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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신학 2기/대선을 통과하며 느꼈던 감정의 흐름들

이‘놈’의 대선: ‘남혐’ 상상하기 / 김정원

 

김정원 목사 (향린교회, 성공회대 박사과정)

 

근래 “너- 남혐있어?”라는 물음을 종종 듣곤 하는데, 그 물음에 답하기 전 그 사람의 저의를 예상해본다. 이자가 나에게 묻고 있는 것은 ‘너 페미니스트야?’, 혹은 ‘너 설마 심상정 찍을꺼야?’, 그것도 아니라면, ‘너 목사가 돼가지고 세상의 반을 혐오하는 거야?’, 마지막으로는 ‘싸우자’ 정도.

 

대개 그들의 저의는 나의 예상 중 하나 이상에 부합한다. 저런 물음은 보통 혐오에 대한 이해가 일천한 데서 온다. 혐오란 대등한 관계에서 발생되지 않는다, 아니 발생될 수가 없다. 흑인이 백인을 증오할 수는 있어도 혐오할 수 없고, 비장애인의 배제에 장애인이 분노할 수는 있어도 혐오할 수는 없다. 다수의 이성애자 앞에서 소수의 동성애자가 위축될 수는 있으나 혐오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임대료 갈등으로 건물주에게 망치를 휘두른 궁중족발 사장을 기억한다. 이 속에서 우리는 건물주를 향한 세입자의 분노를 발견할 뿐이지, 건물주를 향한 세입자의 혐오를 발견할 수는 없다.

 

그런데 이미 수없이 말해져 왔던 그 사실! 여성은 사회정치문화역사경제종교가정국가취업연봉승진심지어토론대화반장선거등등등에서 차별받아왔다. 그러니 여성혐오의 대항적 혹은 상대적 의미로서의 남성혐오란 있을 수 없다. 그럼에도 많은 남성들은 여성들이 ‘남성혐오’를 한다며 와글와글 연대하고 있다. 여성으로 인해 차별당했음을 강직하게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신자유주의의 시련에 뜯겨진 그들의 젊은 날을 왜 사회정치문화역사경제종교가가정국가취업연봉승진심지어토론대화반장선거등등등에서 차별 당해온 여성에게 분풀이 하는가? 징병제는 여성이 아닌 국가가 만든 것인데, 그 분풀이는 왜 국가를 향하지 못하는가? 제발 공멸과 선제타격을 말한 그 님에게 가서 징병의 슬픔을 말하라. 종전과 비핵화는커녕 역대급 국방비를 지불하며 안보에 부단히 힘쓴 그 님에게로 가서 억울함을 토하란 말이다.

 

이준석이 만든 혐오의 정치가, 세상을 반쪽으로만 보게 하는 이분법적 지껄임이, 정치적 전략이라고는 약자배제가 전부인 그네들의 속삭임이 남성연대에게 무엇을 쥐어줬는지 듣고싶다(아니 듣지 않기로 한다). 여혐은 다수의 20대 남성들이 겪고 있는 삶의 무게를 덜어줄 수 없다. 어쩌면 자본주의 체제 이래 가장 가난한 때를 살고 있는 다수의 젊은 존재들이 자신들의 처지를 직시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혐오가 편했을지도. 남혐은 애당초 있을 수가 없는 것이고, 여혐 역시 20대 남성들이 겪는 문제들을 담아내고 있지 못하기에 결국 텅 빈 기표가 된다. 곧 노동자가 될, 이미 노동자가 된, 어쩌면 불안정고용 상태인 이대남들이 김진숙의 37년만의 복직 소식에 뜨거워지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지만, 거기까지는 아니 가더라도, 능력주의나, 공정사회를 비판적으로 보는 것까지는 못 가더라도, 대체 언제까지 댓글창에 모여 ‘군대나 가라’로 자신들의 문제를 쌈 싸드실 것인가. 성비갈등에 휩싸여, 그간 회피했던 자신들의 계급성을 포착할 수 있어야 하리라. 우리를 둘러싼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사회적 문제가, 전방위적인 우리네의 빈곤이 성별의 문제로만 해결될 수 있다면 좋으련만, 안타깝게도 나와 너의 차이가 성별에서만 발생되지 않는다. 국가와 인종은 물론, 우리네 양육자들의 연봉, 너와 나의 대학, 장애유무, 성적지향, 부동산, 나이, 비/정규직, 전세자금 대출 여부까지, 우리를 둘러싼 차이는 그리고 그로인한 차별은 여혐의 지분을 훌-쩍 넘어간다.

