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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신학 2기/대선을 통과하며 느꼈던 감정의 흐름들

혐오의 계곡을 탈출하기 / 김민희

 

김민희 (서울사는 소상공인)


대선으로 초토화된 나의 정서적 쇼크를 말하기 위해 내가 초등학교때 읽었던 한 우화로 시작하겠다. 

오랜 전투 중에 보급품이 다 떨어지고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지다 못해 더 이상 견디지 못하는 한계 상황에서 지휘관이 물었다. “지금 가장 시급한 보급품이 무엇인가?” 병사들이 대답했다. “우리가 지금 속옷을 한 달 동안 못 갈아입었습니다. 속옷을 갈아입고 싶습니다.” 지휘관이 모든 병사들을 모이게 한 다음 명령을 내렸다. 

“지금 당장 앞의 사람과 속옷을 갈아입도록!”    


내 심정이 어떠냐고? 앞의 사람과 속옷을 갈아입어야 하는 그 병사의 마음이다. ‘우리’라고 여겼던 ‘우리’안의 더러움도 견디기 힘든 판에 타인의 더러움까지 뒤집어 써야 하는 혐오의 계곡에서 희로애락애오욕을 담당하는 오감의 기능이 마비될 만큼 절망적이다. 그 누가 승리를 해도 ‘혐오’가 이기는 대선 정국에서 나는 자연스럽게 어떤 혐오의 감정을 더 견디기 쉬운지를 생각해 보았다. 결과가 달랐어도 결국 내 안의 더러움과 찝찝함에 갇혀 비슷한 기분이었을 것이다. 차라리 내 속옷을 계속 입고 있을 소망마저 신성한 민주주의의 명령에 따라 박탈당한 기분이다. 


이번 대선은 내가 방만하게 ‘우리’라고 여겼던 이들의 ‘내로남불’로부터 애초에 ‘나’는 그 ‘우리’에 속하지 않았다는 대단한 정치적 ‘각성’을 일으킨 사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종의 ‘상실감’도 느낀다. ‘우리’안의 더러움을 스스로 자정 할 기회를 놓쳐서 인 것 같기도 하고 최소한 허울 뿐인‘말’의 산성마저 무너진 것 같은 기분이다. 이상하게 ‘고소함’도 있다. 그 ‘우리’에서 목소리를 갖고 있는 자들이 이번 승리를 자화자찬 하며 그 으스대는 꼬락서니를 보면서 내가 아주 역겨워할 것이기에 그 ‘기득권’무리들의 패배에 대한 일말의 응징으로서의 쾌감이다.


이번 선거는 누가 이겨도 거대 양당 제도안에서 기득권을 이미 갖고 있는 자들을 깨끗이 세탁하고 싶은 열망의 대리전으로부터 나를 정화시킬 ‘세탁기’가 없어서 암담했다. 절망했다. 그 ‘세탁기’가 누군가에게는 민주당 변방에서 모든 전투를 이기고 살아 돌아온 파란색 망토였고 누군가에게는 혜성같이 나타난 정치 신예 빨간 망토였다는 것을 이해한다. 상대방에게 혐오를 던지다가 문득 ‘스스로’를 발견한 나 자신을 위로 하기 위해 진한 커피를 내리며 나를 달래고 있고 너튜브 검색 창에 정서를 안정시켜주는 음악을 찾아 심신을 안정시키고 있다. 나를 좀 추스리고 나면 ‘혐오’를 ‘혐오’하는 사람들과의 연대의 가능성을 찾아 어서 이 혐오의 계곡을 함께 빠져나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