의 기억과 세월호의 경험은 과거의 나를 뒤흔들어 놓았다. 42년전 오늘 발표된 어느 시가 말하고 있듯이, 올바른 기억을 향한 누군가의 투쟁과 헌신은 분명히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다.

 

<아 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

 

김준태

 

(…)

 

4. 아 아, 광주여 무등산이여
죽음과 죽음을 뚫고 나아가
백의의 옷자락을 펄럭이는
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
불사조여, 불사조여, 불사조여
이 나라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을 다시 넘어오는
이 나라의 하느님의 아들이여

예수는 한 번 죽고
한 번 부활하여
오늘까지 아니 언제까지 산다던가
그러나 우리들은 몇 백 번 죽고도
몇 백 번을 부활한 우리 몸의 참사랑이여
우리들의 빛이여, 영광이여, 아픔이여

지금 우리들은 더욱 살아나는구나
지금 우리들은 더욱 튼튼하구나
지금 우리들은 더욱
아 아, 지금 우리들은
어깨와 어깨 뼈와 뼈만 맞대고
이 나라의 무등산을 오르는구나
아 아, 미치도록 푸르른 하늘을 올라
해와 달을 입맞추는구나

광주여, 무등산이여
아 아, 우리들의 영원한 깃발이여
꿈이여 십자가여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욱 젊어져 가는 청춘의 도시여
지금 우리들은 확실히
굳게 뭉쳐 있다 확실히
굳게 손잡고 일어선다


*1980년 6월 2일 전남매일신문 1면

 

  1. 미로슬라브 볼프, 홍종락 옮김. <기억의 종말> IVP (2016) pp. 206-207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