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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신학 2기/청년: 2021년 대한민국에서 청년으로 살아가는 일

청년과 공정과 능력주의가 하나로 묶이는 2021년의 한국 사회에 대해 가나안 신도가 생각하는 기독교의 미래 / 이정한

 

이정한(감리교신학대학교를 졸업한 가나안성도)

 

1. 또 ‘포스트’야?

2007년 출간된 『88만 원 세대』로부터 한국 사회에 세대론에 관한 논의가 담론장의 중심으로 진입했다. 경제적 불평등 구조 속에서 20대를 중심으로 한 논의가 세대의 문제로까지 발전하게 됐다. 『88만 원 세대』가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문제를 인식하기 위한 접근이었던 반면, 이를 통해 세대론, 혹은 청년 담론이 중심으로 떠오르자 그 담론의 외피를 입은 우파적 양상도 나타났다. 2010년 『아프니까 청춘이다』와 같은 책들의 출간이 그것이다. 과잉 등록금에 대한 문제, 대학 서열화에 따른 계층 결정 등의 비판에 대한 일종의 반동적 현상이라 말할 수 있다. 앞선 논의가 경제적 구조에 대한 문제 인식이었다면, 뒤이은 현상은 그 구조에 지친 이들에 대한 ‘위로와 힐링’의 방식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청년 담론은 ‘청년 세대’라는 집단을 담론의 대상으로서 등장시키며, 그러한 집단과 병치되는 대립쌍으로 ‘기성세대’라는 집단을 등장시킨다. 이 청년 담론에서 ‘우리’와 ‘그들’의 구조는 기성세대와 청년 세대의 상상적인 대립항을 바탕으로 구성된다.  [각주:1] 

이와 같은 청년 담론이 경제적 문제의 인식의 한 측면, 그리고 그 문제를 은폐하는 위로와 힐링의 직접적 대응의 한 측면으로 이뤄졌던 반면, 최근 한국 사회에서 이뤄지는 청년에 대한 담론은 ‘공정성’을 중심으로 하는 능력주의의 양상을 보이고 있다. 강화된 경쟁의 상태와 함께, 팬데믹의 상황 속에서 보다 위태로운 시간을 살고 있는 이들의 중심에 ‘청년’이라는 모호한 주체를 놓고, 그 이름을 불안정한 구조나 심리적 고통에 연결하는 것이 아니라 경쟁 자체를 더욱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능력주의’로의 논의 전개는 분명 과거 논의와는 차이점이 있다. 문제를 인식하기 위한 시도나, 혹은 그 문제로부터 회피하기 위한 반동적 시도가 아니라는 점에서, 오히려 제기되는 문제에 대한 정면 돌파를 꽤하고 있다는 점에서 지금의 청년 담론을 ‘포스트 청년 담론’이라고 새롭게 바라볼 만하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이름 붙이는 것으로 손쉽게 풀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식의 이름 붙이기의 유혹에서 벗어나 어떤 ‘포스트’로의 이행을 모색해야 하는지가 더 중요하다.

2. “로또 취업”과 스펙 위조를 바라보는 시선

2017년 5월 12일, 문재인 대통령은 당선 이후 첫 외부 공식 일정으로 인천 국제공항을 방문했다.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정책 추진 방침을 발표했고, 3년이 지난 2020년 인천국제공항공사가 비정규직이었던 보안 요원을 정규직 ‘청원 경찰’로 전환하겠다고 발표하며 큰 논란이 일었다. 이른바 ‘인국공 사태’로 알려진 이 일은 조국 전 장관 논란과 함께 대표적인 현 정권의 ‘불공정’ 사례로 손꼽힌다. 공기업 시험을 준비하는 ‘취준생’들을 중심으로 “역차별”, “무임승차”, “로또 취업” 등의 목소리가 폭발했다. ‘서울의 좋은 대학 나와 토익 시험 만점을 받아도 가기 어려운 공기업 정규직을 스펙 낮은 이들이 차지하는 게 불공정하다’는 게 불만의 요지였다.  [각주:2]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와 조국 전 장관의 자녀 입시 특혜 의혹이 이들이 보기에 유사한 불공정 사례라는 것이다. 불안정 노동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하나의 시도와 권력을 이용한 경력 위조가 같은 선상에 놓인다는 것은, 공정을 기치로 내세우지만 오히려 공정함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노력을 알아 달라는 일종의 인정 투쟁임과 동시에 계층을 계급으로까지 치환하고자 하는 욕망의 발현이며, ‘룰’을 위반하지 않는 차별에는 찬성하겠다는 의미이다.

