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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신학 2기/대선을 통과하며 느꼈던 감정의 흐름들

대선이 끝나도 우리 삶은 계속되니까 / 이희영

 

이희영 (FLOW Ministry 총무간사)

 

이번 대선은 너무 어려웠다. 전라도에서 나고 자란 나에게 선거는 그동안 별로 큰 고민거리가 아니었다. 대선은 언제나 정해진 답이 있었고, 지선이나 총선은 뻔한 답이 있기 때문에 견제를 위해 얕은 수를 쓰는 것 정도 이상으로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이번 대선은 어려운 걸 넘어서 무기력했다. 어느 쪽도 내 목소리를 대변해줄 수 있는 쪽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 대선에 있어서 처음으로 내 투표권이 의미 있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던 방식은 바로 기권이었다. 누가 당선이 되어도 지지율이 낮으면 일을 추진하는데 제동이 걸릴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누가 되었든 최저득표율로 당선되도록 하자, 그것이 이번 나의 대선의 목표다! 라고 생각했다. 드디어 내 투표권을 값지게 쓸 수 있는 방식을 찾은 것 같았다.

 

이런 나의 입장을 표명했을 때 세대에 따라 반응이 극명하게 나뉘었다. 또래들은 공감했고, 윗세대는 답답해했다. ‘원래 선거는 차악을 선택하는 거야’, ‘그래도 투표는 민주주의의 꽃이야’ 라는 말들은 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차악이라니 모두 절대 악 같은데, 투표 하나 해놓고 내 할 일을 다 한 것처럼 생각하니까 우리가 아직 여기에 서 있는 거지 싶었다. 문재인 정권이 들어서고, 물론 물대포나 최루탄은 사라졌다. 여성에 관한 법률도 많이 제정이 되었다. 그런데, 내로남불의 모습은 너무 추했고, 성폭력 피해자를 향한 2차 가해는 극렬했다. 그래도 문재인 정권이 낫다고 말하는 이들은 그래도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 이들이었다. 20대 여성으로서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나에겐 도찐개찐일 뿐이었다. 아니, 더 끔찍하게 다가왔다. 원래 그럴 줄 알았던 이들이 그런 행동을 할 때는 분노가 치밀어 싸울 힘이라도 났는데, 믿던 도끼에 발등 찍히는 경험은 절망적이었다. 저들이 힘을 가지고 있었을 땐 적어도 내편이라고 믿어지던 이들이 곁에 있었는데, 내편인 줄 알았던 이들이 힘을 가지자 홀로 남겨져 버렸다. 차라리 저들이 힘을 가진 채로 우리끼리 으쌰으쌰하던 때가 적어도 덜 외로웠다.

 

그런데 막상 선거일이 다가올수록 마음이 쉽지 않았다. 이 이야기 저 이야기를 들으며 몰랐던 것들을 알게 된 연유도 있었고, 시간이 다가올수록 앞으로 벌어질 상황이 더 구체적으로 그려지면서 ‘그렇게 타협하니까 우리가 아직 여기 서 있는거지’라는 생각이 너무 낭만적인 소리 같아졌다. 당장 우리 막내가 올해 군대를 가야하고, 광주라는 물리적인 공간에 살고 있는 나에게 여러 다양한 진보적인 아젠다보다 당장 내가 매일 마주하는 지역적인 부분들이 더 크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사전투표를 마치고 인증샷을 찍어 올리는 사람들을 보며 ‘속편해서 좋겠다’라는 꼬인 마음도 올라왔다. 선거 바로 전날, 결정타가 날아왔다. 여성의 날에 당당히 여성의 인권을 후퇴시키겠다고 선언하는 후보의 글을 보며 아, 그래도 로맨틱한 가부장제가 차악이긴 하구나 싶어졌다. 그래도 갈등은 가시지 않았다. 모 후보가 당선이 되면 당선이 되는대로 내 표 하나쯤 다른 쪽에 줬어도 됐을 텐데 싶어서 아쉬웠을거고, 모 후보가 당선이 안되면 어짜피 안될 거 그냥 내 표라도 다른 쪽에 보태줄걸 후회스러울 거 같았다. 어떤 결과가 나와도 슬프고 서러운 내 권리의 행사. 그런 권리의 행사는 정말 하고 싶지 않았다. 선거 당일 정말 막바지에 이르러서야 선거장 앞에 섰다. 선거장 앞에 드디어 도착해서 그 권리라는 것을 행사하기 전에 이렇게 갈등할 수밖에 없는 나의 위치가 너무 서러워서 정말 엉엉 울었다. 그 권리 행사라는건, 비유하자면 나를 당장 죽이겠다고 칼 들고 협박하는 놈 때문에 나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강간하는 놈이 있는 집에 기어들어가야 하는 심정이었다. 그렇게 나는 ‘집토끼’ 한 마리가 되었다.

 

대선결과가 나오고서는 일주일 가까이는 뉴스를 보지 않은 것 같다. 객관적인 사실이 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내 주관적인 세계에서만이라도 미뤄내고 싶었다. 그래도 마냥 절망하지만은 않는다. 이미 절망은 해봤기 때문이다. 나를 절망시킨 지난 정권의 시간덕분에 배운 것이 있다. 하나님 나라는 힘을 가진 사람을 통해 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전에는 이렇게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 그것을 현실화시킬 수 있는 힘이 생긴다면 세상이 나아질 줄 알았다. 그런데 그동안 이기적인 사람들이 유독 힘을 손에 넣었던 것이 아니었다. 권력을 가지면 사람이 그렇게 되는 거였다는 걸 보게 되었다. 그 자리에 올라가면 시각이 좁아지기가 너무 쉽다. 내 주변에 들리는 목소리가 달라지니까. 그러면서 어쩌면 ‘저들’이 권력의 자리에 있고, 이쪽에서 계속 싸워서 법 하나라도 통과시켜가면서 세상이 조금씩 바뀌는 게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했다. 그러면서 세상은 밑에서 이름 없이, 조명 없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의 양심 앞에서 정직하게,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는 이들을 통해 움직이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겠다고 공언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조용히 자기 안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고 있는 이들을 통해서 말이다.

 

그리고 이준석의 전장연 시위관련 발언으로 시끄러운 지금 시점에서는, ‘저’쪽의 정치인들이 그 발언에 대해 비판하고 전장연과 연대하는 모습을 보면서, 저쪽이나 이쪽 같은 건 없는 거라는 사실을 눈으로 보고 배우게 된다. 각자 보는 시선은 조금씩 다를 수 있지만, 자신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양심 앞에서 정직하게 최선을 다하는 그 순간을 통해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게 된다. 다만 그 양심은 누구의 목소리를 듣느냐에 좌지우지가 많이 되기 때문에 내가 누구 옆에 서 있는지를 끊임없이 확인하며, 절망하지 않고 이 모든 과정을, 내 안에 하나님 나라를 먼저 세워가는 시간으로 삼자고 다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