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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신학 2기/대선을 통과하며 느꼈던 감정의 흐름들

정치적 내전의 도덕적 등가물 / 정경일

 

정경일 (성공회대학교 신학연구원 연구교수)

 

대선 며칠 후, 내가 조사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는 한 연구 단체에서 대선 평가 토론을 제안해 왔다. 몸과 맘이 피폐해 있던 때라 내키지 않았지만, 무기력의 늪에 빠져 있지 않으려는 기획자의 열정과 회복탄력성이 반갑기도 하고 고맙기도 해서 참여하기로 했다. 그런데 토론 제목은 조금 부담스러웠다. ‘대선관전평’... 물론 스포츠 경기나 정치적 선거 후에 관전평을 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하지만 이번 대선은 후보 간, 정당 간, 국민 간 정치적, 심리적 대립과 갈등이 너무 격렬해서, 나를 비롯한 토론자들의 이야기는 ‘관전평’이 아니라 ‘참전담’일 가능성이 높았다. 게다가 당락을 가른 결과도 0.73%p 초박빙이어서, 승전담도 패전담도 내상 없이 꺼내기 어려웠다.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현대사회에서, 선거가 정치세력 간의 우호적 경쟁과 차분한 선택으로 실시될 거라고 순진하게 기대한 것은 아니다. 선거, 특히 대선은 그 시대의 문제들을 모두 드러내고, 그 문제들을 총체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정치구조를 재구성하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다른 시대 인식과 전망을 가진 정치세력이 대립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사실상 양당 체제가 고착화되어 온 최근의 한국 정치현실에서는 선거 때마다 정치적 대립의 강도가 점점 더 심해져 왔다. 하지만 이번 대선처럼 국민 사이의 적대적 감정이 격렬하게 분출했던 적은 없었다. 국민의 반이 나머지 반을 ‘적’으로 규정해 혐오하며, 선의의 경쟁이 아니라 적의 가득한 전쟁처럼 선거를 치른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무엇보다도, 눈앞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국민 간 적대와 혐오 감정을 의도적으로 조장하고 갈등과 대립을 증폭시킨 정치인의 책임이 크다. 파커 파머는 정치는 “공동체를 창조하기 위한 오래되고 고귀한 인간적인 노력”이라고 했는데, 그렇게 보면 이번 대선이 드러낸 한국사회의 문제는 정치의 과잉이 아니라 정치의 결핍, 아니 정치의 부재였다. 정치인은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정쟁’만 했지 공동체를 창조하는 ‘정치’는 하지 않았다. 여성과 남성, 세대와 세대, 지역과 지역을 정치적 내전 상태로 몰아넣은 것은 현 한국 정치의 파괴적 질병이며 죄악이다. 특히 이십대 청년을 ‘이대남’과 ‘이대녀’로 명명해 갈라치기를 한 것은, 두고두고 한국 정치와 사회에 깊은 상처를 남길 것이다.

 

안타깝고 답답한 심정으로, 정치적 내전이 격화되고 있는 사회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고심하는데, 문득 월리엄 제임스의 〈전쟁의 도덕적 등가물(The Moral Equivalent of War)〉[각주:1]이 생각났다. 평화주의자였던 제임스는 1906년 스탠포드 대학 연설에서 “전쟁에 맞서는 전쟁”을 역설했다. 요지는 전쟁을 막으려면 전쟁만큼 전체 공동체를 단련하고 단결시킬 수 있을 도덕적 등가물(等價物)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직 근대 계몽주의와 산업성장문명의 영향 속에 있었던 제임스는 인간을 상대로 하는 전쟁 대신 “자연을 상대로 벌이는 전쟁”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파괴 대신 생산에 열정과 에너지를 쏟아붓자는 것이었다. 오늘의 시대정신에 비추어 보면 문제가 많은 관점이다. 생태의식의 부재도 문제이고, 영웅적 엘리트주의와 남성중심주의와 인종주의의 한계도 보인다. 하지만 그런 시대적, 개인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막으려면 용맹, 사적 이익의 포기, 명령 복종과 같은 “전쟁의 덕목”에 맞먹는 도덕적 등가물을 찾아야 한다는 것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중요한 통찰이다.