3. 능력주의

제1 야당 대표가 화두에 올린 “능력주의”(meritocracy)라는 말은 영국의 정치철학자 마이클 영이 1958년 출간한 󰡔능력주의의 부상󰡕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능력을 중심으로 한 가상의 미래 사회를 다룬 내용으로, 지금 한국 사회가 받아들이는 능력주의 담론과는 달리 마이클 영은 능력중심주의가 야기하는 문제를 지적하기 위해 그 용어를 사용했다.

그런데 능력주의가 공정함을 담보한다는 지금의 포스트 청년 담론이 과거와 다른 점은 이 담론의 형성 주체가 청년들 스스로라는 점이다. 경제적 불평등에 놓여 있던 상황에서 기성세대의 ‘청년 담론’은 힐링과 위로 혹은 정치 참여의 유도 등으로 전개되었던 반면, 지금은 그 기성세대에 대한 분노와 더불어, 능력에 따른 합당한 차등적 대가를 제공받지 못한다는 ‘불공정함’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하며 공정성의 이슈를 내세운다. 그러나 각각 다른 양상으로 나타남에도 불구하고 결국 경제적 모순과 불평등의 문제를 세대의 문제로 인식한다는 점과, 또한 그 담론이 문제의 본질을 은폐하는 방식으로 기능한다는 점에서 사실 둘은 같다고 볼 수 있다.

4. 담론의 폐쇄성

공정성에 대한 집착은 주어진 사회적 가치 평가의 체계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위에서 결과를 위한 규칙이나 절차만을 따지는 수준에 머무르고 말 우려가 크다는 지적이 있다. 누가 엄청난 보상을 독식하는 승자가 되는 게 마땅한가 아닌가를 따질 뿐, 승자독식의 원리 자체에 대한 물음은 사라진다는 것이다.  [각주:3] 

더불어 이 공정성에 대한 논의가 ‘공정함이 무엇인가’를 모색하는 방향(positive)으로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공정하지 않은 무엇’을 지적하며 반발의 방향(negative)으로 전개된다는 점에서 결국 공정성 자체는 뒷전으로 밀려나며 “담론의 폐쇄성”  [각주:4] 이 나타난다. 이처럼 폐쇄적인 담론 안에서 공정성은 그저 ‘객관적 당위’로 제시되며, 공정성을 주장하는 집단은 이해관계와 무관한 것처럼 보이게 된다. 더 나아가 해당 논의에 대한 다른 집단의 참여를 가로막기까지 하며, 논의의 발전을 지연시키거나 차단하게 된다. 그로 인해 불공정을 지적하는 담론의 양상은 현실의 모순을 드러내기보다 그 모순을 은폐하며, 각 주체들은 주어진 룰에 적응하여 살아갈 방도를 찾는 일에 머무르게 된다. 다시 말해 무언가에 대한 모색은 없고 반대를 통해서만 존재하는 실체 없는 담론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교계 언론 <뉴스앤조이> 2021년 7월 20일 기사 “모릅니다. 제가 청년들을 지키는 사람입니까?”에서 신학생 김 씨가 말하는 교회의 청년 공동체 지원에 대한 이야기 역시 현실의 구조를 답습하는 교회의 일면을 보여 준다. 김 씨는 자신이 출석하는 교회의 “청년 공동체 지원이 잘돼 있다”고 말한다. 그가 언급한 지원이란 이런 것이다. ‘삼성맨’ 출신 멘토 집사가 청년들의 자소서 첨삭 등을 도와주고, 시청 공공 근로나 기업 인턴십 기회 등이 있을 때 청년들에게 공지를 세심하게 해 주었다는 것. 자신의 노동 시간으로 인해 미처 참석하지 못하는 교회의 교육이나 일을 다른 교인이 분담해 주었기 때문에 교회 봉사를 감당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는 교회가 청년의 상황을 잘 이해하고 세심하게 배려했기 때문에 접근이 쉽지 않은 사회 복지 혜택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고 또한 교회 공동체에 참여하기 용이했다고 말하지만, 교회가 제공한 그 배려는 사실 현재 한국 사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를 넘어서기 위한 무엇이라기보다는 그 왜곡된 구조 내에서 ‘잘 버티기’ 위한 체제 유지적 배려였다.