 

가슴쓰린 것이 이뿐이랴. 이‘놈’의 대선은 결국 여성들에게 약도 안 되는 쓴물을 들이키게 했다. 여가부 폐지를 말하는 저 당당함을 보라. 이는 ‘여성은 배제해도 괜찮고, 여성차별은 해도 문제가 안 된다’라는 말과 다름없다. 그네들의 주장 속에는 이미 여혐이 녹아져 있었다. 아예 대놓고 혐오와 배제의 정치가 벌어지자, 분개한 과반의 2030 여성들이 이재명에게 표를 주었다. 그런데 가만히 보고 있자면, 성차별이라는 언어를 지우고, ‘젠더갈등’을 수면위에 올린 것이 진정 국힘당만이었을까? 여야의 암묵적 동맹전략으로 보여지는 것은 내 안에 흐르고 있는 반민주당적 기질 때문만은 아니니라. 국보법으로 먹고 살았던 보수(라고 주장하는)당과 국보법 폐지로 연명했던 진보(라고 우기는)당의 경우와 크게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여가부 존폐만을 열나게 논하느라 여성노동자의 개높은 비정규직 비율, 성별임금격차, 돌봄 노동, 남녀를 넘어 성을 기반으로 한 젠더기반 폭력, 차별금지법 제정 등에 대해서는 제대로 따져 묻지도 못했다. 윤석열 덕분에, 이재명은 ‘청년 여성’에게 어필될 수 있었다. 밤거리에서의 안전을 보장 받지 못하는 여성들은, N번방 이후 더욱 불안해진 여성들은, 결국 개운한 정책을 본 적이 없음에도, 성인지 감수성이나 관점의 차이를 확인한 적이 없음에도 아쉬운대로 ‘이재명이라도’ 찍어야만 했다. 표를 나눠먹어도, 이렇게 ‘공정’하게 나눠먹을 수가 없다. 양당정치에 이렇게 또 발목이 잡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영 맘이 좋지 못하다. 여성들의 선택을 존중하면서도, 또, 또! ‘청년 여성’이 민주당에 놀아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틈날 때 마다 속이 쓰리다. 나의 정신건강을 위해 보다 극명해진 양당정치에 더는 분노하지 않으리(정의당 찬동 글 아님 주의).

 

총체적 백래쉬를 극복할 방법을 찾느라 여성들이, 아니 약자들이 함께 고민하고 있다. 그런데, 1번남이든 2번남이든 이것만은 알아 달라. 아직 우리 약자들은 ‘남성’을 혐오해본 적 없다는 것을. 그리고 분기탱천 주먹을 쥐고 달려가야 할 곳은 여성이라는 성별이 아니라, 당신들을 더욱 외롭게 만든 그 어딘가라는 것을. 신자유주의일수도 아니면 이 사회의 딴딴한 구조일수도, 그도 아니라면 그대들의 궁핍한 삶을 가려버린 그 정치‘놈’들일지도. 그런데 이를 어쩌나. 그곳은 장소가 아니기에 오직 사유로만 도달할 수 있을 터인데. 황인숙의 시로 갈무리 한다.

 

<강가에 가서 말하라

 당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괴로운지
미쳐버리고 싶은지 미쳐지지 않는지
나에게 토로하지 말라

심장의 벌레에 대해 옷장의 나방에 대해
찬장에 거미줄에 대해 터지는 복장에 대해
나한테 침도 피도 튀기지 말라

인생의 어깃장에 대해 저미는 애장간에 대해
빠개질 것 같은 머리에 대해 치사함에 대해
웃겼고, 웃기고, 웃길 몰골에 대해
차라리 강에 가서 말하라

당신이 직접
강에 가서 말하란 말이다
강가에서는 우리
눈도 마주치지 말자

 

사족: 규범적 이성애가 만들어낸 남과 여의 개념을 넘어서는 것이 종국의 목표다. 내 속에 필연적으로 그득하게 되어버린 여성주의를, 그러니까 분노를 동력삼아 학습하며 쌓아온 ‘여성’을 벗어나는 것이겠다. 준석이‘놈’을 마주할 때마다 아직은 ‘여성’의 탈을 쓰고 맹렬히 싸우고 싶지만, 여하튼, 버틀러를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이해하는 것. 종국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