 

전쟁의 도덕적 등가물은 무엇인가? 아니 전쟁에 도덕이라고 할 만한 것이 있는가? 며칠 전, 우연히 전쟁영화 〈태극기 휘날리며〉(2004)를 보았다. 평화주의자를 자처하는 나를 당혹하게 한 것은, 한편으로는 영화가 보여주는 맹목적 애국주의, 증오, 폭력의 광기가 불편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군인들의 자기희생적 우애와 용기와 사랑의 덕목에 감동해 가슴이 울컥했다는 점이다. 분명히 전쟁에는 타인과 공동체를 위해 자신의 하나뿐인 목숨마저 버리게 하는 어떤 숭고한 힘이 있다. 애국심도 마찬가지다. 계급과 지역과 성의 차이를 넘어 국민을 하나되게 하는 강력한 감정 중의 하나가 애국심이다. 특히 전쟁 상황의 애국심은 이기적 자아와 욕망을 초월해 자기를 희생하고 서로 단결하게 한다. 국가권력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외부에서 적을 찾거나 없으면 만들기까지 하는 이유도 애국심의 이름으로 내부의 결속을 극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전쟁과 애국심에는 자기초월과 일치의 힘이 있다. 그래서 마사 누스바움은 애국심의 야누스적 얼굴을 인식하면서도 보편적 연민과 공동선에 기초한 애국심은 바람직한 정치적 감정이라고 한다.[각주:2] 전쟁에 맞서려면 전쟁의 도덕적 등가물을 찾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대선은 끝났지만 정치적 내전은 계속되고 있다. 정치세력 간 타협에 따라 일시적 정전(停戰)은 가능하겠지만 영구적 종전(終戰)은 요원해 보인다. 다음 대선까지 정당 사이에, 국민 사이에 작은 정치적 도발과 공방이 이어질 것이다. 이렇게 국민의 절반이 나머지 절반과 계속 전쟁을 한다면, 우리는 5년 뒤에도 다시 똑같은 전상을 입고 괴로워할 것이다. 언제까지 이 끔찍한 정치적 내전을 계속해야 하는 걸까? 5년의 세월을 혐오와 분노와 보복의 감정에 사로잡힌 채 또 하나의 전쟁을 준비하며 보내는 대신, 그 격앙된 감정의 에너지를 정치적 내전의 도덕적 등가물을 찾는데 사용하며 보낼 수는 없을까? 사회적 소수자와 약자의 인권을 위해, 초격차 사회의 불평등 해소를 위해, 장애인의 이동권, 교육권, 노동권, 탈시설권 보장을 위해, 이주민과 난민을 환대하기 위해, 여성의 안전과 안녕을 지키기 위해, 한반도 평화체제를 만들기 위해, 인류 공통의 위기인 기후재앙을 막기 위해 투신하고 헌신하는 것 말이다.

 

전쟁의 도덕적 등가물을 찾고 실현하는 것은 쉽진 않겠지만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고통의 한국 현대사에는 섬광 같은 자기초월과 일치의 사건들이 있었다. 일제강점기였던 1919년, 우리는 세계 최초의 반제국주의 비폭력 평화운동인 3.1 독립운동을 일으켰다. 한국전쟁 후 7년 만에, 극단적 반공주의가 기승을 부리던 시대에 4.19 민주혁명을 성사시켰다. 1980년 5월, 계엄군의 포위 속에 고립되었던 광주 시민은 서로를 돌보며 사랑하는 ‘절대공동체’[각주:3]를 실현했다. 1987년, 전 국민이 참여한 6.10 민주항쟁으로 군부독재를 무너뜨렸다. 그뿐인가, 철저한 비폭력 직접행동의 21세기 모델인 촛불혁명이 있었던 게 불과 5년 전이다. 고통과 위기의 시대마다 우리 마음을 사로잡고 행동하게 했던 정치적 감정인 연민, 사랑, 희생, 연대가 바로 전쟁의 도덕적 등가물이다. 우리 안의 그 생생한 감정과 사건을 기억하고 신뢰하는 것, 그것이 이 상호 파괴적인 정치적 내전을 종식시키고, 부서지고 갈라진 우리 사회를 치유하는 첫걸음이다.

 

 

  1. William James, “The Moral Equivalent of War,” 1910. https://www.uky.edu/~eushe2/Pajares/moral.html [본문으로]
  2. 마사 누스바움, 박용준 옮김, 『정치적 감정 : 정의를 위해 왜 사랑이 중요한가』, 글항아리, 2019, 8장 “애국심 교육: 사랑과 비판의 자유” [본문으로]
  3. 최정운, 『오월의 사회과학』, 오월의봄, 2012. 2부 “폭력과 사랑의 변증법 : 절대공동체의 등장” [본문으로]