이처럼 담론 안에 갇힐 때 불안정 노동자는 그 자체의 현실을 수용할 수밖에 없으며, 결국 우발적인 동시에 필연적인 김용균들이 끊임없이 죽음을 이어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 불공정하고, 무엇이 잘못되었다는 ‘반대의 담론’이 아니라 어떤 공정성을 추구할 것인가, 어떤 사회를 만들어야 하는가에 대한 ‘모색의 담론’이다.

5. 넘어서기: 한국 교회의 불가능성 대 기독교의 가능성

7월 9일, 기독교교회협의회 김영주 전 총무 등 에큐메니컬 원로들이 주최한 박원순 전 서울시장 추모 기도회가 열렸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된 후 죽음을 선택했기 때문에 사건의 진상조사는 원활하게 이뤄질 수 없었다. 그럼에도 피해자의 고발과 수차례 이어진 기자회견을 통해 사실이 드러났고, 이후 국가인권위원회는 직권조사로 재발 방지 대책 등을 내놓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법 체계 내에서 드러난 사실이 없기 때문에 사실 판단을 할 수 없다는 이들로 인해 피해자는 지속적으로 2차 피해를 당해야 했다. 이러한 불균형의 상황에 대한 일말의 인식조차 없이 진행된 추모 기도회는 한국 교회의 한계를 명확히 보여 준다.

하지만 한국 교회의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여전히 가능성을 안고 있다. 기독교는 피해의 위치를 편드는 것이 그 정신이기 때문이다. 일자리가 없어 길가에 머물러야 하는 이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것, 다시 말해 소외의 위치에 있는 사람을 동등한 구성원으로 호명하는 것이 “하늘 나라”(마 20:1)라는 게 포도원 비유를 통한 예수의 가르침이다. 먼저 와서 더 오래 노동하고도 같은 임금을 받는 것이 ‘불공정’하다는 의견에 대해, 포도원 주인은 개의치 않아 하며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약속한 임금을 주는 것이 옳은 것이라 일축한다.

청년과 공정과 능력주의라는 어울리지 않는 이 개념들이 하나로 묶여 논의되는 현실에 대해,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차별이 당연하다고 말하는 이들에 대해, 가해의 편에서 기독교 정신을 왜곡하는 이들에 대해서도 이와 같은 단호함이 필요하다. 지구가 평평하다는 허황된 주장을 기계적 공정함 속에서 과학의 테이블에 올려놓을 수 없듯이 기존의 담론에 갇혀서는 안 된다. 무엇이 공정한 사회인가를 모색하며 비정규 노동자의 편에, 성폭력 피해자의 회복을 위한 편에 설 때 기존의 담론을 ‘넘어서는(post) 담론’을 만들어 나갈 수 있다.

 

  1.  김선기, “‘청년세대’ 구성의 문화정치학,” 『언론과 사회』 제24권 1호, 2016, p. 20. [본문으로]
  2.   박권일, “능력주의 해부를 위한 네 가지 질문,” 『능력주의와 불평등』, 교육공동체벗, 2020, p. 66. [본문으로]
  3.  장은주, “능력주의의 함정에서 벗어나기,” 『철학과 현실』, 2021.3. p. 18. [본문으로]
  4.   김정희원, “‘공정’의 이데올로기, 문제화를 넘어 대안을 모색할 때,” 『황해문화』, 2020.12. p. 30-31.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