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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신학 2기/대선을 통과하며 느꼈던 감정의 흐름들

정권 교체로 새 세상은 오는가? / 매실

 

독일 거주 한인 매실


가히 믿기지 않는 시대다. 2022년 옆 나라에선 전쟁이 일어나고, 사람들이 죽어가고. 원하지 않는 총칼을 든다. 활자로만 접했던 전쟁이 바로 눈앞에 살아오는 삶의 이야기가 되었다. 국경을 넘고 넘어 내가 사는 이곳까지 우크라이나 난민들이 건너오고... 그저 주어진 일상을 살기엔 버거운 나날이다.

하물며 지금 우리나라는 어떤가? 역대 최저 격차로 제20대 대통령이 탄생했다. 주구장창 정권교체를 주창하던 이들이 결국 승리를 거둔 셈이다. 9명 중 한 명이 갈팡질팡하는 사이 윤석열정권이 새 정부를 꾸리게 되었다. 승리를 거머쥔 이들도 그리 교만해질 것 없고, 패배한 자들은 더군다나 할 말이 없는 모두가 아쉬운 선거였을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론 고국을 떠나독일에서 하는 세 번째 투표였다. 한국에선 코 닿을 곳에서 쉽게 투표를 했던 것과는 달리, 이곳에서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의무를 실천하기란 보통 큰맘을 먹어야 하는 것이 아니었다.

보통 해외 부재자투표는 약 5일의 시간이 주어진다. 독일 전국에서 5개 밖에 없는 한국 대사관이 있는 지역에 찾아가서 투표해야 하기에, 오가는 왕복시간 및 교통비를 염두 해야 한다.

전에 살 던 하이델베르크에서는 2시간 편도 기차를 타고가야 대사관에 갈 수 있었고, 지금 뒤셀도르프에서 역시 1시간 반은 기차를 타야 본에 있는 대사관에 방문할 수 있다. 매번 오가는 길이 쉽진 않아도, 한국을 생각하면 마음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애증 덕에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나마 먼 곳에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국민의 의무를 성실히 이행하려 매 선거마다 빠짐없이 참여하고, 주변 한인들에게도 열심히 권유한다.

이번 대선에도 겨우 시간을 맞춘 금요일 저녁에 예매해 둔 기차를 타고 몇 한국 친구들과 대사관으로 향했다. 마지막까지도 누구에게 표를 던져야할지 마음이 갈팡질팡했다. 이 마음을 아는지 2월 말에 하늘에선 구슬만한 우박이 쏟아졌다.

사실 20대에는 내 투표로 세상이 바뀐다는 확신이 있었다. 내 한 표가 나의 지표와 의사를 정확히 반영한다고 생각했고, 투표로 세상은 발전하고 나아간다 믿었다. 그러기를 여러 번, 내가 원하는 후보가, 혹은 반대하던 후보가 대통령이 되어 몇 년씩 대한민국의 수장으로 노릇하는 그 나라의 국민으로 살아가면서 대다수 뿌듯하고 자랑스러운 나날이기보단 부끄럽고, 한탄하는 날들이 슬프게도 더 많았다. 오죽하면 독일 이 곳에서도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집회에 나가 행진을 했을까... 그러던 투표가 여러 번... 이번 대선 후보들의 선거운동과 나름 치열했던(?) 경쟁 구도는 어떤 기대와 희망도 내게 가져다주지 않았다. 오히려 기권이 나은 선택일까? 난생 처음 이런 생각도 해보았다. 그렇게 무거운 발걸음을 이끌고 대사관에 도착했고, 이번처럼 투표하는데 오래 고민했던 적도 없었던 것 같다. 투표지를 앞에 두고도 1분간은 도장을 찍지 못했다. 투표장을 떠나는 순간까지도 그 찝찝함은 가시질 않았다. 언제까지 차악을 피하기 위해, 차선을 택하는 투표를 계속해야할까. 이것이 정말 유권자의 최선일까? 내 한 표의 의미에 대해 곱씹자니 답답함이 밀려오고... 국민으로서의 의무를 행하는 것이 이렇게 괴로운 일이라니, 새삼 이번 선거가 준 의미가 무엇일까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 후 개표 전 이곳의 가까운 친구들과 대선에 대해 이야기 나눌 기회가 있었다. 우리가 바라는 대통령은 어떤 모습인지? : 차별금지법을 통과시킬? 페미니스트? 부끄럽지 않은? 아픈자들을 위한? 다양한 경험이 있는? 편견 없는? 정당에 휘둘리지 않는? 여러 이야기를 나누던 중, 이것은 결국 우리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당당하게 갖고 싶은 우리 스스로의 정체성 아닐 까 싶었다. 우리의 이 5년을 그저 윤석열 정부에게 맡겨버리기에는 너무 긴 시간이다. 민주주의의 권리를 행사하는 투표하는 그 하루가 전부가 아니라, 나머지 364일의 일상에서 국민으로서의 권리를 어떻게 기억하고 실천하느냐는 더 큰 질문지 앞에 우리는 서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번 정권에게 기대가 없다면, 국민으로서 제 때 다그치기라도 잘하면 된다. 혹은 투표한대로 잘하리라 기대한다면, 지지하고 밀어주는 것이 제 역할이겠지 않겠는가. 다가오는 6월 치열하게 투표하자. 투표기회 없는 해외 사는 이들의 몫까지 국내의 국민들이 기억해 주길 바란다.

대선은 지나갔고, 새로운 정부는 꾸려지고 이제 나도 나대로 이곳에서 내가 바라는 대통령의 모습대로 내 일상에서 나의 몫을 살아야겠다. 그것이 내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가진, 내 권리와 의무에 부끄럽지 않은 유일한 길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